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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석탑

탑의 기원과 배경

by 햇살과 뜨락 2023. 5. 3.

가. 탑의 기원

  탑이 언제부터 조성되기 시작했는지는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열반경(涅槃經)』에 의하면 ‘석가모니가 쿠시나가라의 사라쌍수 아래서 열반에 들자 제자들이 그의 유해를 다비(茶毘)하였는데, 이때 8곡 4두(八斛四斗), 즉 여덟 섬 너말의 사리(舍利)가 나왔고 이 사리를 인도의 여덟 부족이 서로 차지하려 하자 제자인 드로나(Drona, 徒盧那)가 중재, 사리를 나누어 탑을 세우도록 했으며 이 탑을 근본팔탑이라 한다’고 되어 있다. 그렇다면 석가모니 사후인 서기전 483년(또는 서기전 383) 경에 최초의 불탑이 조성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한편 분사리(分舍利)를 하고 난 다음에 드로나와 모라부족이 각각 병과 재를 가져가 탑을 세웠으므로 이를 합쳐 근본십탑이라 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유적들은 실제로 발견되지 않고 있다.

  그로부터 100여년이 지난 후 마우리아왕조의 아쇼카왕(재위 서기전 268~서기전 232, 阿育王)이 근본팔탑의 사리를 발굴하여 8만 4천 등분한 다음 인도 전역에 8만 4천기의 탑을 세웠다고 한다. 하지만 이 내용은 어디까지나 불교경전에 의한 것이며 오늘날 인도에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불탑인 산치대탑과 바루후트대탑의 잔해가 마우리아왕조(서기전 317년경~180년경) 이후인 슝가왕조(서기전 185년경~서기전 80년경) 때 처음 만들어진 점과 보드가야에 있는 높이 55m의 마하보디대탑도 아쇼카왕 때 세워졌다고 전하지만 실제로는 서기 6세기경 세워진 것이다. 또 마우리아왕조 당시 불탑유적이라 할만한 확실한 유적이 발견되지 않고 있어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힘들다.

  더구나 최근 아쇼카왕의 8만 4천 탑은 나가족의 반대로 7기(基)의 근본탑에서만 발굴하였고 스투파라 하지 않고 비하라(승원, Vihara)라는 용어를 쓰고 있으므로 꼭 탑의 조성이라고만 볼 수 없다는 것과 8만 4천도 ‘많다’라는 개념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주장이 등장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탑은 간다라지역과 마투라지역에서 불상이 탄생하는 서기 1세기 말경까지 최소 500여 년간 불교의 가장 중요한 예배대상물이었던 것은 확실하다.

  일반적인 반구형의 묘탑에서 출발한 불탑은 불교의 세력확장과 더불어 점차 거대한 구조물로 변화되어 갔다. 특히 마우리아왕조 이후 인도 전역으로 불교가 전파됨에 따라 많은 곳에 예배대상물로서의 탑이 세워졌다. 이어 불타의 진신사리를 모시는 것에서 보편적인 예배대상물로 바뀌면서 다양한 모습을 가지게 되고 점차 규모도 작아졌다. 더구나 아잔타, 엘로라 등의 석굴사원에서 보이듯 실내에도 조성되기 시작하면서 더욱 그런 현상이 나타났으며 개인이나 가정의 불단에 모시기 위한 아주 작은 탑들도 생겨나기 시작했다.

 

나. 불탑 조성의 배경

   불탑의 조성 목적은 석가모니의 사리를 모시기 위함이었다. 사리란 산스크리트어로 사리라(S-arira)를 음역한 것이며 산골(散骨), 유신(遺身), 영골(靈骨) 등으로 번역한다. 불교 이전부터 인도에서는 학문이나 덕이 높은 사람이 죽으면 화장을 한 후 그 유골은 나누어 가지는 풍습이 있었다. 이런 풍습이 불상 등 구체적인 신앙대상물이 없었던 당시 불교교단에서 나름의 역할을 하면서 사리신앙으로 발전되고 그 사리를 모시는 탑이 중요한 예배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금광명경(金光明經)』의 사신품(捨身品)에는 ‘사리는 곧 계․정․혜를 훈수한 결정체로서 이는 매우 얻기 어려우며 또한 최상의 복전이므로 일체중생들은 마땅히 이 사리에 예배하고 공양하라’고 되어 있다. 사리 자체가 신앙물로서 귀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음을 알려주는 부분이다. 그러나 불교가 널리 퍼지고 탑이 점차 많아짐에 따라 극히 한정된 석가모니의 진신사리(眞身舍利)만으로는 불교 신자들의 요구에 응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런 까닭으로 석가모니의 머리카락, 손톱, 이 등과 석가의 옷이나 좌구 등의 유물도 변신사리(變身舍利)라 하여 부처를 상징하게 되었다.

  인도대륙을 최초로 통일한 마우리아왕조의 아쇼카왕은 불교를 통치이념으로 세우고 엄청난 불사를 일으켰다. 거대한 영토와 수많은 종족, 언어 등으로 구성된 나라를 통치하기 위해서는 하나의 이데올로기가 필요했던 것이다. 통일과정에서 많은 전쟁, 특히 엄청난 대가를 치른 칼링가(Kalinga) 정복전쟁 이후 그는 무력에 의한 통치에 회의를 품게 된다. 그리고 제국의 교통로 곳곳에 ‘다르마(法)에 의한 통치’를 명문화한 원통형의 석주와 바위 표면을 갈고 그곳에 법칙문(法勅文)을 새긴 마애법칙(磨崖法勅)을 세웠다. 그 결과로 인도 전역에 급속하게 불교교단이 확산되고 그들이 거주하고 예배를 올리는 승원들도 함께 확산되었다. 그와 함께 불탑 조성도 이루어졌을 것이며 묘탑으로서의 성격에서 점차 석가모니 자체로 보는 신성한 예배대상으로 그 성격도 바뀌어 갔다.

  이후 석가의 유적지인 탄생지 룸비니, 초전법륜지 녹야원, 성도지 보드가야, 열반지 쿠시나가라 등과 같은 성지를 신앙의 대상으로 삼아 그곳에 기념비적인 거대한 탑이 조성된다. 이런 기념비적인 탑을 지제(支提, Caitya)라 하여 사리를 모시는 탑과 구별하기도 한다. 또 다른 방법으로는 탑에 불경, 불상 등을 모시기도 하는데 이를 가리켜 법신사리(法身舍利)라 부른다. 『법화경(法華經)』의 견보탑품(見寶塔品)에 ‘법화경을 설한 자리는 법화경 자체가 여래가 되므로 탑을 세우되 사리를 넣지 않아도 된다’고 하여 불경, 불상 등으로 진신사리를 대체하여 모실 수 있도록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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