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계 석탑 둘러보기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益山 王宮里 五層石塔, 국보 289호)
봄이면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는 자그마한 산등성이에 자리 잡은 왕궁터는 백제 궁궐터라고 전해지는 곳이다. 익산시 왕궁면 왕궁리에 있는 이 궁궐터는 미륵사가 있는 미륵산 자락 하나가 남쪽으로 내려와 나직하게 자리 잡은 곳에 있다. 현재 발굴조사 중인 이곳은 남북 길이 460m, 동서 길이 230m의 긴 네모꼴 성터가 확인되었고 왕궁탑이라는 이름의 오층석탑이 서 있다.
발굴결과 성터에서 발굴된 건축용 돌들과 집자리, 그리고 성을 쌓은 방법 등으로 미루어 백제궁성으로서의 규모와 백제의 성곽기술을 사용하고 있음이 밝혀졌다. 다만 누가, 언제 이곳을 궁성으로 사용했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백제의 무왕이 이곳으로 도읍을 옮겼다고 하기도 하고 별궁으로 사용했다고 하기도 하며 후백제 때에도 한 때 궁성의 역할을 했다고도 하지만 모두 확실하지는 않다.
이 왕궁터의 남쪽, 일명 배롱나무라 불리는 목백일홍이 곱게 심어진 널찍한 자리에 왕궁리 오층석탑이 서 있다. 일본에서 발견된 중국 육조시대 『관세음보응험기(觀世音普應驗記)』에 '백제의 무강왕이 지모밀지에 도읍을 옮기어 새로 제석정사라는 절을 세웠는데, 이 제석정사가 639년 11월에 큰 뇌우로 인하여 불이 났다. 건물과 탑이 모두 불에 타버렸으나 탑 속에 있는 불사리병과 금강반야경을 넣었던 목칠함은 그대로 남아있어 다시 탑을 세워 이것들을 모셨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탑이 바로 일명 왕궁탑이다. 1965년에 기울어진 것을 바로잡기 위해 다시 복원할 때 탑 밑에서 또 다른 탑 자리와 건물 터가 발견되어 이 기록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그런 까닭으로 왕궁리 오 층 석탑은 만들어진 때를 추정하는데 상당한 혼란을 겪고 있다.
요즘은 백제시대의 탑이라는 설도 만만치 않게 이야기되고 있는데, 그것은 위의『관세음보응험기』의 기록과 층이 하나인 받침돌, 얇고 넓은 지붕돌 등의 분위기가 부여의 정림사탑과 많이 닮은 탓이기도 하다. 또 받침돌 부분이 좁은 데서 오는 가녀린 느낌과 지붕돌 모서리곡선의 경쾌함 등은 미륵사탑과도 비슷하여 더욱 그렇다. 하지만 이 탑의 몸돌 부분의 돌짜임기법과 3단으로 된 지붕돌, 계단받침 등을 들어 남국신라 때의 것으로 보는 경우도 있다. 또는 이와 달리 이 탑을 백제석탑 양식을 계승한 고려 초기의 탑으로 보기도 한다. 탑에서 나온 유물들이 고려 초기의 것으로 조사되었기 때문이다.
이 왕궁터에는 후백제 견훤의 이야기가 묻혀 있는 곳이기도 하다. 견훤은 이곳에 와서 금마산이 육 백 년 동안 나라를 유지해 온 백제의 땅이니 의자왕의 숙원을 풀기 위해 후백제 왕을 자칭하였다고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다. 견훤이 이곳을 중심으로 후백제를 세웠으리라는 짐작을 가능하게 하는 기록이다.
이 탑은 단층기단으로 땅 위에 바닥돌을 깔고 댓돌을 올린 다음 여러 장의 돌로 벽면을 짰는데 각 면에는 두 개의 버팀기둥과 귀기둥을 새기고 있다. 덮개돌 밑에는 안턱이 새겨지고 위쪽은 약간의 물매를 주었으며 낮은 몸돌괴임을 돋우었다. 1층 몸돌의 벽면에는 귀기둥과 한 개의 버팀기둥을 돋을새김 하였고 지붕의 계단받침은 각각의 돌로 3단의 짜맞춤을 하고 있다. 몸돌에 비해 지붕돌이 널찍한 반면 기울기는 완만하며 추녀 끝에만 살짝 반전을 주었다. 머리장식으로는 노반과 앙화 그리고 파손된 복발 하나가 남아있다.
전체적으로 백제계 석탑이 가지는 특징들을 고루 갖추고 있는 이 탑은 높이가 8.5m에 이르는 큰 탑으로 넓은 지붕돌은 하늘을 향해 활짝 날아오르려는 듯 날개를 편 것 같으나 위로 올라갈수록 줄어드는 비율이 적어서 치솟아 오르는 상승감을 약간 덜하다. 1964년 이 탑을 수리할 때 기단과 1층의 지붕에서 사리장엄구가 발견되었는데 금제 사리함과 사리병, 그리고 접은 책 모양의 금판에 새긴 금강경 19장, 청동여래입상 등이 나와 국보 제123호로 지정되어 국립전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비인 오층석탑 (庇仁 五層石塔, 보물 224호)
서천군 비인면 성북리 탑성마을에 있는 비인 오층석탑은 정림사탑을 충실히 모방하고 있으나 좀 더 세부적인 묘사에 있어서는 어딘지 한 수떨어진다는 느낌을 준다. 고려시대에 들어 옛 백제 지역을 중심으로 백제계 석탑들이 다시 나타나는데, 비인 오층석탑은 그러한 석탑들 가운데 대표적인 탑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고려시대로 단정할만한 기록이나 근거가 있는 것도 아니며 이 탑이 있던 절집도 밝혀내지 못하고 있다.
높이 6.2m의 이 탑은 네 장의 널돌로 된 바닥돌 위에 단층으로 기단을 구성하였으며 여러 장의 돌로 기단의 갓기둥과 면을 채워 놓았다. 역시 네 장의 널돌로 된 갑석에는 물매가 없고 그 위에 놓인 1층 몸돌은 민흘림이 있는 귀기둥과 면석을 각각 다른 돌로 짜 맞추어 놓았다. 지붕돌은 넓은 편이며 네 장의 돌로 계단받침을 만들고 지붕돌 위쪽도 다시 네 장의 돌로 구성해 놓았다. 1층 지붕돌은 여덟 장의 넓고 평평한 널돌로 되어 있어 기단보다 더 넓어 보이며 추녀의 끝에 무게 있는 은은한 반전이 보인다. 탑 꼭대기부분에는 노반이 하나 놓여 있으며 4층 지붕돌이 없어져 버려 현재는 4층만 남아 있다.
월남사터 삼층석탑(月南寺址三層石塔, 보물 298호)
강진군 성전면 탑전마을의 살림집들 사이에 수줍은 듯 몸을 숨기고 있는 월남사터 삼층석탑은 한 때 벽돌로 만든 전탑과 비슷하다 하여 모전석탑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벽돌 모양은 아니지만 여러 개의 돌을 짜 맞추어 만들었기 때문이며 지붕돌의 모양도 전탑과 같이 독특하기 때문이다. 이 삼층석탑은 기단과 탑신의 각 층을 각각의 돌로 짜 맞춘 것이나 1층의 지붕돌이 목탑과 같이 기단보다 넓게 시작하는 것 등에서 백제계 석탑의 특징을 두드러지게 드러낸다.
정림사탑과 상당히 비슷한 모습을 보여주며 호남지방에 남아 있는 백제계 석탑들과의 관련성도 보여준다. 백제계 석탑은 남쪽의 끝인 진도의 금골산 오층석탑을 비롯하여 이곳의 월남사터 삼층석탑과 정읍의 은선리 삼층석탑, 귀신사의 삼층석탑, 왕궁리 오층석탑, 익산의 미륵사터 석탑 등 호남지방을 관통하면서 백제의 수도였던 부여와 공주를 거쳐 계룡산의 남매탑에 이르기까지 제 나름의 아름다움과 독특한 양식을 간직하면서 전해져 오고 있다.
단층으로 되어있는 기단은 바닥돌 위에 기둥 모양의 돌을 세우고 그 사이를 판돌로 채운 뒤 넓은 갑석을 얹어 만들었으며 제법 높이가 있다. 그 위에 놓인 1층 몸돌은 매우 높은 편이며 2층 몸돌부터는 그 높이가 급격히 줄어드는 비례를 갖고 있다. 1층 지붕돌은 기단의 갑석보다 넓으며 아래쪽에는 3단의 받침을 두었고 윗면은 전탑에서와 같이 계단식 층단을 이루었으나 추녀 끝에서 아주 미세하게 반전하여 목탑양식을 살짝 드러내 보인다. 탑의 꼭대기에 머리받침으로 여겨지는 돌이 하나 얹어져 있는 이 석탑은 늘씬하고 우아한 비례를 가지고 있다. 그 양식이 워낙 특이하여 남국신라 때 만들어진 것으로 짐작하고 있으나 그보다 더 앞서 만들어졌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다.
부여 장하리 삼층석탑(扶餘 長蝦里 三層石塔, 보물 184호)
부여군 장암면 장하리 탑산골 마을의 한산사터에 있는 이 탑은 정림사터 오층석탑의 모습을 기본으로 하고 있기는 하지만 1층 몸돌이 유난히 높고 지붕돌들은 몸돌에 비해 지나치게 넓은 편이다. 높이 4.85m로 아담하고 소박한 탑인데 약간 안정감이 부족해 보이는 듯 하나 가녀린 시골 새악시 모습을 하고 있다. 고려시대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나 구체적으로 만들어진 시기를 확인할 수는 없다. 정교하다거나 웅장함과는 거리가 멀지만 탑이 있는 작은 마을과 서로 어울려 소박하고 한적한 시골정취를 물씬 풍겨준다. 더구나 탑을 향해 가는 길은 유유히 흐르는 백마강을 바라보며 달리는 매우 한적한 시골길이어서 더욱 그런 느낌을 강하게 한다.
이 탑은 길고 네모난 돌로 바닥을 삼고 다듬지 않은 돌들로 바닥돌을 두른 다음 그 위에 폭을 좁혀가면서 계단모양으로 3단의 기단을 쌓았다. 그리고는 아주 낮은 몸돌괴임을 두어 몸돌을 받치도록 하였으며 그 위에 여러 장의 돌들을 짜 맞춘 몸돌과 지붕돌들은 차례로 올려놓았다. 1층 몸돌의 갓기둥은 아주 미미하지만 민흘림을 주었고 기둥 위에는 한 장의 널돌을 얹고 다시 폭이 넓고 모서리가 부드럽게 처리된 널돌을 한 장 더 얹어 지붕돌을 받치고 있다. 2층과 3층도 비슷하게 만들었는데, 높이와 너비는 급격하게 줄어들어 있으며 기둥의 민흘림도 없어진다. 3층 몸돌은 북쪽을 향한 면에 높이 18cm, 폭 9cm, 깊이 4.5cm되는 감실을 새겨놓았다.
지붕돌들은 물매가 거의 없이 넓고 납작한데, 추녀 끝에서 살짝 반전의 기미를 보여준다. 지붕돌 위에는 2단의 몸돌괴임이 마련되어 있으며 탑 꼭대기에는 머리장식 없이 노반으로 보이는 네모난 돌이 하나 남아 있다. 1931년에 1층 몸돌에서 범문다라니경 단편, 은합, 상아불상, 목제소탑, 수정옥, 은환 등이 발견되었으며 1962년에 해체하여 수리할 때, 2층 몸돌 중앙의 사리공에서 40여 개의 사리가 들어있는 사리병이 발견되어 모두 국립부여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은선리 삼층석탑 (隱仙里 三層石塔, 보물 167호)
정읍시 영원면 은선리 탑립마을에 있는 이 석탑은 그 느낌이 독특하다. 유달리 1층 몸돌이 높아서 상승감이 강하며 단층기단인 점과 지붕돌의 계단받침의 처리 등이 백제석탑과 닮아 있다. 부여 장하리 삼층석탑과도 많이 닮은 이 석탑은 그리 흔치 않은 백제계 석탑 중 하나이고 각부의 짜임이 매우 흡사해 눈 여겨 살펴볼 만하다. 이 석탑에 관한 기록도 남겨진 것이 없어 고려 때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을 뿐이다.
이 탑은 1층 몸돌이 2m에 가까울 정도로 높고 거기에 비해 이층은 1/3정도로 줄어들어 비례가 맞지 않으며 조화를 잃고 있는 듯 하지만, 전체적인 모습에서 여린 듯하면서 한편으로 안정감을 주는 나름의 느낌을 지니고 있다. 2층 몸돌의 남쪽 면에는 문모양을 돋을새김 하여 놓았고 3층 몸돌은 2층과 거의 차이가 없다. 몸돌은 네 개의 널돌을 짜 맞추었는데 앞, 뒷면에서 보면 옆면의 널돌이 귀기둥처럼 보인다. 지붕돌은 몸돌 위에 널돌을 얹고 그 위에 네 개의 평면 널돌로 처리하여 계단받침을 만들었으며 1층과 2층의 지붕돌 위에는 2단의 몸돌받침을 놓았다. 3층 지붕돌 위에도 같은 식으로 처리되어 있고 그 위에 단순한 지붕모양의 노반이 놓여있다. 지붕돌의 물매는 매우 약한 편이며 우동마루의 반전도 거의 보이지 않아 소박하지만 단조로운 느낌을 준다.
귀신사탑(歸信寺塔, 시도유형문화재 62호)
김제시 금산면 청도리에 있는 귀신사는 국신사(國信寺), 구순사(口脣寺, 狗脣寺)등으로 불리던 퇴락한 절집이지만 시골마을의 한적한 소롯길을 따라 절에 이르면 차분하고 나직하게 오는 이를 감싸는 곳이다. 이 절은 백제 법왕 때 왕실의 안녕과 명복을 빌기 위해 지은 원당(願堂)사찰로 세워졌다고도 하고 676년 신라의 의상대사가 세웠다고도 하지만, 주변의 여러 조건들과 상황을 보아 그리 신빙성이 높은 것은 아니다.
일단, 고려 숙종의 4째 아들인 원명국사 징엄(1090~1141)이 크게 중창했다는 기록은 남아 있다. 화엄십찰의 하나이던 귀신사는 고려 말 왜구들의 침입으로 많이 퇴락한 상태로 있다가 급기야 조선시대에 들어 임진왜란으로 불에 타버리고 폐허가 되었다. 그러다 인조 11년(1633년) 다시 고쳐 짓는 등 여러 차례에 걸쳐 새로 짓거나 고쳐지었다.
이 한적하고 고즈넉한 절집 뒤쪽의 높다란 언덕 위에 이 절이 처음 세워지던 때의 석탑으로 추측되는 귀신사탑이 있다. 이 탑은 지금까지 여러 차례에 걸쳐서 도굴당하거나 무너져 내렸던 탓으로 다시 세우면서 원래의 모습을 살리지 못하여 약간 엉성한 모습을 하고 있다. 즉 이 탑의 지붕돌 위아래에서 지붕돌을 괴는 널돌과 몸돌받침이 서로 뒤바뀐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높이는 4.5m정도이고 기단은 3단의 계단 모양으로 되어 있다.
1층 몸돌은 각각 다른 돌로 귀기둥을 세우고 그 사이에 널 돌을 끼워 만들었으며 이층부터는 하나의 돌에 귀기둥을 돋을새김해 놓았다. 약간의 물매와 반전을 가진 지붕돌은 1층이 여덟 개, 이층은 네 개의 돌을 짜 맞추었으며 삼층은 하나로 되어있다. 현재 남아 있는 탑의 꼭대기에는 노반만 덩그마니 놓여 있는데 본래 삼층이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몸돌과 지붕돌의 연결부위에 널돌들이 놓여 있는 것이 특이하며 상당히 파손이 심해 안타까움을 주는 탑으로 역시 백제계 석탑의 특징을 부분적으로 보여준다.
탑동 삼층석탑(塔洞三層石塔, 유형문화재 66호)
군산시 대야면 죽산리에 있는 이 탑은 1층 기단에 3층의 탑신을 올렸으며 백제계 석탑의 흔적을 보여주는 탑이다. 고려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며 지방적 특색이 강한 이 탑은 여러 장의 돌로 된 바닥돌 위에 역시 여러 장으로 조립된 낮은 단층기단을 구성하였다. 장식 없는 네 장의 갑석 위에 조립하듯 여러 장의 돌로 짜 맞춘 다음 1층 몸돌을 올렸는데 1층몸돌이 유난히 높은 편이다. 하나의 돌로 된 2․3층 몸돌은 높이가 급격히 낮아지며 2층 몸돌에는 갓기둥이 새겨져 있다. 지붕돌은 우동마루의 경사가 거의 없이 네 귀퉁이만 살짝 올라갔으며 받침을 두고 있는데, 1층은 2단이고 나머지는 1단이다. 꼭대기의 머리장식은 노반, 복발, 앙화가 남아있다.
청량사터 오 층 석탑(淸凉寺址五層石塔, 보물 1284호)
청량사터 칠 층 석탑(淸凉寺址七層石塔, 보물 1285호)
동화사의 극락교 앞에서 오른쪽으로 약 1.7km쯤 올라간 곳에 자리 잡은 청량사터에는 절집은 없어지고 독특한 모습의 석탑만이 정겹게 서 있다. 이 두 탑은 백제계 석탑의 특징을 간직하고 있으며 나란히 서있는 까닭으로 오누이탑 또는 남매탑이라 부르기도 한다.
이 탑에는 그럴듯한 전설이 전해진다. 이곳에서 수행하던 상원이란 스님이 입에 가시가 걸려 어려움에 처한 호랑이를 구해주자, 호랑이가 이에 대한 보답으로 처녀를 업어다 주었다. 그러나 수도하는 스님이었던 그는 처녀와 인연을 맺을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처녀를 집으로 돌려보냈으나 어디로 시집을 보낼 수도 없고 하여 그녀의 부모가 인연을 맺어 거두어 주기를 청했다. 하지만 스님은 부부의 연이 아닌 남매의 관계만을 유지하며 두 사람 모두 수도에 정진하였고, 한 날 한 시에 열반에 들었다 한다. 그 두 사람의 사리를 모신 탑이 바로 이 남매탑이라는 것이다.
오층석탑은 나직한 단층의 기단에 5층으로 되어 있는데, 바닥돌과 그 위에 둔 기단의 아랫돌은 각 4장의 돌로 짰다. 기단의 가운데기둥을 돋을새김이 아닌 별도의 돌을 끼워 모양을 드러낸 것은 특이하다. 각 층의 지붕돌은 얇고 넓으며 우동마루 끝에서 아주 작은 반전을 보여준다. 1․2층 지붕돌 밑면의 받침은 2단이며 모두 다른 돌을 다듬어 끼워 넣은 구조이다. 3․4층의 몸돌과 지붕돌은 따로 한 돌씩이며, 4층의 지붕돌받침은 아래층들과 달리 1단으로 되어 있다. 4층 지붕돌 위에 5층 몸돌이 있으나, 지붕돌은 없어진 상태이다. 꼭대기에는 네모난 받침돌 위로 둥근 머리장식이 남아 있다.
칠층석탑도 비슷한 구조를 보이는데, 낮은 단층의 기단 위에 7층의 탑신을 세워 훌쩍 키가 커 상승감이 좋다. 기단은 각 면의 네 모서리마다 기둥을 다른 돌로 세운 점이 특이하다. 1층 몸돌의 한 면에는 직사각형 모양의 감실을 새겼다. 지붕돌 밑면의 받침수는 1층이 2단이고 7층이 1단이며, 2․3․4층은 나중에 보수한 것이라 원래의 모습을 확인하기 어렵다. 2층 지붕돌 낙수면의 경사가 1층보다 급하고, 2~7층까지 몸돌이 줄어드는 비율이 그리 크지 않아 탑 전체의 안정감과 균형을 해치고 있다.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이 모두 없어지고 이를 받치던 네모난 받침돌인 노반만 남아 있다.
두 탑 모두 전체적인 수법으로 보아 부여정림사지오층석탑, 비인오층석탑으로 이어지는 백제 석탑 양식을 따르고 있다. 일부 없어진 부분이 있지만 위로 올라가면서 과감하게 생략된 부분이 있고, 세부적인 새김솜씨로 보아 고려 중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짐작된다. 고려시대에 와서 한 절에 각기 특징 있는 두 가지 유형의 백제탑을 세운 것은 역사적, 미술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백제석탑과 백제계 석탑의 특성
분류 | 탑 | 주 요 특 성 | 비고 |
시원양식 | 미륵사터석탑 | ․ 목조가구수법의 충실한 이행 ․ 모든 부재의 별석 사용 ․ 체감율 완만 ․ 고려척 사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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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형양식 | 정림사터오층석탑 | ․ 목탑형식 탈피 본격적인 석탑양식 ․ 부재의 생략과 변형 ․ 체감율 약간 상승 ․ 고려척 사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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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도양식 | 왕궁리 오층석탑 | ․ 전체적인 미륵사탑과 비슷하나 세부기법은 정림사탑과 비슷 ․ 지붕돌은 정림사탑, 지붕돌받침은 미륵사탑 ․ 체감율 완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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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백제게승양식 | 비인오층석탑 장하리삼층석탑 은선리삼층석탑 귀신사삼층석탑 순화리삼층석탑 죽산리삼층석탑 월남사터삼층석탑 |
․ 전체적으로 정림사탑 모방 ․ 대부분의 부재들이 별석사용 ․ 체감율 상승 ․ 백제탑에 비해 규모축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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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신라절충양식 (백제계 절충양식) |
읍내리오층석탑 가곡리오층석탑 연동사터 폐탑 만복사터오층석탑 |
․ 백제와 신라 양식의 혼용되었으나 전체적으로 백제탑에 가까움 ․ 5층, 또는 오층이상 ․ 체감율 상승 ․ 탑신괴임대가 있는 경우가 많음 ․ 이중기단인 경우도 신라양식에서 상당히 변형된 형태 ․ 대부분의 부재들이 단일석인 경우가 많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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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곡사터칠층석탑 금골산오층석탑 옥마리오층석탑 송제리오층석탑 장문리오층석탑 계룡산칠층석탑 운주사의 석탑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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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신라절충양식 (신라계 절충양식) |
금산사오층석탑 무량사오층석탑 보원사터오층석탑 발산리오층석탑 성주사터 삼층석탑 |
․ 백제와 신라 양식의 혼용되었으나 전체적으로 신라탑에 가까움 ․ 5층, 또는 오층이상 ․ 체감율 상승 ․ 탑신괴임대가 있는 경우가 많음 ․ 이중기단인 경우도 신라양식에서 많이 변형된 형태 ․ 대부분의 부재들이 단일석인 경우가 많음 |
참고문헌과 사이트
강우방․신용철, “탑-한국미의 재발견 5”, 솔, 2003
천득염, "백제계 석탑 연구", 전남대학교 출판부, 2000
정영호, "석탑", 대원사,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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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남철, “한국건축사”, 고려대학교 출판부, 2000
김원룡․안휘준, “신판 한국미술사” 서울대학교 출판부, 1993
김원용외, "한국의 미 9 - 석탑", 중앙일보사, 1992
김진택, "절 그리고 절", 도서출판 보림, 1997
김정기. "미륵사탑과 정림사탑 -건립시기의 선후에 관하여", 고고미술, 한국미술사학회, 1984.12
사이버 백제역사문화관 http://baekje.chungnam.go.kr/
네이버 테마 백과사전 한국의 탑 http://100.naver.com/tower/
한국의 석탑 http://doyong.netian.com/
한국의 탑 http://www.tgedu.net/student/tower/d/
이승훈의 신한국기행 http://www.talman.pe.kr/
고려대장경연구소 http://www.sutra.re.kr
디지털한국학 http://www.koreandb.net/
국립중앙박물관 http://www.museum.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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