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석탑! 그 창조적 아름다움
정림사터 오층석탑은 나직한 단층기단 위에 목조건물의 배흘림기둥을 연상시키는 귀기둥을 세우고 위로 올라갈수록 안쪽으로 쏠림을 주어 안정감을 주는 몸돌을 세운 후, 지붕돌을 살그머니 얹어 놓았다. 지붕돌의 아래쪽은 목조건물의 가구를 단순화시켜 직선으로 처리된 몸돌과 곡선위주인 지붕돌이 서로 어울리도록 하였고 위쪽은 기와지붕의 처마 선처럼 우동마루가 은근한 반전을 지니도록 하여 배경이 되는 하늘에 가볍지 않은 날렵함으로 비추인다. 그렇게 차근차근 5층을 연결하여 하늘을 향해 우아하게 날개를 편 것처럼 보이도록 하면서 적당한 치솟음으로 가벼움을 다스려 놓았다. 차갑고 딱딱한 화강암을 주물러 이토록 편안하고 안온하게 보는 이를 감싸안는 작품을 만들어 놓다니, 이 석탑을 만든 장인의 새김솜씨와 예술적 안목, 그리고 건축기술에 감탄을 금할 수밖에 없다.
처음 사용하는 재료와 새로운 조형양식으로 또 다른 미적 질서를 창출해 내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오늘날 웬만한 예술가들은 그냥 남들이 했던 것을 조금 다듬어 자기만의 조형언어를 구사하는 정도로도 대가로 대접받는 형편이다. 목탑에서 석탑으로의 변신은 그저 조금 다듬거나 바꾼 것이 아니라 우리 미술사에 있어서 하나의 혁명인 것이다. 백제석탑은 그저 나무에서 돌로 재료만을 바꾼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목탑의 형상을 수용하기는 하였으나 재료와 기법이 지니는 조건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조형적, 미적 질서를 다시 창조해야 했다는 것이다. 더욱 놀랄 일은 거기에 빈틈없는 장인의 손길을 곁들어 이상적 아름다움을 남김없이 형상화해 버린 것이다.
백제 때의 석탑으로는 익산 미륵사터 석탑(彌勒寺址 石塔)과 부여 정림사터 오층석탑(扶餘 定林寺址 五層石塔)만이 남겨져 있다. 안타까운 일이다. 또 백제계라 불리는 석탑들도 굳이 여기저기 조금 비슷한 부분이 있는 것들까지 모두 합해도 십 여기를 넘지 않는다. 더구나 이들 백제석탑과 백제계 석탑들에서는 전형(典型)이라고 부를만한 양식적 흐름을 찾기도 힘들다. 각기 다른 모습들과 나름의 아름다움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왠지 밑바닥을 관통하는 비슷한 조형적 미감이 서로에게서 느껴진다면 너무 과민한 것일까? 백제계 석탑들은 한반도 서해안 지방의 남쪽 땅. 즉 옛 백제 땅에 주로 분포되어 있다. 그리고 이 석탑들은 백제가 이 땅에서 자취를 감춘 후에 세워진 것들이다. 조성시기도 각기 다르고 겉모습이 서로 다르면서도 비슷한 조형적 미감이 간직하고 있는 까닭은 같은 문화권에서 영향을 주고받았던 탓이라고 밖에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가. 미륵사터 석탑(彌勒寺址 石塔)
덕유산과 지리산 사이에서 북서쪽으로 뻗은 소백산맥의 줄기 하나가 천호산에 이르러 불끈 솟았다가 다시 나직한 봉우리 하나를 전라북도 익산 땅에 내려놓는다. 오늘날 미륵산(430m)이라 불리는 이 나직한 산은 『삼국유사』백제 무왕조에는 용화산으로 기록되어 있다. 미륵은 석가모니 사후 56억 7천만년이 지나면 용화수라는 나무 밑에서 세 번 설법하여 모든 중생을 구제한다는 미래에 나타날 부처님의 이름이기도 하다. 그래서 용화라는 이름 또한 미륵에 다름 아닌 것이다.
미륵산 자락에 자리하고 남쪽들판을 향하여 웅장한 자태를 드러내고 있던 백제의 미륵사는 이제 없다. 한때는 석양에 긴 그림자를 남기는 석탑 하나와 당간지주 2기가 논과 밭으로 변해버린 절터에 쓸쓸하게 남아 있었을 뿐이다. 1975년부터 시작한 발굴조사가 1996년에 완료된 지금은 입구에 유물전시관이 세워져 있고 동쪽에 석탑을 새로 하나 만들어 놓았으며 건물터와 여러 유구들이 잘 복원되어 있어 예전처럼 쓸쓸하지만은 않다. 이 절은 백제시대 무왕(武王, 600-640) 때 처음 세워져 조선시대 초까지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점차 유지에 어려움을 겪으며 쇄락해 가던 이 절집은 조선시대 중기에는 절터만 남고 옛날의 모습을 완전히 잃게 되었다고 한다. 발굴조사 결과 19,30019,300여 점에 이르는 귀중한 유물이 출토되었으며 그 결과로 오랫동안 전설처럼 입으로 전해오던 미륵사에 관한 이야기들이 실제 있었던 사건으로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 서동과 선화공주의 사랑이야기나 연못을 메우고 절을 지었다거나 서동, 즉 무왕의 탄생에 관한 이야기들이 바로 그것이다.
미륵사는 탑 하나에 금당(金堂)이 하나 있는 ‘일탑일금당식’을 세 개 합친 ‘삼탑삼금당식’의 엄청나게 큰절이었다. 그리고 이 금당 세 채 뒤에 공부하는 강당이 있고 절의 경계와 금당, 강당사이는 회랑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또 가운데 금당 앞에는 목탑을, 동쪽과 서쪽의 금당 앞에는 각각 석탑이 세워놓은 독특한 배치와 엄청난 규모를 지닌 절집이었다. 1997년에 개장한 유물전시관에 만들어져 있는 절의 모형을 살펴보면 이 절집의 규모와 백제사람들의 건축기술과 아름다움을 가꾸는 솜씨가 어떠했는가를 알 수 있다.
미륵사를 세운 백제 30대 무왕은 삼국시대 때 전해오는 몇 안 되는 노래 중의 하나인 서동요(薯童謠)의 주인공이면서 불심이 아주 두터운 왕이어서 왕이 된 뒤 이곳 금마에 미륵사를 세워 나라의 번영을 기원했다. 『삼국유사』 백제 무왕조의 기록에 의하면 무왕이 부인인 선화공주와 함께 사자사로 가다가 현재 미륵사터인 용화산 아래 연못에 이르렀을 때, 이 연못에서 미륵부처님 세 분이 나타났다고 한다. 이를 본 왕비가 무왕에게 부탁하여 이곳 연못을 메우고 절을 세웠는데 이 절이 바로 미륵사인 것이다. 그래서인지 미륵사의 발굴조사결과 나타난 건물 터들을 살펴보면 세 개의 절이 하나로 합쳐진 듯한 모습을 보여준다. 미륵사에 대한 기록들은 삼국유사, 삼국사기, 동국여지승람, 와유록 등에 나타나고 있으나 그 내용들이 빈약하여 발굴조사 이전에는 거의 폐허처럼 버려져 있었다. 백제가 당나라와 신라에 의해 멸망한 탓으로 많은 기록들이 없어져 버린 까닭일 것이다.
경주 황룡사 터의 두 배에 달하는 절터와 엄청난 규모의 구층목탑, 그리고 생채기가 낳은 서탑과 새로 만들어 세운 동탑, 감은사터의 금당 자리처럼 건물 바닥으로 무언가 드나들 수 있도록 한 금당의 바닥구조, 설법을 위한 장소인 대강당, 스님들의 살림집이 있었던 자리들을 둘러보면 당시 백제의 국력과 건축술, 문화적 저력과 창조적인 조형감각이 커다란 감동으로 다가온다. 그 외에도 남국신라시대의 공방지 1곳, 고려․조선시대 와요지 각 2곳 등이 절터 주변에서 조사되었고 스님들의 살림집 주변에서는 주로 백제 이후의 건물 터가 조사되었다. 또 절터의 서쪽과 북쪽 등에서 건물 터가 많이 나타났다.
툭 트인 넓음이 쓸쓸함을 더하는 미륵사터에는 민족 오욕의 역사를 온몸으로 말해주는 상처투성이의 석탑 하나가 외롭게 서 있다. 1300년이 넘는 세월을 어렵게 버티어 온 이 석탑은 일제강점기인 1915년 일본인들이 보수하면서 부서져 내린 부분을 시멘트로 발라버려 흉한 상처를 가릴 수조차 없게 되었다. 본래 9층이었던 이 탑은 지금은 동북쪽 모서리 6층까지만 남아 있다. 그나마 남은 부분에서 우리는 백제 장인의 돌 다루는 솜씨와 우수한 건축기술과 수준 높은 미적 감수성에 다가가 보려 하는 것이다. 지금은 대대적인 보수 중이어서 그나마도 볼 수 없다. 왠지 무언가 빠져버린 듯한 새로 만든 동탑을 살피면서 우리의 문화적 수준이 그 본모습을 제대로 살려낼 수 있을지 우려 반, 기대 반으로 기다릴 뿐이다.
이 미륵사터 석탑은 높이가 14.24m로 원래는 9층석탑이었고 탑이 앉은자리는 변의 길이가 10m나 되는 정방형이다. 원래의 높이는 26m 정도였을 것으로 추측되며 현존하는 우리나라의 석탑들 중 가장 규모가 큰 것이다. 이 탑이 1,300여 년을 버티고 서있을 수 있었던 것은 각각의 부재들을 엇물림 쌓기로 짜 맞춰 놓았기 때문이라고 하며 발굴조사 전까지는 7층탑이었을 것으로 여겼지만 조사 결과 9층탑으로 밝혀졌다. 『삼국사기』의 기록에 의하면 신라 성덕왕 18년(719년)에 벼락을 맞아 반쯤 부서졌었다고 하며 보수에 관한 기록은 없다. 주인인 백제의 멸망이 이 중요하고도 아름다운 석탑을 천덕꾸러기로 만들어버린 것일까?
이 탑이 세워지기 전에는 주로 목탑이나 전탑이 유행했다. 그 이전에 또 다른 석탑이 있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어쨌든 목탑양식을 도입한 우리나라 최초의 석탑인 것이다. 그런 탓으로 목조건물의 가구와 비슷한 부분이 많이 엿보인다. 몸돌 부분에는 기둥과 보의 모습들이 보이고 지붕돌에는 기와지붕에서 보이는 곡선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거의 평면인 지붕돌에서 나타나는 살짝 치켜 올라간 듯한 우동마루 곡선은 정말 아름답다. 이런 아름다움은 상당한 예술적 안목과 뛰어난 기능이 함께 해야만 하며 섬세함을 넘어서 단순화과정을 거치는 창조적인 자세마저 필요하다. 또 몸돌과 지붕돌 사이에는 목조건물의 공포라고 불리는 부분을 단순화시켜 직선형인 몸돌과 곡선형인 지붕돌을 자연스럽게 연결해 내고 있다.
이 탑의 기단부는 네모난 돌을 길게 다듬어 이중으로 낮게 만들었고 그 위에 세운 일층은 네 면이 모두 3칸으로 되어있으며 각 면의 가운데에 문이 뚫려 있어 감실을 구성하고 있다. 갓기둥과 버팀기둥은 모두 배흘림을 준 사각기둥으로 되어있고 귀 솟음 기법을 사용하고 있으며 탑의 중심에는 찰주(擦柱)라 불리는 커다란 돌기둥이 세워져 전체의 무게를 떠받치고 있다. 기둥 위에는 평방(平枋)과 창방(昌枋)을 올려놓았는데, 이 또한 목조건물과 거의 비슷한 구조를 보여준다. 몸돌과 지붕돌 사이는 모서리를 부드럽게 처리한 여러 장의 돌들을 짜 맞추어 3단의 계단받침을 구성하여 목조건물의 공포 부분을 간략화하고 있다.
지붕돌에는 완만한 물매를 주고 우동마루의 모서리를 살짝 하늘로 추켜올렸다.. 우동마루의 반전은 자연스럽게 얇아지다 반전이 시작되기 전의 부분에서 살짝 도톰해지는데, 이는 너무 날렵해져 가벼워지는 느낌을 다스리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인지 평면적인 듯한 지붕돌에서 무게가 있으면서 경망스럽지 않은 날렵함을 느낄 수 있다. 장인의 개인적인 솜씨만이 아닌 백제문화의 저력과 예술적 수준을 그대로 드러내는 부분이기도 하다. 지붕돌의 모서리에는 풍경을 달았던 자국이 남아있고 나머지 층들은 일층과 동일하게 만들었으며 다만, 일정한 비례에 의해 높낮이와 크기를 줄여 놓았다. 그리고 계단받침도 약간 간략해지며 5층 이상은 3단에서 4단으로 증가되었다.
탑의 사방에는 수호신인 것으로 보이는 돌조각이 있는데, 마모가 심하여 모양을 알기 어려우며 하나는 없어지고 세 개가 남아있다. 마을입구에서 보는 장승같기도 하고, 사자나 원숭이 같은 동물처럼도 보이고, 불교의 수호신 중 하나인 금강역사상이나 인왕상같기도 하다.
이 미륵사터 석탑을 기초로 하여 새로 만든 동탑은 발굴 전에 밭으로 되어 있었던 곳을 조사하여 만들어 놓았다. 탑 자리는 본래 네 개의 초석만이 노출되어 있었다. 동탑을 새로 만들 때 이 지역에서 나오는 황등석이라 불리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좋은 재질을 갖고 있는 화강암을 사용하였는데, 탑에 들어간 돌의 양이 1,300평방미터에 달했다고 한다. 동탑의 탑 머리장식은 청동에 금도금으로 멋을 내었고 발굴된 탑 돌들을 부분 부분 끼워놓기도 하였다. 그러나 파손되기는 하였어도 1,300여 년의 세월을 지탱해온 미륵사터 석탑의 느낌만은 못할 뿐 아니라 부분적으로 섬세한 조형감각을 잃고 있다. 이 시대의 문화적 수준을 반영하는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에 서글픔이 다가든다.
나. 정림사터 오층석탑(定林寺址 五層石塔, 국보 9호)
부여읍의 한가운데에 있는 정림사터는 사적 301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이 절터는 1942년 발굴조사 되었다. 그 당시 ‘대평8년진정림사’(大平八年辰定林寺)라는 명문이 새겨진 고려시대의 암키와가 나와 정림사라 불리게 되었고 1028년에 다시 세웠음을 알 수 있게 되었다. 물론 백제 때에도 같은 이름이었으리라고 볼 수는 없고 백제 때 세워진 절터에 고려시대 들어 다시 세워지면서 ‘정림사’라는 이름을 갖게 된 것이라 아닐까 추측할 뿐이다.
이 정림사터의 한가운데에 서 있는 오층석탑은 왠지 외로워 보이기도 한다. 그 단아하기만 한 오층석탑의 1층 몸돌에 백제를 멸한 당나라 소정방이 새긴 글귀가 새겨져 있는데, 모순되게도 그 글귀로 이 탑이 백제 때 만들어진 졌음을 확연히 알 수 있게 되었다. 한편으로는 평제탑이라는 불명예스러운 이름을 갖기도 했었으며 상당한 기간 동안 그렇게 불려져 왔었다. 백제의 옛 궁성터와 궁남지라는 원림 중간에 있는 이 절터는 백제 도읍의 한가운데에 자리하고 있었던 셈이어서 왕실과 관련된 중요한 절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여기에서 나온 유물들도 그런 생각을 들게 한다. 정림사터는 중문, 탑, 금당, 강당을 남북 일직선상에 배치한 일탑일금당(一塔一金堂)식인데, 특이한 점은 중문과 탑 사이에 연못을 파서 다리를 통하여 지나가게 한 점이다. 여기서 나온 유물로는 납석제 삼존불과 소조불, 도용, 숫막새기와, 평와, 토기, 벼루 등으로 백제와 남국신라, 고려로 이어지는 작품들이다. 특히 흙으로 빚어 구운 인물이나 동물상인 도용(陶俑)이 90여 점이나 나와 당시의 풍습과 중앙아시아, 북위(北魏) 등과의 국제적인 교류관계를 살필 수 있게 되었다. 이 유물들은 국립 부여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이 절터에는 오층석탑과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비로자나석불좌상(보물 제108호)이 남아 있다. 석불은 많이 마모되어 형태를 알아보기 힘들게 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따로 붙여놓은 얼굴과 몸이 서로 걸맞지 않아 어색한 느낌을 주지만 당당한 체구와 연꽃무늬 대좌의 새김솜씨로 미루어 상당한 수준의 작품이었음을 말해준다.
그리고 절터 한가운데에 그림자처럼 조용히 서 있는 오층석탑은 백제가 당나라와 신라의 연합군에게 나라를 앗기는 아픔을 새기고 1,300년의 세월을 견디며 백제문화의 정수를 침묵으로 말하고 있다. 이 탑은 익산 미륵사터 석탑과 함께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희귀한 백제석탑 두 개 중 하나로 탑을 짜 맞추어 나간 하나하나의 돌들이 미륵사 탑에 비해 한결 단순해지고 정돈되어 미륵사터 석탑이 목탑을 많이 모방한 것에 비하여 이 탑은 석탑 나름의 독특한 완성미를 보여준다. 높이가 8.33m나 되는 것으로 우리나라 석탑들 중, 큰 편에 속하면서도 전혀 무겁다거나 웅장하다는 느낌을 주지 않으며 아담하고 단정하면서도 은은한 화려함을 연출하고 있다. 단층의 기단에 배흘림기둥을 세우고 살짝 치켜 올라간 듯한 지붕 선을 가진 이 탑은 각각의 부분이 정교한 비례와 알맞은 크기로 서로 연결되어 엄격한 기품마저 엿보인다.
이 탑에 대한 기록은 찾을 수 없고 다만 7세기 중엽에 만들어졌으며 백제 멸망을 지켜보고 있었으리라는 것은 확실하다.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미륵사터 석탑보다는 나중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우세한데, 미륵사터 석탑이 목탑의 양식을 많이 따르고 있다면 이 탑은 석탑으로 변화하는 발전적인 모습과 함께 나름의 독특한 조형미를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백제사람들의 건축기술은 이 탑에서 그 정교함과 아름다움을 빚는 솜씨를 유감없이 보여주는데, 백제장인들의 건축, 조각 등의 솜씨에 관한 여러 가지 기록들과 이야기들은 이를 증명해 준다.
이 탑은 미륵사터 석탑의 1/3정도 되는 크기이며 우리나라 석탑양식의 시원으로 이후 만들어지는 모든 석탑에 영향을 끼치게 된다. 잘 다듬어 마름질한 149장의 화강암들을 짜 맞추어 단층기단 위에 오층을 올려 쌓고 꼭대기는 노반으로 마감하였다. 본래 이 노반 위에는 또 다른 장식물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되는데, 그 이유는 오층 지붕돌과 노반의 찰주구멍 때문이다. 이 탑은 여러 개의 긴 네모꼴 대석으로 바닥을 삼고 단층으로 된 기단을 구성하였다. 기단은 바닥에 2단의 괴임을 깔고 그 위에 널돌로 세웠는데, 각 면에 귀기둥과 하나의 버팀기둥을 두텁게 표현하였지요. 8장으로 짜 맞춘 갑석은 두꺼운 편이며 약간의 물매를 가지고 있으나 반전은 없다.
1층 몸돌은 갑석에서 괴임돌 없이 바로 세워 놓았으며 12장의 돌로 구성되어 있는데, 네 귀퉁이에 배흘림을 준 귀기둥을 세우고 역시 하나의 버팀기둥을 각 면의 가운데에 세운 다음 널돌로 마감하였다. 안쏠림, 귀솟음 등의 목조건축기술을 적절하게 사용하여 안정감과 견고함을 추구하였다. 2층 이상의 몸돌들도 거의 비슷한 모양인데 이, 삼층은 네 장, 사층은 두 장, 오층은 한 장의 돌로 되어 있으며 돋을새김으로 귀기둥을 표현하고 있다. 귀기둥에는 배흘림이 표현되어 있으나, 1층에 비해 높이가 현저히 낮아졌기 때문에 귀기둥이 짧아서 배흘림이 뚜렷하게 나타나지는 않으며 위로 올라갈수록 점차 작아진 몸돌에 비해 귀기둥의 폭은 넓어진 것처럼 느껴진다.
지붕돌들은 낙수면과 몸돌받침이 되는 부분이 각각의 돌로 되어 있으며 지붕돌 아래쪽의 경우도 여러 개의 돌들을 다듬어 목조 건물의 공포를 연상하게 만들어 놓았다. 미륵사탑보다는 지붕의 경사가 조금 더 있으며 미륵사터 석탑과 비슷한 흐름을 두어 우아하면서 은은한 반전을 보여준다. 지붕돌 위에는 다시 제법 두꺼운 널돌을 깔아 몸돌괴임을 삼아 놓았는데, 이같이 괴임을 놓은 것은 이층 이상의 몸돌이 작아져 있어 전체적으로 상승감이 약해지는 것은 막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이 탑은 나무에서 돌로 재료로 바꾸면서 돌이 가지는 특성과 목탑의 건축기술을 곁들여 새로운 미적 질서를 창조해 낸 전형이다. 이미 만들어져 있었던 것이 아닌 무의 상태에서 새로운 아름다움을 가꾸어 내는 일은 참으로 힘든 작업이다. 물론 목탑의 건축기술과 목탑이 가지는 특징들을 빌려오기는 했지만, 석탑으로서 새로운 조형미를 갖추기 위해 재료에 맞게 변화시키고 그 자체로 아름다움을 추구할 수 있는 경지에 도달하고 있어서 더욱 값진 우리의 문화유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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