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천리는 본래 운봉의 군내면(郡內面)지역으로 마을 서쪽에 냇물이 흘러 서천(西川)이라 하였다. 서천리는 운봉이 군(郡)이었던 1913년까지만 해도 군청소재지였다. 그러나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북천리 일부와 남면(남면)의 엄계리 일부를 병합하여 서천리라 하고 남원군 운봉면에 편입되었다. 1972년 3월 15일 행정 분리에 따라서 서상, 서하로 분리하였다가 다시 서남마을이 분리되었고 1995년 3월 면이 읍으로 승격되어 운봉읍 서천리가 되었다. 서천리에는 서상, 서하, 서남 등이 있다. 조선의 운봉 고을이 중국 송나라 운봉이란 고을의 지형과 흡사하여 그곳의 지명, 하천의 이름을 그대로 따왔다고 하는데 동천리, 북천리와 같이 운봉읍내 서쪽 냇가에 위치하므로 서천리란 지명이 붙게 된 것이다.
북천리 돌벅수는 운봉읍에서 인월로 가는 국도에서 신기리 쪽으로 50m 떨어진 곳에 있다. 군내면 북천리에서 1995년 3월 읍으로 승격되어 운봉읍 북천리가 되었다.
마을 노인들에 의해 전해지는 내용에 의하면 1592년 임진왜란을 전후하여 왜적과 싸우다 유민이 된 파평 윤씨(坡平尹氏)와 평산 신 씨(平山申氏)가 이곳에 처음 정착하였다고 전해진다. 동쪽 벅수가 남벅수로 동방축귀대장군, 서쪽 벅수가 여벅수로 서방축귀대장군이란 이름이 오목새김으로 새겨져 있다. 남벅수가 1.38m, 여벅수가 1.95m로 여벅수가 더 큰 이유는 해방 때 잘린 것을 다시 세웠기 때문이라 한다. 짐대 역시 오리를 앉혔는데, 마을의 화재를 막기 위한 것이었다 한다. 짐대는 변전소 옆에 세워졌으나 6·25 이후 없어졌다고 한다. 지금도 북천리 사람들은 이곳을 짐대거리로 부르고 있다. 당산제는 매년 음력 정월 초사흩날 마을에서 제관을 선정하여 지낸다. 북천리 돌벅수는 운봉읍에서 인월로 가는 국도에서 신기리 쪽으로 50m 떨어진 곳에 있다. 군내면 북천리에서 1995년 3월 읍으로 승격되어 운봉읍 북천리가 되었다. 마을 노인들에 의해 전해지는 내용에 의하면 1592년 임진왜란을 전후하여 왜적과 싸우다 유민이 된 파평 윤 씨(坡平尹氏)와 평산 신 씨(平山申氏)가 이곳에 처음 정착하였다고 전해진다. 동쪽 벅수가 남벅수로 동방축귀대장군, 서쪽 벅수가 여벅수로 서방축귀대장군이란 이름이 오목새김으로 새겨져 있다. 남벅수가 1.38m, 여벅수가 1.95m로 여벅수가 더 큰 이유는 해방 때 잘린 것을 다시 세웠기 때문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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