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벅수와 짐대

도초면 고란리 고란마을 돌벅수

by 햇살과 뜨락 2023. 5. 2.

도초도와 비금도는 서로 인접하고 있는 섬이다. 도초도의 화도 선착장과 비금도의 수대 선착장을 잇는 연도교가 놓여 있어 하나의 섬이나 마찬가지다. 도초면의 동쪽에 있는 고란마을은 화도 선착장에서 섬을 가로지르는 도로의 버스 종점에 있다. 마을 동쪽은 고란 잔등을 넘어 이곡리가 인접하고 북쪽에는 용당산(해발 203m)과 금성산(해발 219.2m)이 마을을 등지고 있으며, 서쪽은 신안군 섬들 가운데 가장 넓다는 고란들의 넓은 농경지가 펼쳐져 있다. 이 고란들을 배경으로 도초 사람들은 신안군 하의암태도 사람들과 함께 일제 때 소작쟁의로 항일투쟁에 앞장섰던 역사를 자랑한다.

고란 마을에 들어서면 우선 커다란 돌벅수 1기가 눈에 띈다. 마을 개천 건너 다리목 장석 거리혹은 삼거리라 불리는 곳에 이 벅수가 서 있다. 머리에 높이 30cm 정도 되는 갓처럼 생긴 모자를 쓰고 몸에 도포형의 긴 옷을 걸친 모습이다. 어깨에서부터 반듯이 내린 소맷자락 아래로 다섯 개의 손가락이 앙증맞게 펼쳐져 있다. 80cm 길이의 얼굴은 290cm의 벅수 전체 크기에 비해 긴 편이다. 커다란 타원형의 눈이 툭 튀어나와 있고, 좁은 양미간에서 길게 내려온 삼각형 코는 두툼하며 투박스러운 느낌을 준다. 한편 얼굴 측면의 귀는 몇 년 전 오른편이 깨지고 없어졌으나, 길고 두툼하게 이어 내려와 투박하면서도 석가모니의 귀처럼 부드러운 느낌을 준다. 입의 묘사는 또 다른 느낌을 준다. 지나가는 사람이나 앞쪽의 자연물 몸에 새겨진 이름은 없으나, 뒷면에 ‘을축십\삼 년이라고 건립연대가 새겨져 있다. 벅수는 키가 290cm로 상당히 큰 편이다. 언젠가 마을에 괴질이 번져 젊은이들이 많이 죽자 괴질 때문에 나무벅수를 세우게 되었다 한다. 마을 앞을 지나던 한 선비(혹은 도승)마을 앞에 벅수를 세우면 악()을 막을 수 있으리라는 충고를 하였다. 주민들은 그 말을 받아들여 주민 중에서 손재주가 있는 사람을 시켜 나무를 깎아 나무벅수를 세웠다.

에게 위압감을 주려는 의도에서였는지 웃니, 아랫니를 드러냈는데, 이것이 오히려 웃는 모습같이 보이기도 한다. 벅수의 첫인상은 투박하고 위압적이지만 접할수록 포근하고 익살스러운 느낌을 준다.

그 후 오랜 세월이 지나 1938년에는 돌벅수로 바꾸어 세워 현재에까지 이른다. 나무벅수가 썩어 내려앉을 때마다 다시 깎아 세워야 하는 번거로움을 없애고자 돌벅수를 세운 것이다. 현재의 벅수 뒷면에는 벅수를 세운 연대가 ‘을축십\삼 년이라고 새겨져 있다. 본래는 ‘소화십\삼 년이라고 새겨져 있었는데 해방 후 소화가 일본 연호라 하여 깎아 없앴다.

벅수에 쓰인 화강석은 고란리 난말에서 골라 마을 주민 모두가 끌어 왔으며, 벅수를 처음 세우고 그 앞에 소머리를 진설하고 제를 올렸다 한다. 위의 건립 동기와 과정 외에도 고란 마을에는 벅수를 세우게 된 유래에 대한 많은 이야기들이 있다.

고란마을 벅수제는 특정의 당제에서 하당 신의 신체로서 기능했다. 지금은 당제가 없어져 버렸지만, 과거에는 상당제와 하당제로 나뉘어 상당히 성대하게 지내던 제의였다. 그리고 제사 후에는 또 다른 제의인 죽마제(竹馬祭)를 지냈는데 이 제의는 도초면 일대에 널리 알려져 인근 지역 주민들이 구경하러 올 정도였다고 한다. 상당제는 벅수가 있는 곳에서 100m 떨어진 팽나무가 우거진 상당에서, 하당제는 벅수 앞에서 거행되었다.

도초면 고란리 고란마을 돌벅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