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벅수와 짐대

도초면 외남리 외상마을 돌벅수

by 햇살과 뜨락 2023. 5. 2.

   돌벅수가 있는 외상마을은 도초면 소재지에서 북서쪽으로 약 2km, 화도 선착장에서 도보로 10여 분 거리에 자리 잡고 있다. 마을 외곽에 농경지가 넓게 펼쳐져 있고 북쪽으로는 염전을 조성해 놓았다. 이 외상마을의 어귀, 속칭 ‘빗턱골’ 왼쪽에 돌벅수 1기가 서 있다. 본래 이 벅수는 1946년 건립 당시에는 현재의 위치가 아니라 ‘간데돔’이라 불리는 마을 내 공동우물 옆에 세워져 있었다. 그러다 마을사람들의 여론에 따라 현재의 위치로 옮겨졌다.

유채꽃이 마악 피기 시작한 마을 들머리! 유채밭을 배경으로 서있는 벅수는 매우 이색적이다. 언 듯 보기에 파키스탄 라호르박물관의 석가모니 ‘청년고행상’과 흡사하다. 엄청난 물리적 거리와 문화적 차이, 신앙적 내용과 시대적 차이를 무시하고 비슷한 형태와 느낌을 주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외상마을 벅수는 큰 갓의 모자를 쓰고 손에는 나뭇가지 모양의 창을 쥐고 있다. 마을사람들은 이 창을 ‘위엄의 상징’으로 인식하고 있다. 얼굴 위쪽에는 타원형의 눈이 있고, 눈동자에는 박아 놓았던 구슬이 빠지고 그 자리가 파여 있다. 눈 위에는 갸름한 눈썹이 새겨져 있으며 양 눈 사이에서부터 직선으로 삼각형의 코가 돋을새김되어 있고 입은 한일(一) 자로 벌어져 치아들이 모두 드러나 있다. 턱에는 수염을 달기 위해 여러 개의 구멍을 뚫었는데, 전에는 이곳에 머리카락을 달아매어 수염의 형상을 갖추었다 하나 지금은 구멍만 보인다. 귀는 부처님 귀처럼 윗부분보다는 귓불을 더 크게 하여 축 늘어진 듯이 보인다. 목은 옷을 걸친 듯이 옷 선을 표시한 반면, 가슴은 마치 벌거벗은 듯하다. 가슴의 좌우로 사선을 7줄씩 음각하여 갈비뼈를 묘사한 듯이 보인다.

그러나 가슴 아래 부위는 목 부분과 마찬가지로 옷을 입은 듯이 옷자락의 선을 표시하였다. 그 밑으로 남자 성기 모양이 나타나도록 새겨져 있었으나 30여 년 전에 마을 주민들이 보기 흉하다고 하여 파냈다고 한다. 이 벅수는 키가 240cm 이지

만 폭이 좁아 훌쩍 크게 보인다. 약간은 그로테스크한 느낌을 주는 벅수로 1946년 11월에 세워졌고 세우게 된 동기는 마을 젊은이들이 괴질로 이유 없이 죽는 등 마을에 불상사가 겹치자 무당에게 물어본 즉, 외상마을 앞의 발매 마을에 있는 바위의 지나친 기에서 재앙이 기인한다고 하여 그 기를 꺾어야 한다고 하였다. ‘진개 바위’, ‘진개 방’ 또는 ‘김가(金家) 바우’, ‘장군 바우’라 불리는 그 바위가 외상마을의 기세를 가로막는 형국이기 때문에 마을에 불상사가 생겼다는 것이다. 당시 마을 구장이었던 김창균 씨가 마을 주민들로부터 ‘벅수 건립 기금’을 모아 황말수와 박기술이라는 석공에게 벅수 제작을 의뢰하여 1946년 11월에 이 벅수를 세웠다고 벅수의 기단부에 적고 있다.

본래 외상마을은 마을 공동 의례가 행해지지 않았던 마을이다. 이 마을의 벅수는 풍수 비보를 위해서 세워졌을 뿐 벅수에 어떤 의례가 행해졌다는 내용은 확인되지 않는다. 그러나 간혹 명절에 풍물을 칠 때면 이곳 벅수에서도 굿을 치는데, 마을 사람들 거의 대부분이 천주교 신자라 한다. 천주교신자들의 마을에서 풍수지리적인 내용을 믿고 민간신앙체인 벅수를 세울 뿐만 아니라 간혹 풍물을 치며 제를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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