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 중국 탑의 기원
중국에 불교가 전래된 때는 전한(前漢) 애제(哀帝) 1년(서기전 2년)이라는 설이 가장 유력하며 서기전 2세기 후반 한무제(漢武帝) 때 개척된 실크로드를 통해서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러므로 중국 탑의 조성도 불교의 전래와 거의 같은 시기에 이루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진수(陳壽, 233~297)의 『삼국지(三國志)』에 의하면 불교사원을 ‘석가의 사당’이라 하여 부도사(浮屠祠)라 이름하고 있다. 그리고 부도사에 대한 설명 중에 ‘중앙에 상륜(相輪)을 설치한 중루(重樓)가 있으며 그 주위에 회랑(回廊)을 둘러댔고 종루의 초층에는 금빛으로 빛나는 불상이 모셔져 있다 ‘고 전하고 있다. 곧 중국식으로 변한 탑의 모습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중국에서는 3세기 이전에 인도 탑과는 다른 다층 다각의 누각형식을 지닌 목탑양식이 개발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불사리가 모셔지는 등 사리신앙이 확립되어 구체적인 탑의 성격을 띠기 시작한 때는 우리나라에 불교가 전해지는 남북조시대였다. 이와 함께 불상을 모시는 금당과도 구분하게 되었다. 기록에도 북조 최초의 왕조인 북위(北魏)의 도무제(道武帝)가 398년 수도 평성에 세운 절집에 오층탑과 수미산을 모시는 불당이 있었다고 전한다. 이런 내용들을 살펴보면 불교전래 초기에는 중국에서도 주로 목탑이 많이 조성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중국의 목탑으로 현재까지 전해지는 가장 오래된 것으로는 11세기 중엽에 세워진 불궁사 석가탑이다. 가장 오래된 전탑인 숭악사 12각15층 전탑이 북위(北魏) 효명제(孝明帝) 때인 523년 작품인 것과 비교하면 상당한 차이가 나는 것은 목탑이 가진 한계 때문일 것이다. 이후 중국에서는 목탑양식을 이어받은 전탑이 주류를 이루게 된다.
나. 우리나라 탑의 기원
우리나라는 고구려 소수림왕 2년(372) 처음으로 불교가 전래되었고 이어 375년에는 초문사(肖門寺)라는 절이 지어졌다. 물론 중국 남북조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우리나라에 들어온 탑의 경우도 이미 중국화 된 모습을 가지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구체적인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다만 대동강 가에 있는 4세기 말에서 5세기 초의 고구려 고분인 요동성총(遼東城塚)의 벽화에 누각형태의 3층 건물이 그려져 있어 그 모습을 짐작하게 한다. 삼국유사의 기록과도 일치하는 것으로 보아 이 벽화에서 보이는 다층 누각형태의 건물은 탑이 분명하다. 더구나 당시 광개토대왕(재위 391-413)이 평양에만 9개의 절을 세웠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불교를 적극 장려한 점도 이를 뒷받침해 주고 있다.
이후 많은 목탑들이 조성되었겠지만 오늘날까지 남아있는 것은 없으며 오직 조선 인조 4년(1626) 경에 조성되었을 것으로 보이는 법주사 팔상전만 남아 있다. 안타깝게도 근래까지 법주사 팔상전과 더불어 쌍봉사 대웅전이 남아 있었으나 그나마 쌍봉사 대웅전은 1984년 불에 타버렸다.
고구려의 목탑 유구는 평원군 원오리사지(元五里寺址), 평양 청암리사지(淸巖里寺址), 상오리 사지(上五里寺址) 등에서 나타나는데 주로 다각다층의 목탑이 유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백제의 목탑 지는 부여 군수리사지(軍守里寺址), 동남리(東南里)의 폐사지 및 금강사지(金剛寺址) 등에서 살필 수 있으며 신라의 경우는 백제 장인 아비지(阿非知)가 건립한 황룡사지(皇龍寺址) 등에서 발견된다.
우리만의 독특한 양식인 석탑이 등장하는 것은 삼국시대 후기인 600년 경이다. 목탑의 유한성을 대신할 반영구적인 재료를 사용한 석탑이 세워지기 시작한 것이다. 처음에는 나름의 양식을 가지기보다는 많은 부분에서 목탑양식을 모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삼국시대의 석탑으로는 백제의 익산 미륵사지 서다층석탑과 부여 정림사지 오 층 석탑, 그리고 신라의 분황사 석탑이 있을 뿐이다. 전탑양식인 분황사 석탑을 제외한 두 탑의 모습은 목탑과 매우 흡사하다. 이처럼 백제에서 석탑이 먼저 탄생한 것은 당시 백제가 삼국 중에서 가장 목조건축술이 발달하였던 나라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백제는 ‘사탑 심다(寺塔甚多)'의 나라라 불릴 정도로 절과 탑이 많이 조성되었으며 신라의 황룡사 구 층 목탑을 백제의 장인인 아비지(阿非知)가 조성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일본의 초기사원 창립에 백제의 사공(寺工)이나 와박사(瓦博士) 등이 건너가 공사를 담당했다는 기록도 엿보인다. 이들 기록을 통해 백제의 건축술이 얼마나 뛰어났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이런 건축술을 배경으로 삼국 중 맨 먼저 반영구적 재료인 돌을 사용하는 석탑을 창조해 내기에 이르렀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