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원 서천리 당산(南原 西川里 堂山, 국가 민속문화재 제20호)
부속문화재 방어대장군 (防禦大將軍, 국가 민속문화재 제20-1호)
진서대장군 (鎭西大將軍, 국가 민속문화재 제20-2호)
남원 운봉은 고원지대다. 신생대 3기 지반이 갑작스럽게 융기한 후, 오랜 침식작용을 거친 후에 해발 450~550m 정도의 땅에 상당히 너른 들판과 구릉지를 펼쳐놓았다. 그래서 겨울이 길다. 운봉은 해발 50m 정도의 남원시에 비해 상당히 높은 곳이어서 같은 남원시지만 날씨의 변화도 심한 편이고 자연환경도 확연히 다르다. 그러나 높은 곳이긴 하지만 소백산맥으로부터 이어져 온 백두대간의 마루 금이 지리산 노고단으로 연결되면서 형성한 지리산 연봉들의 품에 안온하게 안겨있는 모양이다. 예상외로 사람이 살만한 곳인 것이다.
당산이 있는 서천리는 운봉이 군이었던 1913년까지만 해도 군청이 있었던 곳이다. 그러나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북천리 일부와 남면 엄계리 일부를 합하여 서천리라 하고 남원군 운봉면에 편입되었다가 1995년 운봉읍으로 승격되었다.
운봉과 그 주변의 고원지대에는 돌벅수가 유난히 많다. 서천리, 북천리, 권포리, 아영면의 개암주마을, 인월면의 닭실마을 등에서 돌벅수를 찾을 수 있다. 그 돌벅수들 중 상당한 규모를 갖춘 것이 서천리당산인데, 본래는 당산나무와 짐대 그리고 돌벅수로 구성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마을 안에 있던 짐대는 사라지고 흔적만 남아 있다. 당산나무와 돌벅수는 운봉읍의 소재지인 서천리의 옛 들머리에 있다. 오래 묵은 당산나무도 죽어버려 고목으로 남아있고 아직은 당산나무로써의 위엄을 갈무리하지 못한 어린 느티나무가 당산신을 대신한다.
마을사람들은 지금 남겨져 있는 한 쌍의 돌벅수를 부부벅수라고 하며 마을의 허한 곳을 방어하고 서쪽을 진압한다는 의미에서 각각 방어대장군, 진서대장군이란 이름을 몸통에 오목새김하고 있다. 방어대장군은 남성으로 머리에 벙거지를 쓰고 왕방울 눈에 주먹코를 큼직하게 새겨놓았으며 입에는 송곳니가 새겨져 있다. 가슴까지 늘어진 수염은 있고 귀는 새겨 놓지 않았다. 진서대장군은 여성으로 역시 벙거지가 씌워져 있고 왕방울 눈에 주먹코까지 거의 방어대장군과 비슷하다. 그러나 귀가 새겨져
있고 보기 드문 속눈썹이 깊이 새겨져 있어 독특하다. 사실적인 표현이 눈길을 사로잡는 진서대장군은 머리와 몸통 부분이 떨어진 것을 접합시켜 놓았는데, ‘어느 날 부부싸움을 하다가 사고가 났다.’는 조금 끔찍한 이야기가 전해온다. 이들 벅수는 새긴 이가 다른 듯, 비슷하면서도 서로 다른 느낌을 준다. 마을의 안녕과 복을 빌기 위한 마을제사는 매년 정월 초하룻날 먼저 당산나무에 제를 올린 다음에 돌벅수에게도 간단한 제를 행한다. 세워진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옛 모습이 잘 간직되어 있는 돌벅수다. 남원시 운봉읍 서천리 당산(南原西川里堂山, 국가 민속문화재 제20호) 의 부속문화재로 돌벅수 2기가 지정되어 있다. 방어대장군(국가 민속문화재 제20-1호), 진서대장군(국가 민속문화재 제20-2호)이 바로 그것이다. 서천리 당산은 당산나무, 돌벅수, 짐대로 구성되어 있으며 함께 마을의 수호신으로 모셔지고 있다. 남녀 한 쌍인 돌벅수는 운봉초등학교 서쪽 500여 m 지점에 마주 보고 서 있는 부부벅수이며, 이 주변에 당산나무가 있다. 벅수와 짐대를 함께 세워 제사를 지내는 것은 한반도 남부지방에 남아 있는 당산신앙의 한 형태로 원래는 이곳에도 짐대를 함께 세웠던 것으로 보이지만 마을 중앙에 있었던 짐대는 사라지고 흔적만 남아 있을 뿐이다.
부부벅수는 마을의 허한 곳을 방어하고 서쪽을 진압한다는 의미에서 각각 방어대장군, 진서대장군이라 새겨져 있다. 방어대장군은 남벅수로 머리에 모자를 쓰고 튀어나온 둥근 눈에 주먹코와 아래로 쭉 뻗은 송곳니가 있다. 가슴에 수염이 있으며, 귀가 없는 것이 특이하다. 진서대장군은 여벅수로 머리에는 벙거지모양의 모자가 씌워져 있고 둥근 눈에 주먹코와 귀가 있다. 다른 여벅수에서는 찾아보기 드물게 속눈썹이 깊이 새겨져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 돌벅수들은 만든 이가 다른 듯 벙거지의 제작형식이나 표현기법이 서로 다르다. 구전에 따르면 벅수가 부부싸움을 하다 진서대장군의 목이 부러져 마을 사람들이 시멘트로 붙였다고 한다.
현재에도 마을의 안녕과 복을 빌기 위해 음력 정월 초하룻날 당산나무에 제사를 지낸 다음에 돌벅수에게도 간단한 제를 행한다. 돌벅수는 마을 수호의 보조적인 신이지 주신(主神)은 아니다. 시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옛 모습이 잘 간직해 있고 민간신앙의 예를 보여주는 한 형태로서 가치가 있다.
방어대장군(防禦大將軍)은 운봉초등학교 서쪽 500여m 지점에 진서대장군과 마주 보고 서 있는 돌벅수이다. 마을의 수호신으로 모셔지고 있다. 이것은 풍수지리사상에 바탕을 두어 마을의 허한 곳을 방어한다는 뜻에서 방어대장군이라 새겨져 있다. 높이 220㎝, 너비 50㎝로 머리에는 모자가 씌워져 있다. 튀어나온 둥근 눈과 주먹코, 아래로 쭉 뻗은 송곳니가 있으며, 가슴에 한 가닥의 수염이 있는 남벅수로 귀가 없는 것이 특징이다. 지금도 매년 음력 정월초하룻날에 당산제가 행해지고 있다. 벅수의 건립시기는 알 수 없으나 형태가 잘 보존되어 있어 민간신앙의 자료로서 가치가 있다.
진서대장군(鎭西大將軍)은 운봉초등학교 서쪽 500여m 지점에 방어대장군과 마주 보고 서 있는 돌벅수으로, 마을의 수호신으로 모셔지고 있다. 이것은 풍수지리사상에 바탕을 두어 마을의 허한 곳인 서쪽을 막아준다는 의미인 진서대장군이라고 새겨져 있다. 높이 195㎝, 너비 58㎝로 암벅수인데도 벙거지모양의 모자를 쓰고 있다. 둥근 눈에 속눈썹이 깊게 새겨져 있고 주먹코에 귀가 달려 있는 모습으로 얼굴표정이 사실적이다. 건립연대는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신앙적 의미뿐만 아니라 사람의 표정이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예술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서천리는 본래 운봉의 군내면(郡內面)지역으로 마을 서쪽에 냇물이 흘러 서천(西川)이라 하였다. 서천리는 운봉이 군(郡)이었던 1913년까지만 해도 군청소재지였다. 그러나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북천리 일부와 남면(남면)의 엄계리 일부를 병합하여 서천리라 하고 남원군 운봉면에 편입되었다. 1972년 3월 15일 행정 분리에 따라서 서상, 서하로 분리하였다가 다시 서남마을이 분리되었고 1995년 3월 면이 읍으로 승격되어 운봉읍 서천리가 되었다. 서천리에는 서상, 서하, 서남 등이 있다. 조선의 운봉 고을이 중국 송나라 운봉이란 고을의 지형과 흡사하여 그곳의 지명, 하천의 이름을 그대로 따왔다고 하는데 동천리, 북천리와 같이 운봉읍내 서쪽 냇가에 위치하므로 서천리란 지명이 붙게 된 것이다.
운봉은 고원지대다. 신생대 3기 지반이 갑작스럽게 융기한 후, 오랜 침식작용을 거친 후에 해발 450~550m 정도의 땅에 상당히 너른 들판과 구릉지를 펼쳐놓았다. 그래서 겨울이 길다. 운봉은 해발 50m 정도의 남원시에 비해 상당히 높은 곳이어서 같은 남원시지만 날씨의 변화도 심한 편이고 자연환경도 확연히 다르다. 그러나 높은 곳이긴 하지만 소백산맥으로부터 이어져 온 백두대간의 마루 금이 지리산 노고단으로 연결되면서 형성한 지리산 연봉들의 품에 안온하게 안겨있는 모양이다. 예상외로 사람이 살만한 곳인 것이다.
당산이 있는 서천리는 운봉이 군이었던 1913년 까지만 해도 군청이 있었던 곳이다. 그러나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북천리 일부와 남면 엄계리 일부를 합하여 서천리라 하고 남원군 운봉면에 편입되었다가 1995년 운봉읍으로 승격되었다. 운봉과 그 주변의 고원지대에는 돌벅수가 유난히 많다. 서천리, 북천리, 권포리, 아영면의 개암주마을, 인월면의 닭실마을 등에서 돌벅수를 찾을 수 있다. 그 돌벅수들 중 상당한 규모를 갖춘 것이 서천리당산인데, 본래는 당산나무와 짐대 그리고 돌벅수로 구성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마을 안에 있던 짐대는 사라지고 흔적만 남아 있다. 당산나무와 돌벅수는 운봉읍의 소재지인 서천리의 옛 들머리에 있다. 오래 묵은 당산나무는 죽어 고목으로 남아있고 아직은 당산나무로써의 위엄을 갈무리하지 못한 어린 느티나무가 당산신을 대신한다.
마을사람들은 지금 남겨져 있는 한 쌍의 돌벅수를 부부벅수라고 하며 마을의 허한 곳을 방어하고 서쪽을 진압한다는 의미에서 각각 방어대장군, 진서대장군이란 이름을 몸통에 오목새김하고 있다. 방어대장군은 남성으로 머리에 벙거지를 쓰고 왕방울 눈에 주먹코를 큼직하게 새겨놓았으며 입에는 송곳니가 새겨져 있다. 가슴까지 늘어진 수염은 있고 귀는 새겨 놓지 않았다. 진서대장군은 여성으로 역시 벙거지가 씌워져 있고 왕방울 눈에 주먹코까지 거의 방어대장군과 비슷하다. 그러나 귀가 새겨져 있고 보기 드문 속눈썹이 깊이 새겨져 있어 독특하다. 사실적인 표현이 눈길을 사로잡는 진서대장군은 머리와 몸통 부분이 떨어진 것을 접합시켜 놓았는데, ‘어느 날 부부싸움을 하다가 사고가 났다.’는 조금 끔찍한 이야기가 전해온다. 이들 벅수는 새긴 이가 다른 듯, 비슷하면서도 서로 다른 느낌을 준다.
마을의 안녕과 복을 빌기 위한 마을제사는 매년 정월 초하룻날 먼저 당산나무에 제를 올린 다음에 돌벅수에게도 간단한 제를 행한다. 세워진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옛 모습이 잘 간직되어 있는 돌벅수다. 남원시 운봉읍 서천리 당산(南原西川里堂山, 국가 민속문화재 제20호) 의 부속문화재로 돌벅수 2기가 지정되어 있다. 방어대장군(국가 민속문화재 제20-1호), 진서대장군(국가 민속문화재 제20-2호)이 바로 그것이다. 서천리 당산은 당산나무, 돌벅수, 짐대로 구성되어 있으며 함께 마을의 수호신으로 모셔지고 있다. 남녀 한 쌍인 돌벅수는 운봉초등학교 서쪽 500여 m 지점에 마주 보고 서 있는 부부벅수이며, 이 주변에 당산나무가 있다. 벅수와 짐대를 함께 세워 제사를 지내는 것은 한반도 남부지방에 남아 있는 당산신앙의 한 형태로 원래는 이곳에도 짐대를 함께 세웠던 것으로 보이지만 마을 중앙에 있었던 짐대는 사라지고 흔적만 남아 있을 뿐이다.
부부벅수는 마을의 허한 곳을 방어하고 서쪽을 진압한다는 의미에서 각각 방어대장군, 진서대장군이라 새겨져 있다. 방어대장군은 남벅수로 머리에 모자를 쓰고 튀어나온 둥근 눈에 주먹코와 아래로 쭉 뻗은 송곳니가 있다. 가슴에 수염이 있으며, 귀가 없는 것이 특이하다. 진서대장군은 여벅수로 머리에는 벙거지모양의 모자가 씌워져 있고 둥근 눈에 주먹코와 귀가 있다. 다른 여벅수에서는 찾아보기 드물게 속눈썹이 깊이 새겨져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 돌벅수들은 만든 이가 다른 듯 벙거지의 제작형식이나 표현기법이 서로 다르다.
현재에도 마을의 안녕과 복을 빌기 위해 음력 정월 초하룻날 당산나무에 제사를 지낸 다음에 돌벅수에게도 간단한 제를 행한다. 돌벅수는 마을 수호의 보조적인 신이지 주신(主神)은 아니다. 시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옛 모습이 잘 간직해 있고 민간신앙의 예를 보여주는 한 형태로서 가치가 있다.
방어대장군(防禦大將軍)은 운봉초등학교 서쪽 500여m 지점에 진서대장군과 마주 보고 서 있는 돌벅수이다. 마을의 수호신으로 모셔지고 있다. 이것은 풍수지리사상에 바탕을 두어 마을의 허한 곳을 방어한다는 뜻에서 방어대장군이라 새겨져 있다. 높이 220㎝, 너비 50㎝로 머리에는 모자가 씌워져 있다. 튀어나온 둥근 눈과 주먹코, 아래로 쭉 뻗은 송곳니가 있으며, 가슴에 한 가닥의 수염이 있는 남벅수로 귀가 없는 것이 특징이다. 지금도 매년 음력 정월초하룻날에 당산제가 행해지고 있다. 벅수의 건립시기는 알 수 없으나 형태가 잘 보존되어 있어 민간신앙의 자료로서 가치가 있다.
진서대장군(鎭西大將軍)은 운봉초등학교 서쪽 500여m 지점에 방어대장군과 마주 보고 서 있는 돌벅수로, 마을의 수호신으로 모셔지고 있다. 이것은 풍수지리사상에 바탕을 두어 마을의 허한 곳인 서쪽을 막아준다는 의미인 진서대장군이라고 새겨져 있다. 높이 195㎝, 너비 58㎝로 암벅수인데도 벙거지모양의 모자를 쓰고 있다. 둥근 눈에 속눈썹이 깊게 새겨져 있고 주먹코에 귀가 달려 있는 모습으로 얼굴표정이 사실적이다. 건립연대는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신앙적 의미뿐만 아니라 사람의 표정이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예술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서천리는 본래 운봉의 군내면(郡內面)지역으로 마을 서쪽에 냇물이 흘러 서천(西川)이라 하였다. 서천리는 운봉이 군(郡)이었던 1913년까지만 해도 군청소재지였다. 그러나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북천리 일부와 남면(남면)의 엄계리 일부를 병합하여 서천리라 하고 남원군 운봉면에 편입되었다. 1972년 3월 15일 행정 분리에 따라서 서상, 서하로 분리하였다가 다시 서남마을이 분리되었고 1995년 3월 면이 읍으로 승격되어 운봉읍 서천리가 되었다. 서천리에는 서상, 서하, 서남 등이 있다. 조선의 운봉 고을이 중국 송나라 운봉이란 고을의 지형과 흡사하여 그곳의 지명, 하천의 이름을 그대로 따왔다고 하는데 동천리, 북천리와 같이 운봉읍내 서쪽 냇가에 위치하므로 서천리란 지명이 붙게 된 것이다. 진서대장군 (鎭西大將軍, 국가 민속문화재 제20-2호)
남원 운봉은 고원지대다. 신생대 3기 지반이 갑작스럽게 융기한 후, 오랜 침식작용을 거친 후에 해발 450~550m 정도의 땅에 상당히 너른 들판과 구릉지를 펼쳐놓았다. 그래서 겨울이 길다. 운봉은 해발 50m 정도의 남원시에 비해 상당히 높은 곳이어서 같은 남원시지만 날씨의 변화도 심한 편이고 자연환경도 확연히 다르다. 그러나 높은 곳이긴 하지만 소백산맥으로부터 이어져 온 백두대간의 마루 금이 지리산 노고단으로 연결되면서 형성한 지리산 연봉들의 품에 안온하게 안겨있는 모양이다. 예상외로 사람이 살만한 곳인 것이다.
당산이 있는 서천리는 운봉이 군이었던 1913년 까지만 해도 군청이 있었던 곳이다. 그러나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북천리 일부와 남면 임계리 일부를 합하여 서천리라 하고 남원군 운봉면에 편입되었다가 1995년 운봉읍으로 승격되었다.
운봉과 그 주변의 고원지대에는 돌벅수가 유난히 많다. 서천리, 북천리, 권포리, 아영면의 개암주마을, 인월면의 닭실마을 등에서 돌벅수를 찾을 수 있다. 그 돌벅수들 중 상당한 규모를 갖춘 것이 서천리당산인데, 본래는 당산나무와 짐대 그리고 돌벅수로 구성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마을 안에 있던 짐대는 사라지고 흔적만 남아 있다. 당산나무와 돌벅수는 운봉읍의 소재지인 서천리의 옛 들머리에 있다. 오래 묵은 당산나무도 죽어버려 고목으로 남아있고 아직은 당산나무로써의 위엄을 갈무리하지 못한 어린 느티나무가 당산신을 대신한다.
마을사람들은 지금 남겨져 있는 한 쌍의 돌벅수를 부부벅수라고 하며 마을의 허한 곳을 방어하고 서쪽을 진압한다는 의미에서 각각 방어대장군, 진서대장군이란 이름을 몸통에 오목새김하고 있다. 방어대장군은 남성으로 머리에 벙거지를 쓰고 왕방울 눈에 주먹코를 큼직하게 새겨놓았으며 입에는 송곳니가 새겨져 있다. 가슴까지 늘어진 수염은 있고 귀는 새겨 놓지 않았다. 진서대장군은 여성으로 역시 벙거지가 씌워져 있고 왕방울 눈에 주먹코까지 거의 방어대장군과 비슷하다. 그러나 귀가 새겨져 있고 보기 드문 속눈썹이 깊이 새겨져 있어 독특하다. 사실적인 표현이 눈길을 사로잡는 진서대장군은 머리와 몸통 부분이 떨어진 것을 접합시켜 놓았는데, ‘어느 날 부부싸움을 하다가 사고가 났다.’는 조금 끔찍한 이야기가 전해온다. 이들 벅수는 새긴 이가 다른 듯, 비슷하면서도 서로 다른 느낌을 준다.
마을의 안녕과 복을 빌기 위한 마을제사는 매년 정월 초하룻날 먼저 당산나무에 제를 올린 다음에 돌벅수에게도 간단한 제를 행한다. 세워진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옛 모습이 잘 간직되어 있는 돌벅수다. 남원시 운봉읍 서천리 당산(南原西川里堂山, 국가 민속문화재 제20호) 의 부속문화재로 돌벅수 2기가 지정되어 있다. 방어대장군(국가 민속문화재 제20-1호), 진서대장군(국가 민속문화재 제20-2호)이 바로 그것이다. 서천리 당산은 당산나무, 돌벅수, 짐대로 구성되어 있으며 함께 마을의 수호신으로 모셔지고 있다. 남녀 한 쌍인 돌벅수는 운봉초등학교 서쪽 500여 m 지점에 마주 보고 서 있는 부부벅수이며, 이 주변에 당산나무가 있다. 벅수와 짐대를 함께 세워 제사를 지내는 것은 한반도 남부지방에 남아 있는 당산신앙의 한 형태로 원래는 이곳에도 짐대를 함께 세웠던 것으로 보이지만 마을 중앙에 있었던 짐대는 사라지고 흔적만 남아 있을 뿐이다.
부부벅수는 마을의 허한 곳을 방어하고 서쪽을 진압한다는 의미에서 각각 방어대장군, 진서대장군이라 새겨져 있다. 방어대장군은 남벅수로 머리에 모자를 쓰고 튀어나온 둥근 눈에 주먹코와 아래로 쭉 뻗은 송곳니가 있다. 가슴에 수염이 있으며, 귀가 없는 것이 특이하다. 진서대장군은 여벅수로 머리에는 벙거지모양의 모자가 씌워져 있고 둥근 눈에 주먹코와 귀가 있다. 다른 여벅수에서는 찾아보기 드물게 속눈썹이 깊이 새겨져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 돌벅수들은 만든 이가 다른 듯 벙거지의 제작형식이나 표현기법이 서로 다르다. 구전에 따르면 벅수가 부부싸움을 하다 진서대장군의 목이 부러져 마을 사람들이 붙였다고 한다.
현재에도 마을의 안녕과 복을 빌기 위해 음력 정월 초하룻날 당산나무에 제사를 지낸 다음에 돌벅수에게도 간단한 제를 행한다. 돌벅수는 마을 수호의 보조적인 신이지 주신(主神)은 아니다. 시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옛 모습이 잘 간직해 있고 민간신앙의 예를 보여주는 한 형태로서 가치가 있다.
방어대장군(防禦大將軍)은 운봉초등학교 서쪽 500여m 지점에 진서대장군과 마주 보고 서 있는 돌벅수이다. 마을의 수호신으로 모셔지고 있다. 이것은 풍수지리사상에 바탕을 두어 마을의 허한 곳을 방어한다는 뜻에서 방어대장군이라 새겨져 있다. 높이 220㎝, 너비 50㎝로 머리에는 모자가 씌워져 있다. 튀어나온 둥근 눈과 주먹코, 아래로 쭉 뻗은 송곳니가 있으며, 가슴에 한 가닥의 수염이 있는 남벅수로 귀가 없는 것이 특징이다. 지금도 매년 음력 정월초하룻날에 당산제가 행해지고 있다. 벅수의 건립시기는 알 수 없으나 형태가 잘 보존되어 있어 민간신앙의 자료로서 가치가 있다.
진서대장군(鎭西大將軍)은 운봉초등학교 서쪽 500여m 지점에 방어대장군과 마주 보고 서 있는 돌벅수로, 마을의 수호신으로 모셔지고 있다. 이것은 풍수지리사상에 바탕을 두어 마을의 허한 곳인 서쪽을 막아준다는 의미인 진서대장군이라고 새겨져 있다. 높이 195㎝, 너비 58㎝로 암벅수인데도 벙거지모양의 모자를 쓰고 있다. 둥근 눈에 속눈썹이 깊게 새겨져 있고 주먹코에 귀가 달려 있는 모습으로 얼굴표정이 사실적이다. 건립연대는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신앙적 의미뿐만 아니라 사람의 표정이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예술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서천리는 본래 운봉의 군내면(郡內面)지역으로 마을 서쪽에 냇물이 흘러 서천(西川)이라 하였다. 서천리는 운봉이 군(郡)이었던 1913년까지만 해도 군청소재지였다. 그러나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북천리 일부와 남면(남면)의 엄계리 일부를 병합하여 서천리라 하고 남원군 운봉면에 편입되었다. 1972년 3월 15일 행정 분리에 따라서 서상, 서하로 분리하였다가 다시 서남마을이 분리되었고 1995년 3월 면이 읍으로 승격되어 운봉읍 서천리가 되었다. 서천리에는 서상, 서하, 서남 등이 있다. 조선의 운봉 고을이 중국 송나라 운봉이란 고을의 지형과 흡사하여 그곳의 지명, 하천의 이름을 그대로 따왔다고 하는데 동천리, 북천리와 같이 운봉읍내 서쪽 냇가에 위치하므로 서천리란 지명이 붙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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