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순 벽라리 돌미륵
햇살 맑은 가을 초입에 돌벅수를 찾아 나선다. 들판은 어느새 황금빛으로 물들기 시작해 풍요로운 가을걷이의 때가 되었음을 속삭인다. 상쾌한 바람결과 드높게 푸른 하늘엔 가을이 묻어난다. 이 맑은 날! 그 좋아하는 답사길인데도 마음 한구석 그늘이 짙다. 요즈음 몇 년 동안 세상 돌아가는 꼴에 적응을 못해 심기가 불편한 탓일 것이다. 적응 못하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그중 하나가 망국적 일제 근대화론이다. 일제강점기를 통해 조선이 근대화되었다는 내용으로 이젠 교과서에 까지 기술해야 한다고 기세등등하다. ‘한국현대사학회’라는 단체에서 주장하고 교과부에서 이를 적극 수용하겠단다.
이 나라는 도대체 언제쯤 말끔하게 일제의 잔재를 걷어낼 수 있을까? 일제가 철도, 도로, 항만 등의 근대화 기반을 닦은 것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조선 민중의 생산물을 수탈하고 대륙 진출의 교두보를 구축하기 위한 것이었다. 조선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친일아작대장군, 친미작살대장군이 필요한 때라고 일침을 놓자 일행들이 한바탕 웃는다.
너릿재너머 화순읍에서 능주로 가는 2차선 옛길로 돌아들면 경전선 철도가 지나간다. 이 철도는 남평에서 화순읍 쪽으로 오다가 화순역을 휘돌아 남쪽 들판을 향해 능주로 내려가는데, 여기에 ‘대리석불입상’이라 이름 지어진 벽라리 돌미륵이 있다. 지금은 화순읍 대리로 행정구역이 변하면서 이름도 바뀌고 주변 환경도 많이 달라졌지만, 여전히 벽라리 돌미륵이란 이름이 정겹다. 논 가운데 나직하고 둥글게 자리 잡은 둔덕이 있고 그곳의 팽나무 그늘에 외롭게 서있는 이 돌미륵은 남쪽을 향하여 넓은 들을 허허롭게 바라보고 있다. 사람들에 따라서 마을을 지키는 벅수라고하기도 하고 조선 중기 이후 민간신앙과 결합하여 마을로 내려온 미륵부처님이라고 하기도 한다. 또 이곳 벽라리출신으로 조계종의 2대 국사였던 진각국사(眞覺國師 : 1178-1234) 혜심의 초상조각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철도가 놓이고 도로마저 확장하면서 마을 입구를 지키는 수호신으로서의 역할은 약해졌지만, 벽라리 사람들의 간절한 바람을 담아내는 신상이었음을 느낄 수 있다.
이 돌미륵은 육계가 없는 맨머리에 은은한 미소를 담은 동안(童顔)의 얼굴을 지녔다. 서산마애삼존불 본존의 얼굴에서 드러나는 백제의 미소가 겹쳐진다. 석가모니의 제자인 마하가섭이 짓던 염화미소(拈華微笑)가 바로 이랬을까? 전신상인 돌미륵의 얼굴은 야트막한 돋을새김이고 목 아래는 선각의 오목새김으로 처리했다. 양어깨를 덮는 통견의 옷을 걸치고 있고 손에는 연실인지, 불자인지 모를 지물을 들었다. 삼도, 백호, 보관과 같은 불상이 가지는 특징이 없고 벅수와 비슷한 왕방울눈과 주먹코를 하고 있다. 그래서 벅수라 하기도 하는 것이다. 한편 조계종 본산인 승주 송광사에 있는 진각국사의 초상화와 비교해보면 많이 닮았다는 느낌이 든다. 더구나 진각국사의 고향이 바로 이곳 벽라리여서 국사의 모습을 새긴 것이라는 주장에 고개를 끄덕인다. 불행하게도 높이 3.5m에 달하는 이 돌미륵에 대한 기록은 아직 찾지 못했다. 그러므로 언제 세워졌는지 확인할 길이 없다. 문화재 지정이 늦어지다가 2004년에야 격에 어울리지 않은 화순군 향토문화유산 제10호로 지정된 까닭이 바로 이것이다.
임진․병자 양란 이후, 미륵이라 불리는 불상들이 절집을 떠나 마을로 내려왔다. 전쟁의 폭풍이 휩쓸고 지나간 조선 민초들의 피폐한 삶터에 새김솜씨가 변변치 않은, 돌벅수와 거의 비슷한 불상들이 등장하는 것이다. 본래 미륵불이나 벅수는 짐대, 당산나무 등과 함께 오래전부터 우리민족의 곁에서 나름의 자리와 구실을 지켜왔다. 그러던 그들이 본래의 자리를 벗어나 마을 어귀로 내세의 부처인 미륵이 내려오고 마을수호신이었던 벅수가 절 입구에도 나타나게 된다. 양반계급만을 위한 성리학적 질서에 기댈 수 없었던 민초들이 나름의 자구책으로 이런 문화를 유행시켰으리라 짐작해 본다. 천대받던 불교와 민간신앙이 함께 버무려진 변형된 형태의 안식처였던 것이다. 그래서 더욱 안쓰럽고 정겨워 애착이 가는 것일까?
'벅수와 짐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해학이 넘치는 절집지킴이(불회사 돌벅수) (2) | 2023.05.08 |
---|---|
해학이 넘치는 절집지킴이(화순 관영리 돌벅수) (0) | 2023.05.08 |
부안의 독특한 선돌과 돌벅수(보안입석) (0) | 2023.05.08 |
부안의 독특한 선돌과 돌벅수(죽림리 돌벅수) (0) | 2023.05.08 |
부안의 독특한 선돌과 돌벅수(월천리 돌벅수) (2) | 2023.05.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