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글
백제의 마지막 수도였던 부여를 감싸고 휘돌아 흐르는 백마강에 저녁노을이 내리면 탑산골 마을에 자리 잡은 가녀린 시골 새색시 같은 장하리 삼층석탑에도 노을빛은 젖어든다. 백마강의 남쪽 기슭에 자리 잡은 부여군 장암면 장하리 탑산골 마을의 한산사터에 외롭게 서서 소박하고 한적한 시골정취를 물씬 풍겨주는 탑이 바로 장하리 삼층석탑이다. 화려함은 당연히 거리가 멀고 웅장하다거나 섬세한 새김솜씨를 보여주지는 않지만, 노을빛에 젖은 탑은 마을의 저녁연기처럼 따뜻하게 가슴에 스미어 든다.
우리나라의 경우 보통 절이나 절집이 있었을 법한 곳에는 이런 석탑들이 있게 마련이다. 절집이 아닌 마을 어귀에 자리잡은 장하리 탑처럼 시장통에 전혀 어울리지 않은 준수한 모습의 경남 창녕읍의 창녕 동삼층석탑도 있다. 무영탑이라 불리는 탑은 바로 불국사 경내에 있는 국보 제21호인 석가탑을 말하는 것이다. 이 탑을 창건할 때에 신라보담 건축기술에 있어서 앞선 백제의 "아사달"이라는 유명한 석공을 초빙하여 공사를 했다. 온 신라의 많은 석공들을 제치고 이 공사를 맡게 된 "아사달"은 전심전력을 다 하여 돌을 다듬고 깎아 탑을 세우는 일에 몰두하였다.
세월은 흘러 고향에 두고 온 사랑하는 아내 "아사녀"는 남편의 일이 하루속히 성취되어 기쁘게 만날 날을 고대하다 못해 그리운 남편이 일하는 신라땅 경주 불국사까지 찾아오게 되었다. 그러나 성스러운 공사가 진행되고 있는 불국사에는 들어갈 수가 없었다. 그것은 부정한 여자의 몸으로 공사를 행 중인 "아사달'을 만난다면, 그의 믿음을 흐트러뜨리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천릿길을 멀다 않고 찾아 온 그녀는 한꺼번에 세상이 무너지는 듯하였다. 남편을 만나려는 그 애틋한 사랑은 여기서 좌절될 수만은 없었다. "아사녀"는 매일매일 불국사 앞을 서성거리며 먼발치에서나마 남편을 바라보려 했다. 그러나 완강한 문지기의 저지로 그 작은 바람도 이룰 수가 없었다. 매일같이 그 측은한 광경을 보아야 하는 문지기는 보다 못해 그녀를 달래기 위하여 이야기를 꾸며댔다.
"여기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자그마한 못이 하나 있소. 그곳은 예부터 신령스러운 곳이라, 당신이 지성으로 빈다면, 탑의 공사가 완성되는 날에 그 탑의 그림자가 못에 비칠 것이니, 당신의 남편 모습도 볼 수가 있을 뿐 아니라, 그때에 찾아오면 만날 수도 있을 것이오."라 했다. "아사녀"는 뛸 듯이 기뻤다. 그리운 남편의 모습을, 그 그림자만이라도 볼 수 있다는 말에 그녀는 기다림에 지친 가슴을 달랬다. 다음날부터 그곳에서 온종일 못을 들여다보며, 행여나 그리운 남편의 모습이 나타나려나 싶어 기다렸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탑의 그림자나 남편의 모습은 나타나지 않고 세월만 흘러갔다. 초조한 기다림 속에 견디다 못한 그녀는 지친 몸을 이끌고 결국 못에 몸을 던지고 말았다. 그 후, "아사달"은 각고의 노력 끝에 석가탑을 완성시켰다.
그는 고향에 두고 온 아내에 대한 그리움으로 단숨에 달려가고 싶었다. 그러나 아내가 몇 달 동안을 남편을 찾아 헤매었다는 소식과 자기의 그림자가 비친다는 말을 듣고 찾아갔다는 그 못으로 달려갔다. 어디에도 아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아사달은 몇 날 며칠을 아내의 이름을 애타게 부르며 못 가를 헤매었다. 그러던 어느 날 건너편에 보이는 바윗돌에서 홀연히 아내의 모습을 보았다. 단숨에 그 바윗가에 이른 아사달의 손에는 차가운 바윗돌만 잡혔다. 그는 미친 듯이 그 돌에 아내의 모습을 찾으며, 아내의 모습을 새기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은 돌일 뿐! 아내는 아니었다. 아내의 모습을 돌에 새겨놓은 체, "아사달은 힘없는 발걸음을 어디론가 옮겨갔다. 정처도 없이... , 아무도 지금까지 그의 뒷일은 아는 사람이 없다.
훗날의 사람들은 이못을 그림자 못, 영지(影池)라 불렀다. "아사녀"가 애타게 "아사달"을 찾으면서 읊었다는 시 한 수가 민간에 전해 온다. 이 시는 후세 사람들이 "아사달'부부의 애절한 사랑을 함께 서러워하며 지은 것이라 여겨진다.
이내 살이 인생살이 이다지도 아플손가,
드는 칼로 베오인들 이 보다야 아플손가,
이내 살이 인생살이 이다지도 쓰달손가
소태나물 쓰다한들 이보다야 쓰달손가,
못살내라 못살내라 피가 말라 못살세라
못살세라 못살세라 임그리워 못살세라.
토함산 구름위에 탑이야 솟건 말던
원한의 저 못속에 그림자야 뜨던 말던
못속에 잠긴 달은 날 오라 손짓하니
아-으 님이시여! 이 세상 서러운 줄
님도 정녕 아오련만,
이내 몸 먼저 가오니 내 뒤를 따르소서.
"영지(影池)"
서정봉(시인 : 1905- 동래출생)
어디서 오는 빛이 그리메도 덮이는가
이승과 저승으로 거울 속에 트인 길을
가만히 귀 기울이면 젖어드는 숨소리
애틋한 그날들이 하늘도 넘어서고
산넘어 울림하던 굽이굽이 그 사연이
여기와 굽어 보는가 출렁이는 무영탑.
석조물로써 오늘날 남아있는 우리나라의 유적, 유물은 그 수효가 다른 문화재에 비해 단연 으뜸이다. 이것은 여러 종류의 석재가 풍부한 까닭이며 특히 화강암이 많이 사용되었는데 화강암은 다른 암석보다 풍부하였고 암질(巖質)에 있어서도 다른 석질보다 연질(軟質)이어서 우선 채석(採石)하는데 빠르고 돌 다듬기에 손쉬우며 여러 가지 조각에 적합한 석질이므로 주재료로 선택된 까닭이다. 불교가 들어온 4세기 후반 이후부터는 불교적인 미술품 전반에 걸쳐서 화강암이 그 조성재료로써 이용되었고, 방방곡곡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석조물이 건조되기에 이른 것이다.
현재 남아있는 여러 석조물을 살펴보면 석조탑파나 석조불상 등 사찰에서 승려와 신도들의 직접적인 예배대상이 되는 것을 비롯하여 석조부도, 석등(石燈), 노주(露柱), 석련대(石連臺), 당간지주(幢竿支柱), 석비(石碑), 석주(石柱) 등 여러 가지 불교적인 미술품과 석수(石獸), 석교(石橋), 석표(石標), 석빙고(石氷庫) 등의 많은 석조물이 있으니 석재로 이루어진 조형물의 다채로움을 알 수 있다. 석조물을 가공하는 데에는 날카로운 쇠붙이 도구 말고는 사용구가 없다. 아무런 가식(假飾)이 없으며 어떠한 다른 빛깔도 채색되지 않고 그 형태를 달리하면서 저마다 그 나름의 아름다움을 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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