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글
화왕산(火旺山, 757m)과 낙동강 줄기에 안긴 비사벌이란 또 다른 이름의 창녕은 원래 빛벌가야의 땅이었다. 낙동강이 빚어놓은 중생대 백악기의 늪지이며 자연생태계의 보고라는 ‘우포늪’이 있는 바로 그곳, 창녕읍 술정리 시장통 골목길 한 모퉁이에 삼층석탑 하나가 훤칠한 그 모습을 드러낸다. 갑작스러운 듯 마주하게 되는 이 석탑에는 장식적인 새김이나 구태여 모양을 내려 한 흔적을 찾을 수 없다. 그냥 그대로 시원하게 눈 안에 담겨올 뿐이다.
구불구불한 좁은 골목길들과 삶의 무게에 짓눌린 듯 낮게 내려앉은 민가의 지붕들 때문일까? 아니면 상륜부를 잃어버린 탓일까? 술정리 동삼층석탑에서는 신라전형석탑이 지닌 화려함을 찾기 힘들다. 다만 다부진 솜씨로 마무리한 각각의 돌들이 서로 맞물리고 어우러져 상큼한 상승감과 함께 단아함을 잔잔하게 내비친다. 경주 불국사 대웅전 앞마당에 자리한 다보탑과 함께 수려한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석가탑에서 느껴지는 느낌과는 사뭇 다르지만 신라전형양식의 절정기에 만들어진 석탑답게 정갈한 기품을 갖추고 있는 것이다.
신라전형석탑은 전탑과 목탑이 절묘하게 어울린 탑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목탑양식의 석탑과 전탑을 모방한 모전석탑이 안목 높은 장인의 손에 의해 하나로 결합되면서 새로운 미적 질서를 창출해 낸 것이다. 갓기둥을 돋을새김 한 몸돌과 기와지붕처럼 물매를 가진 지붕돌과 하늘을 향해 상큼하게 들린 우동마루의 반전 등에서는 목탑의 모습을 볼 수 있고 인왕상, 사천왕상 등의 새김과 지붕돌 아래의 계단받침에서는 전탑의 모습을 살필 수 있다.
이런 새로운 양식과 나름의 미적 질서를 창출해낸 때가 바로 신라가 당과 연합하여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키고 난 다음의 일이다. 즉, 신라 역사상 가장 강력한 정치적 배경과 경제력을 가졌을 때이며 세계적인 대국이었던 당나라와의 문화적 교류의 장을 지녔을 때인 것이다. 바로 이런 축적된 문화적 역량이 새로운 조형물을 창조해 낸 원동력이었을 것이다. 일면 이런 건축조형의 발전에는 백제의 건축술도 한몫 거들고 있음을 여러 기록들 속에서 알 수 있다. 이렇게 새로운 조형양식을 창조해 낸 신라전형석탑은 이후 독특한 형태와 아름다움을 지닌 다양한 석탑들의 등장 속에서도 꾸준히 우리나라 석탑조형의 전형으로 이어진다.
신라전형석탑의 역사
가. 신라전형석탑의 시작
우리나라의 탑을 살펴보면 불교가 전래된 4세기 후반부터 6세기 말엽까지 약 200년 간은 주로 목탑이 세워졌을 것으로 보인다. 비록 남아 있는 목탑은 없지만 당시의 절터에서 종종 목탑터를 발견할 수 있어 그런 추측을 가능하게 한다. 전탑도 지역적으로 제법 세워졌을 것으로 짐작하고 있다. 그러나 석탑의 성립은 불교가 들어온지 200여 년이 지난 삼국시대 말기인 600년경 백제에서 이루어졌다. 돌이라고 하는 재료가 가지는 영속성과 목조건축기술이 결합되어 새로운 조형세계로의 여행을 시작한 것이다.
저 유명한 황룡사의 목탑을 백제사람인 아비지(阿非知)가 만들었다는 기록을 굳이 들지 않더라도 백제의 건축술은 매우 뛰어났던 것으로 보인다. 석탑이 만들어지게 되는 이유도 여러 조건과 함께 백제의 수준 높은 건축술로부터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백제시대의 석탑으로 현재까지 남아있는 것은 미륵사터 다층석탑과 정림사터 오 층 석탑뿐이다. 이중 먼저 목탑을 거의 모방하여 만든 미륵사탑에서 시작하여 석탑만이 가질 수 있는 독특한 미적 질서를 찾아내 형상화한 것으로 여겨지는 정림사탑으로 변화했다는 것이 일반적인 정설이다.
한편 신라의 석탑은 전탑을 모방하는데서 출발했을 것으로 보인다. 의성탑리 오층석탑과 분황사 모전석탑에서 그 흐름을 살필 수 있다. 신라의 석탑으로 가장 오래된 것은 분황사 모전석탑이다. 전탑과 거의 같은 모습인 이 모전석탑은 선덕여왕 3년(634)에 만들어진 것으로 화강암을 사용한 백제석탑과는 달리 흑갈색의 안산암을 벽돌처럼 만들어 차곡차곡 쌓아 올렸다. 1층 각 면에 조그만 감실을 설치하고 그 좌우에 인왕상이 배치해 놓은 것도 전탑과 닮아 있다.
이어 남국신라 초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의성 탑리 오층석탑은 약간의 변화를 보여준다. 거의 전탑과 비슷한 모습에서 약간의 목조건축기법이 가미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감은사터 삼층석탑과 고선사터 삼층석탑에서 한국 석탑의 전형이라고 하는 신라전형석탑의 모습이 드디어 드러난다. 이 규모 있는 두 탑을 살펴보면 백제의 목탑양식과 신라의 전탑양식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신라전형석탑의 큰 특징이라고 볼 수 있는 이중기단과 화려한 상륜부를 가졌을 것으로 보이며 층수가 3층일 뿐만 아니라 지붕돌에서도 그런 모습을 찾을 수 있다. 비록 두탑 모두 상륜부를 잃어버려 상륜부의 모습을 살필 수는 없지만 남아 있는 노반과 찰주를 살펴보았을 때, 이후 나타나는 상륜부의 모습이 이미 두 탑에서도 형상화되지 않았나 짐작할 수 있다. 그 뒤 월성 나원리 절터의 오층석탑과 장항리 절터 동서오층석탑을 거쳐 황복사터 삼층석탑의 과도기적인 양식을 거쳐 석가탑란 별칭을 가진 불국사 삼층석탑에 이르러 신라전형양식의 완성을 보게 된다.
나. 신라전형석탑의 전성기
8세기 중엽 불국사 삼층석탑에서 완성된 전형양식은 오늘날까지 우리나라 석탑의 정형으로 이어져 내려온다. 그 후 다양한 형태의 석탑이 등장하기도 하지만 주류가 되지는 못하였던 것이다. 바로 이 때가 바로 신라전형석탑의 전성기인 셈이다. 이때에 만들어진 석탑들은 대부분 그 규모나 건축기술, 또는 조형적인 면에서 확연하게 우수하다.
신라전형양식의 기본적인 형태는 여러 개의 장대석으로 바닥을 삼고 그 위에 2중의 기단을 형성하고 있다. 이 기단에는 갓기둥과 버팀기둥을 돋을새김 하였고 그 안에 안상을 새기거나 팔부중상 등의 새김을 하는 경우도 있다. 2층 기단의 지붕돌인 덮개돌에는 보통 2단의 괴임을 마련하여 몸돌을 올렸다. 갓기둥을 새긴 몸돌 위에는 아래쪽에 5단의 계단받침을 두고 날렵하게 하늘을 향해 반전하는 지붕돌을 올린다. 이 몸돌과 지붕돌은 각각 하나의 돌을 사용한다. 보통 3층의 탑신부 위에는 화려한 상륜부가 놓인다. 상륜부는 노반 위에 복발과 앙화가 놓이고 그 위에 보륜, 보개, 수연, 용차, 보주 등이 긴 찰주에 꽂혀 장식되고 있다.
이 시기의 작품들로는 경주 천군동 동서삼층석탑, 합천 월광사터 동서삼층석탑 등을 들 수 있다. 또 월성 장항리 절터 동서오층석탑, 월성 원원사터 동서삼층석탑 등도 약간의 차이를 보이기는 하나 거의 전형양식의 구조를 충실하게 따르고 있다. 이들 탑 중에는 탑신부나 기단부에 인왕상, 십이지신상 등의 돋을새김으로 탑을 장엄하는 경우도 나타난다.
다. 신라전형석탑의 변화
신라전형석탑은 8세기 중엽 이후 시대가 내려오면 부분적인 변화가 생기고 전체적으로 작아지는 경향이 엿보인다. 예를 들어 지붕돌의 받침이 5단이던 것이 3, 4단으로 줄어든다거나 기단의 버팀기둥 수가 줄어든다거나 없어진다든지 한다. 또 지붕돌의 몸돌괴임이 2단에서 1단으로 약화되고 부드럽게 변화한다.
9세기 후반이 되면 더욱 현저한 변화를 보이게 되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경문왕 10년(870)에 건립된 장흥 보림사 남북삼층석탑이다. 이 석탑은 2층기단의 버팀기둥이 하나로 줄어들고 지붕돌은 얇아진다. 또 네
귀퉁이 치솟음도 아주 심해져 경쾌함을 잃어버리고 가벼워진다. 이런 형식의 석탑에 속하는 것으로는 영주 부석사 삼층석탑을 비롯하여 산청 단속사터 동서삼층석탑. 합천 청량사 삼층석탑, 울주 청송사터 삼층석탑 등을 들 수 있다.
좀더 말기로 내려오면 석탑 자체의 규모가 작아질 뿐 아니라 각 부 양식에 있어서도 큰 변화를 보이게 된다. 즉, 기단부에 있어서 석재가 줄어들고 각 면석의 버팀기둥도 약화되며, 탑신부는 각 층 지붕돌계단받침의 층수가 줄어들고 있다. 그리고 몸돌괴임의 수법이나 낙수면을 비롯한 모양이 전성기와는 달리 변형되어 본래의 아름다움을 약간 잃어버리는 현상이 나타난다. 이러한 변형은 9세기 이후 신라왕실의 골육상쟁과 지방군웅의 할거로 사회가 혼란해지면서 문화예술 전반에 걸쳐 그 수준이 떨어지는 것과 관련이 있다. 특히 조형미술에 있어서는 기상을 잃어버린 섬세함으로 나약해지며 규모가 작아지고 각 부의 양식도 약화되거나 생략된다. 남원 실상사 동서삼층석탑을 비롯하여 합천 월광사터 동서삼층석탑, 경주 효현동 삼층석탑 등이 모두 이러한 예에 속한다.
신라 하대에 이르면 또 하나의 변형된 작풍이 생겨난다. 즉 일반형 석탑에서 기단부의 구조가 2중 기단이라는 기본형을 벗어난 단층기단으로 변화하여 그 위에 탑신부를 받치고 있는 형식이다. 이러한 양식이 나오게 된 동기는 목조건축의 기단이 단층이고 백제계의 석탑들이 모두 단층기단인 점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런 단층기단을 갖춘 작품에서는 여러 개의 긴 대석을 짜맞추어 바닥돌을 마련하고 그 위에 기단부를 구성하고 있는 것이 대부분이다. 문경 내화리 삼층석탑, 문경 봉암사 삼층석탑, 구례 화엄사 동서오층석탑, 밀양 표충사 삼층석탑 등이 바로 그것이다. 가끔 바닥돌을 자연석을 이용하는 경우에도 단층 기단이 나타나는데, 경주 남산 용장사터 삼층석탑의 경우가 그런 예에 해당한다.
이중기단이면서 기단의 버팀기둥이 2주에서 1주로 변화하고 있는 석탑이 있다. 해남 대흥사 응진전전 삼층석탑, 영광 신천리 삼층석탑 등이 있는데 이 탑들은 1층 기단에는 2주의 버팀기둥을 드러낸다. 9세기 후반에 들면서 규모가 위축되고 버팀기둥도 상하층 기단 모두 1주씩으로 약화되며 지붕돌의 계단받침도 4단으로 줄어드는 탑을 볼 수 있다. 대구 동화사 비로암 삼층석탑, 동화사 금당암 동서삼층석탑, 봉화 서동리 동서삼층석탑, 보령 성주사터 중앙삼층석탑과 동서삼층석탑 등에서 상당히 많은 예를 발견할 수 있다.
신라 석탑의 이형양식
남북국시대에는 전형양식을 기본으로 하는 석탑들이 거의 대부분 만들어지지만 한편으로 아주 독특한 형태의 석탑도 등장한다. 신라전형석탑의 전성기인 8세기 중엽 이후에 이르면 건축적 의미의 탑에서 장식적인 요소가 강하게 드러나면서 조각적 의미의 탑으로 변화하는 경향도 보인다. 가장 대표적인 예로서, 경주 불국사다보탑, 구례 화엄사 사사자삼층석탑, 월성 정혜사터 십삼층석탑 등을 들 수 있다. 이 탑들은 모두 8세기 중엽에 만들어진 것으로 이형양식이 탑들을 만들어내는 계기가 된 것으로 짐작된다.
이형석탑들 중에서 전형양식과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만들어진 탑으로는 불국사 다보탑, 화엄사 사사자삼층석탑, 화엄사 원통전전 사자석탑, 정혜사터 십삼층석탑 등을 들 수 있다. 기본적으로 전형양식의 구조를 따르면서 화려하게 장식을 한 탑들로는 원원사터 동서삼층석탑, 화엄사 서오층석탑, 경주 남산동 서삼층석탑, 실상사 백장암 삼층석탑, 진전사터 삼층석탑, 선림원터 삼층석탑, 산청 범학리 삼층석탑, 중흥산성 삼층석탑, 경주 남산 승소곡 삼층석탑 등을 들 수 있다. 이들 탑에는 천인상, 사천왕상, 팔부신중상, 십이지신상, 사방불, 보살상, 인왕상, 안상 등이 기단과 몸돌에 돋을새김되어 있다.
간혹 기단의 모양이 완전히 다른 경우를 살펴볼 수 있는데, 철원 도피안사 삼층석탑의 경우 탑신부는 방형평면이나 기단부에서 8각형의 평면을 이루는 경우가 나타난다. 석굴암 삼층석탑도 기단부가 면석은 8각형으로 각 모서리에 갓기둥이 돋을새김 되어 있고 덮개돌은 원형을 이루고 있다. 이외에도 화강암이 아닌 재료를 사용하는 경우를 들 수 있다. 해인사 원당암 다층석탑은 점판암으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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