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황사 모전석탑(芬皇寺 模塼石塔, 국보 30호)
현재 남아있는 신라 석탑 가운데 가장 오래된 걸작품으로 돌을 벽돌 모양으로 다듬어 쌓아 올린 모전석탑이다. 원래 9층이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지금은 3층만 남아있다. 지금의 높이가 9.3m이니 그대로 남아 있다면 신라인들이 만든 석탑 중 가장 컸을 것이다. 선덕여왕 3년(634) 분황사의 창건과 함께 만들어진 것으로 추측되며, 비슷한 때에 만들어진 목탑양식의 백제 미륵사터 석탑과 좋은 대조를 이룬다. 신라의 석탑들 중 이런 모전석탑들이 제법 남아 있으나 왜 신라에서 모전석탑이 많이 만들어졌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 없다. 이 탑은 1915년에 일본인들의 손으로 수리되어 지금의 모양과 같이 되었으며 수리 당시 탑 안에서 사리함과 구슬 등의 많은 유물들이 발견되었다.
탑은 동서 13m, 남북 13.2m의 넓직한 단층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차곡차곡 쌓아 올렸다. 기단은 벽돌이 아닌 자연석으로 이루어져 있고, 네 모퉁이마다 화강암으로 조각된 사자상이 한 마리씩 앉아있다. 길이 30-45cm, 두께 4.5-9cm의 회흑색 안산암을 벽돌모양으로 잘라 쌓아 올린 탑신은 거대한 1층 몸돌에 비해 2층부터는 현저하게 줄어드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1층 몸돌에는 네 면마다 문을 만들고, 그 양쪽에 불교의 법을 수호하는 인왕상(仁王像)을 부드러우면서도 힘찬 모습으로 높게 돋을새김해 놓았다. 이 인왕상은 7세기 당시 신라사람들의 조각솜씨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훌륭한 작품이다. 지붕 부분은 아래윗면 모두 계단 모양의 층을 이루고 있는데, 3층 지붕돌만은 윗면이 네 모서리에서 위쪽으로 둥글게 솟은 모양이며, 그 위로 화강암으로 만든 활짝 핀 연꽃장식이 놓여 있다.
의성 탑리 오층석탑(義城塔里五層石塔, 국보 77호)
경상북도 의성군 금성면 탑리마을에 세워져 있는 남국신라 때의 5층 석탑으로 높이 9.56m, 기단 너비 4.51m 규모의 화강암으로 된 탑이다. 단층의 낮은 기단 위에 5층의 탑신을 올렸다. 이 탑은 벽돌 모양으로 다듬은 돌로 쌓아 올렸지만 그 크기가 일정하지 않아 분황사 모전석탑과는 약간의 차이를 보여준다. 전체적으로는 전탑의 구조에 목조건축 양식에 서로 어울린 독특한 모습을 지니고 있다.
기단은 여러 개의 돌로 바닥을 깐 뒤, 목조건축을 본떠 버팀기둥과 갓기둥을 각각 다른 돌로 구성하였다. 탑신은 1층이 높으며 2층부터는 높이가 급격히 줄어드는 모습을 보이는데, 1층 몸돌에는 불상을 모시는 방인 감실을 두었다. 지붕돌은 전탑과 같이 밑면뿐만 아니라 윗면까지도 층을 이루고 있으며 윗면이 6단, 아랫면이 5단이다. 그렇지만 전탑과는 달리 지붕돌의 네 귀퉁이가 살짝 들려있어 목조건축의 지붕 끝을 떠올리게 한다. 이러한 독특한 특징으로 인해 분황사석탑(국보 제30호)과 함께 남국신라 전기의 석탑양식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감은사터 동서 삼층석탑(感恩寺址三層石塔, 국보 112호)
경주시 양북면 용당리에 있는 감은사터 앞뜰에 나란히 서 있는 쌍탑이다. 2중의 기단 위에 3층 탑신을 올린 모습으로, 서로 같은 규모와 양식을 하고 있으며, 옛 신라의 1탑 1금당 중심의 가람배치에서 쌍탑가람으로 가는 최초의 배치를 보여주고 있다. 높이 13.4m의 이 탑은 경주에 있는 삼층석탑 중 가장 규모가 큰 것이며 신라전형석탑의 시작을 알려주는 탑이다.
감은사는 삼국을 통일한 문무왕이 새 나라의 위엄을 세우고, 당시 틈만 나면 동해로 쳐들어 오던 왜구를 부처의 힘으로 막아내어 나라의 안정을 도모하고자 세운 절로, 동해 바닷가인 이 곳에 터를 잡았다. 문무왕은 생전에 절이 완성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그 아들인 신문왕이 아버지의 뜻을 이어받아 즉위 이듬해인 682년에 완공하였다. 이러한 호국사상은 탑에도 이어져 장중하고 엄숙하면서도 기백이 넘치는 탑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이 탑의 가장 큰 특징은, 각 부분들이 하나의 통돌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수십 개에 이르는 돌들을 짜 맞추어 세웠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신라전형석탑의 양식을 확립하는 최초의 탑이라는 점일 것이다. 이중의 기단 중 1층 기단은 댓돌과 기단 몸돌을 한돌로 붙인 여러 장의 돌로 맞추고 덮개돌도 여러 장의 돌을 짜 맞추었다. 기단에는 갓기둥과 버팀기둥을 새겨놓었고 덮개돌 위에는 둥글고 각이 진 2단의 괴임을 두어 2층 기단을 받치고 있다. 2층 기단 역시 여러 장의 돌을 짜 맞추었고 갓기둥과 버팀 기둥을 두었다. 2층 덮개돌에는 밑부분에 물 끊기 홈을 새겼고 윗면은 각이 진 2단의 괴임으로 탑신을 받치고 있다.
1층 몸돌은 판석과 기둥돌을 각각 하나의 돌로 맞추고 2층은 각 면을 하나의 돌로, 3층은 전체를 하나의 돌로 맞추었다. 지붕돌도 여러 장의 돌로 이루어져 있으며 당당하고 널찍하다. 모퉁이에는 하늘을 향한 치솟음을 두었고 지붕돌 밑의 계단받침은 별개의 돌로 맞추었는데 모두 5단씩이다. 상륜부는 머리장식 받침인 노반과 찰주만 꽂혀 있다.
탑을 세운 때는 신문왕 2년(682)으로, 1960년 탑을 해체 수리할 때 서쪽탑 3층 몸돌에서 청동제사리(보물 제366-1호)와 청동제사각감(보물 제366-2호)이 발견되었다. 동해로 흘러드는 대종천을 바라보는 높은 절터에 굳건히 발을 붙이고 하늘을 향해 높이 솟아오른 모습은 웅장함과 비장함을 느끼게 한다.
문무왕 수중릉
경주시 양북면 봉길리 앞 바다에 있는 신라 30대 문무왕(재위 661~681)의 무덤이다. 해안에서 200m 정도 떨어진 바다에 있는 수중릉으로 자연바위에 만든 것이다. 문무왕은 아버지인 태종 무열왕의 업적을 이어받아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당의 침략을 막아내 평양에서 원산에 이르는 국토를 되찾았다. 또한 병부, 창부 등 중앙관청을 창설하였고, 지방통치를 위한 5 소경제도와 9 서당 10 정의 군사제도를 마련하는 등 국가 체제 완성의 기초를 제공하였다.
일명 ‘대왕암’이라고도 불리는 이 해저릉은 자연 바위를 이용하여 만든 것으로 그 안은 동서남북으로 인공수로를 만들었다. 바닷물이 동쪽에서 들어와 서쪽으로 나가게 하여 그 내부가 항상 잔잔하도록 하였다. 수면 아래에는 길이 3.7m, 폭 2.06m의 남북으로 길게 놓인 넓적한 거북모양의 돌이 덮혀 있는데 이 안에 문무왕의 유골이 매장되어 있을 것이라 추측된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왕이 죽으면서 불교식 장례에 따라 화장하고 동해에 묻으면 용이 되어 동해로 침입하는 왜구를 막겠다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그의 아들 신문왕은 동해 근처에 감은사를 세워 법당아래 동해를 향한 배수로를 만들어 용이 된 문무왕이 왕래할 수 있도록 설계하였다.
고선사터 삼층석탑(高仙寺址三層石塔, 국보 38호)
원효대사가 주지로 있었던 경주시 암곡동 고선사 옛터에 세워져 있었던 탑으로 덕동댐 건설로 절터가 물에 잠기게 되자 1975년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옮겨 세워 놓았다. 높이가 10.2m에 달하는 이 탑은 2단의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쌓아 놓은 모습으로 비록 상륜부를 잃었으나, 감은사 삼층석탑과 함께 남국신라 초기 석탑의 전형적인 형태를 보여준다. 남국신라 초기인 7세기 후반에 세워졌을 것으로 추측되며, 신라전형석탑양식으로 옮겨지는 초기과정을 보여주고 있어 그 중요성이 크다.
기단은 여러 개의 돌로 구성하였으며 각 면에는 기둥 모양을 돋을새김해 놓았고 탑신도 여러 개의 돌을 조립식으로 짜 맞추었다. 다만 3층 몸돌만은 하나의 돌로 이루어져 있다. 이는 사리장치를 넣어둘 공간을 마련하기 위한 배려로, 석탑을 해체하여 복원하면서 밝혀졌다. 지붕돌은 윗면에 완만한 경사가 흐르는데, 아래로 미끄러지는 네 귀퉁이가 살짝 들려있어 경쾌함을 더해주고 있다. 밑면에는 5단의 계단받침을 새겨 놓았다.
월성 나원리 오층석탑(月城羅原里五層石塔, 국보 39호)
경주시 현곡면 나원리마을의 절터에 남아 있는 석탑으로 높이 8.5m, 기단너비 5.5m 규모의 화강암으로 된 비교적 커다란 탑이다. 이 탑은 남국신라 때의 석탑들 중에서도 그 규모가 큰 것으로 감은사터 삼층석탑과 고선사터 삼층석탑과 비교된다. 또한 다른 탑들과는 달리 천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돌의 빛깔이 제대로 살아 있어 ‘나원 백탑(白塔)’이라 부르기도 한다. 그래서인지 산골짜기에 우뚝 솟은 모습과 빛나는 듯한 탑의 흰색으로 인해 주위를 압도하는 당당함을 물씬 풍겨주는 탑이다.
2층 기단에 5층의 탑신을 세운 모습으로 기단과 1층 탑신의 몸돌, 1․2층의 지붕돌을 제외한 나머지가 모두 하나의 돌로 되어있다. 기단은 각 면마다 버팀기둥과 갓기둥을 돋을새김 하였다. 기단의 버팀 기둥은 각면마다 아래층이 3개씩, 위층은 2개씩 새겨져 있다. 탑신의 각 층 몸돌에는 갓기둥을 돋을새김 하였고 지붕돌은 경사면의 네 모서리가 예리하고 네 귀퉁이에서 살짝 들려있어 경쾌하다. 지붕돌의 밑면에는 5단씩의 계단받침을 두었다. 꼭대기에는 부서진 머리장식 받침인 노반과 잘려나간 찰주가 남아있다. 짜임새 있는 구조와 아름다운 비례를 보여주고 있는 이 탑은 8세기경에 세웠을 것으로 추정된다.
월성 장항리 절터 서오층석탑(月城獐項里寺址西五層石塔, 국보 236호)
경주시 양북면 장항리의 절터는 토함산 동쪽의 한 능선이 끝나는 기슭에 마련된 절터이다. 절의 이름은 물론 관련 기록이 전혀 없어 그저 마을의 이름을 따서 장항리 절터라 부르고 있다. 이곳에는 금당터를 중심으로 동탑과 서탑이 나란히 서 있는데, 1923년 도굴범에 의해 붕괴된 것을 1932년에 복원이 가능한 서쪽 탑만을 새로이 복원해 놓았다. 동탑은 1층 몸돌과 5층까지의 지붕돌만 남아있으나 서탑은 몇 군데 파손된 곳을 제외하고는 비교적 온전하게 보존되어 있다.
서탑은 2중의 기단 위에 5층의 탑신을 갖추고 있는 모습이다. 기단부는 비교적 넓게 만들어져 안정감이 있으며, 네 모서리와 각 면의 가운데에 기둥을 본떠 조각했다. 탑신부는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하나의 돌로 이루어져 있으며, 1층 몸돌의 각 면마다 문을 지키고 서 있는 한 쌍의 인왕상(仁王像)을 돋을새김해 놓은 것이 특이하다. 지붕돌은 밑면에 5단씩의 받침을 두고 있고, 경사면은 평평하고 얇으며 네 귀퉁이는 뚜렷하게 추켜올려져 경쾌함을 더하고 있다. 5층 지붕돌 꼭대기에는 머리장식 받침인 노반만 남아 있다.
탑의 1층 몸돌 각 면에는 한 쌍의 인왕상을 정교하게 돋을새김해 두었는데, 이러한 현상은 8세기 전반기에 처음 나타나는 것으로 이 탑의 독특한 특징이 되고 있다. 전체적으로 비례가 아름답고 새김도 우수한 8세기의 걸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는 이 탑은 남북국시대의 석탑 연구에도 귀중한 자료가 된다.
경주 구황리 삼층석탑(慶州九黃里三層石塔, 국보 37호)
경주시 구황동에 있는 높이 7.3m의 이 탑은 신문왕이 돌아가신 후 그 아들인 효소왕이 아버지의 명복을 빌고자 세운 탑으로 ‘황복사지석탑’으로 불리기도 한다. 효소왕 1년(692)에 세워진 탑으로, 이후 효소왕의 뒤를 이은 성덕왕이 즉위한 지 5년만인 706년에 사리와 불상 등을 다시 탑 안에 넣어 앞의 두 왕의 명복을 빌고, 왕실의 번영과 태평성대를 기원하였다. 1943년 탑을 해체하여 수리하면서 2층 지붕돌 안에서 금동 사리함과 금동 불상 2구를 비롯하여 많은 유물을 발견하였는데, 그중 사리함 뚜껑 안쪽에 탑을 건립하게 된 경위와 발견된 유물의 성격이 기록되어 있어 탑의 건립 연대와 조성 의도를 정확히 알 수 있게 되었다.
남국신라 석탑의 전형적인 모습이면서도 초기 양식의 변화과정이 잘 담겨져 있는 석탑이다. 기단의 양식은 감은사터와 고선사터의 석탑과 거의 비슷하나, 기단의 각 면에 새겨진 버팀 기둥이 3개에서 2개로 줄어들어 있다. 탑신부도 여러 개의 돌로 짜 맞추는 대신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하나의 돌로 이루어져 있어, 달라진 석탑의 양식을 보여준다. 지붕돌은 윗면이 평평하고 네 귀퉁이가 살짝 올라가 경쾌하며, 밑면에는 5단의 받침을 두었다. 탑의 꼭대기에는 머리장식 받침인 노반만이 남아있다.
불국사(佛國寺, 사적 및 명승 1호)
불국사는 석굴암과 함께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우리의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이 절은 경북 경주시 진현동 토함산(吐含山:745m) 기슭에 자리잡고 있으며 남국신라 때인 경덕왕 10년(751)에 김대성(金大城)이 지었다. 그는 전생의 부모를 위하여 석굴암을, 현생의 부모를 위하여 불국사를 세웠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김대성은 서기 774년까지 24년 동안 이 대사업을 이끌었으나 완공을 보지 못하고 죽었다. 그 후 나라에서 마무리하였는데, 무려 30여 년의 세월이 걸렸다.
불국사는 신라인이 그린 불국토, 즉 이상적인 피안의 세계를 지상에 옮겨 놓은 것으로 법화경에 근거한 석가모니불의 사바세계와 무량수경에 근거한 아미타불의 극락세계 및 화엄경에 근거한 비로자나불의 연화장세계를 형상화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 절집에는 심오한 불교사상과 천재 예술가의 혼이 독특한 형태로 표현되어 있는 것이다.
불국사의 가람배치를 살펴보면 크게 두 개의 구역으로 나누어져 있다. 그 하나는 대웅전을 중심으로 청운교, 백운교, 자하문, 범영루, 자경루, 다보탑과 석가탑, 무설전 등이 있는 구역이고 다른 하나는 극락전을 중심으로 칠보교, 연화교, 안양문 등이 있는 구역이다. 창건 당시의 건물들은 대웅전 25칸, 다보탑, 석가탑, 청운교, 백운교, 극락전 12칸, 무설전 32칸, 비로전 18칸 등을 비롯하여 무려 80여 개의 건물이 있었고 총 2천여 칸에 이르렀다고 한다.
불국사 앞의 독특하고 화려한 석조구조물들은 창건당시 8세기 유물이고 그 위의 목조건물은 불에 타버려 18세기에 중창한 것이며, 회랑은 1960년대에 복원한 것이다. 불국사의 석조 구조는 길고 짧은 장대석, 아치석, 둥글게 도출된 기둥석, 난간석 등 잘 다듬은 다양한 형태의 석재로 화려하게 구성되었는데 특히 연화교와 칠보교의 정교하게 잘 다듬은 돌기둥과 둥근 돌난간은 그 정교함, 장엄함과 부드러움은 보는 이의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또한 이곳에 있는 다보탑과 석가탑은 각기 두 사람의 선남선녀로 비유되기도 하는데, 그 정교한 건축미로나 완벽한 상징성으로나 불교의 이념을 이 땅에 구현하고자 노력한 신라인의 정신을 대변하는 사상과 예술의 진수라 할 만하다.
불국사내 주요 문화재로는 다보탑(국보 제20호), 석가탑(국보 제21호), 청운교와 백운교(국보 제23호), 연화교와 칠보교(국보 제22호), 금동아미타여래좌상(국보 제27호), 비로자나불(국보 제26호)등이 있으며, 불국사는 1995년 12월 석굴암과 함께 세계문화유산으로 공동 등록되었다.
불국사 삼층석탑(佛國寺三層石塔, 국보 21호)
불국사 삼층석탑은 다보탑과 함께 대웅전 앞뜰에 세워져 있으며 탑의 원래 이름은 ‘석가여래 상주 설법탑(釋迦如來 常住 設法塔)’으로 보통 석가탑이라 부른다. 두 탑을 같은 위치에 세운 이유는 현재의 부처인 석가여래가 설법하는 것을 ‘과거의 부처’인 다보불(多寶佛)이 옆에서 옳다고 증명한다는『법화경』의 내용에 따른 것이다. 2층의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린 높이 10.4m의 이 탑은 8세기 이후 신라전형석탑의 으뜸으로 꼽힌다. 감은사터 삼층석탑과 고선사터 삼층석탑의 양식을 이어받아 신라석탑 나름의 아름다움을 멋들어지게 소화해 낸 귀중한 작품이다.
바닥돌은 다듬지 않은 울퉁불퉁한 바위인데, 목조건축의 그랭이질 기법을 이용하여 기단을 올렸고 이 기단의 주위로 네 모서리와 네 변의 중심에 원형의 연화좌대를 놓고 그 사이를 장대석으로 연결한 팔방금강좌(八方金剛座)를 두었다. 이 바닥돌 위에서 탑 전체의 무게를 지탱하는 튼실한 2중의 기단은 여러 장의 다듬은 돌로 빈틈없이 정교하게 짜 맞춰져 있다. 기단에는 갓기둥을 돋을새김해 두었으며 각 면마다 두 개씩의 버팀기둥을 두고 있다. 하나의 돌로 단정하게 마감되어 있는 몸돌에도 역시 갓기둥이 새겨져 있다. 지붕돌의 모서리들은 살짝 추켜올려져 있어서 상큼하며 계단받침은 5단이다. 상륜부는 파손되었는데 1973년 남원 실상사 삼층석탑의 머리장식을 본떠서 복원하였다.
탑이 세워진 때는 경덕왕 10년(751)으로 추측되며, 그 후 원래 모습대로 잘 보존되었으나, 안타깝게도 1966년 9월 도굴꾼들에 의해 탑이 손상되는 일이 있었다. 그 해 12월 탑을 완전하게 복원하면서 2층 탑신의 몸돌 앞면에서 부처님의 사리를 모시던 사각형의 공간을 발견하게 되었다. 여기서 여러 가지 사리용기들과 유물을 찾아냈는데, 그 중에서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국보 제126호)이다. 이것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인쇄물로 닥나무 종이로 만들어졌으며,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이 탑은 ‘무영탑(無影塔)’이라고도 불리우는데, 여기에는 석가탑을 지은 백제의 석공 아사달을 찾아 신라의 서울 서라벌에 온 아사녀가 남편을 만나보지도 못한 채 연못에 몸을 던져야 했다는 슬픈 전설이 서려 있다.
불국사 다보탑(佛國寺多寶塔, 국보 20호)
다보탑은 대웅전 입구인 자하문을 사이에 두고 앞뜰의 동쪽에서 석가탑과 나란히 서있으며 높이도 10.4m로 같다. 신라전형석탑이 아닌 이형석탑에 속하는 다보탑은 과거의 부처인 다보불(多寶佛)이 현재의 부처인 석가여래가 설법할 때 옆에서 옳다고 증명한다는『법화경』의 내용을 형상화한 것이다. 탑이 세워진 때는 불국사가 창건된 남국신라 경덕왕 10년(751)으로 추측된다. 목조건축의 복잡한 구조를 참신한 발상을 통해 산만하지 않게 표현한 뛰어난 작품으로, 4각, 8각, 원을 한 탑에서 짜임새 있게 구성한 점, 각 부분의 길이․너비․두께를 일정하게 통일시킨 점 등은 8세기 남국신라 미술의 정수를 보여주고 있다.
석가탑을 보면 2중의 기단 위에 세운 3층탑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지만, 다보탑은 그 층수를 헤아리기가 어렵다. 열 십(十)자 모양의 평면을 한 기단에는 사방에 돌계단을 마련하였다. 그 위에 본래는 네 마리의 돌사자가 지키고 있는 모양이었으나 지금은 불행하게도 한 마리만 남아있다. 이 위에 세 부분 즉, 3층으로 된 탑신부를 두었다. 맨 아래 1층에는 먼저 사각의 난간을 돌리고 그 내부에 아무런 장식이 없는 팔각의 탑심석을 세웠다. 이 탑심석 주위에 허리가 잘록한 8개의 기둥을 세워 2층의 팔각 받침대를 떠받들게 했다. 2층은 받침대 위에 또다시 팔각의 탑심석을 놓고 그 둘레에 대나무 모양으로 다듬은 돌기둥 8개를 세우고 밖에 또다시 8각의 난간을 둘렀다.
3층은 대나무형의 기둥이 받치고 있는 연꽃에서부터 시작된다. 16개의 잎이 부드럽게 돌아가며 새겨진 앙련은 화려하다. 앙련 위에 팔각 받침대를 놓고 위에 다시 팔각의 탑심석을 놓았다. 그 둘레에 연꽃의 꽃술인 것처럼 보이는 8개의 지붕돌 받침을 세워 팔각의 지붕돌을 받치도록 했다. 지붕돌의 처마 안쪽에는 폭이 제법 넓으나 깊이가 얕은 홈이 파여 있다. 지붕돌의 밑면은 거의 수평이지만 지붕을 타고 흘러내린 빗물이 다시 천장을 타고 안으로 흘러 들어갈 수가 있는데, 이 홈이 있어서 더 이상 안쪽으로 흘러들지 못하고 밑으로 떨어진다. 이러한 홈을 '물끊기홈'이라고 한다. 지붕돌은 처마의 선이나 추녀마루의 선을 비롯한 모든 선을 부드러운 곡선으로 처리했고, 3층의 앙련석을 살짝 덮어주는 크기로 만들었다.
머리장식은 팔각 노반을 두고 둘레에 연꽃을 새겼으며 그 위에 석가탑과 비슷한 머리장식을 차례로 올려놓았다. 다보탑은 1층은 방형, 2층은 팔각, 3층은 부드러운 원으로 변화를 주었는데, 이는 불교의 심오한 교리를 나름의 미적 질서로 새롭게 형상화 해낸 것이어서 더욱 그 가치가 높다.
안타깝게도 다보탑에는 일제에 나라를 빼앗겼던 설움이 고스란히 전해져 온다. 1925년경에 일본인들이 탑을 완전히 해체, 보수하였는데, 이에 관한 기록이 전혀 남아 있지 않다. 또한 탑 속에 두었을 사리와 사리장치, 그 밖의 유물들이 이 과정에서 모두 사라져 버려 그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기단의 돌계단 위에 놓여있던 네 마리의 돌사자 가운데 보존상태가 가장 좋았을 듯한 3마리가 일제에 의해 약탈되어, 이를 되찾기 위한 노력이 오래전부터 있었으나 아직까지 그 행방을 알 수가 없다.
창녕 술정리 동삼층석탑(昌寧述亭里東三層石塔, 국보 34호)
창녕읍 술정리에 있는 이 탑은 신라전형석탑의 양식을 충실하게 따르고 있으며 높이는 5.75m이다. 창녕지역은 빛벌가야의 땅이었다가 진흥왕 때부터 신라의 정치․군사상의 요지가 되었다. 이 탑이 동삼층석탑인 것은 술정리에 이곳에서 서쪽으로 약 2km쯤 떨어진 곳에 삼층석탑이 하나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물론 규모나 수준이 조금 떨어지는 탑으로 서로 다른 절집, 다른 시기의 탑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기단에는 위․아래층 모두 각면의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 모양이 새겨져 있고, 탑신 역시 몸돌의 모서리마다 기둥모양을 한 새김이 있다. 지붕돌은 수평을 이루던 처마가 네 귀퉁이에서 살짝 치켜 올라가 간결한 모습이며, 밑면에는 5단의 받침을 두었다. 1965년 탑을 해체, 복원할 당시 3층 몸돌에서 뚜껑 달린 청동잔형 사리용기 등의 유물들이 발견되었고, 바닥돌 주위에 돌림돌을 놓았던 구조도 밝혀졌다.
8세기 중엽인 남북국시대에 세워진 탑으로, 위로 올라가면서 적당한 비율로 줄어드는 몸돌로 인해 충분한 안정감과 아름다움이 느껴진다. 세부적인 수법도 정교하여 불국사 삼층석탑과 비길만한 기품이 있으며, 삼국시대부터 신라 영역에 속해있던 창녕의 지역적인 특성으로 볼 때, 경주 중심의 탑 건립 경향이 지방으로 확산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어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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