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벅수와 짐대

마을을 지키는 민초들의 자화상(청단리 초현마을 돌벅수)

by 햇살과 뜨락 2023. 5. 5.

  3월의 마지막 날이다. 산수유와 매화는 이미 피기 시작했고 이제 곧 벚꽃 흐드러지는 계절이 올 것이다. 이른 봄꽃들이 고개를 내밀고 개나리는 황금빛으로 마악 빛나기 시작했다. 산자락 나무그늘 사이에 진달래가 여리고 투명하게 피어난다. 햇살 맑은 봄날! 곡성, 순창, 남원의 못생기고 볼품없는 마을지킴이들을 찾아 나선다. 호남지방에서 주로 ‘벅수’라 일컫는 지킴이들은 오랫동안 민간신앙의 한 형태로 이어져 왔다. 우리 민족만의 독특한 신앙형태인 벅수는 마을의 주신인 당산신의 하위신으로 주로 수호신 구실을 맡아왔다. 그러다가 임진․병자 양란이후 전쟁의 상처가 아물고 농업생산력이 향상되자 민초들의 삶터에 벅수문화가 널리 퍼진다. 17, 18세기에 들어 일어난 현상이다. 더구나 전염병이 기승을 부린 탓으로 더욱 널리 확산되는 경향을 보여준다. 일종의 백신인 셈이다.

  성리학적 사고로는 극복할 수 없는 삶의 어려움들을 이런 신앙체로 조금이나마 풀어보려는 생각이었을까? 아니면 농업기술의 발달로 경작지가 늘어나자 양반지주세력 중심의 마을이 대부분이었던 조선중기에 비해 중농들의 마을이 늘어난 까닭일까? 어쨌든 조금은 느슨해진 성리학적 체계와 삶의 방식의 변화에서 비롯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한편 공동체의 집중적인 노동력이 필요한 농촌사회에서 이런 신앙체는 공동체의 결속과 생산성의 향상에 매우 적절하고 필요한 조건이었을 것이다. 마을지킴이가 벼농사를 생산기반으로 하는 중남부지방의 마을에서 많이 나타나는 것을 보아도 그렇다. 물론 천연두를 비롯한 전염병의 영향도 컸을 것이다. 남원, 순창, 곡성, 운봉 등의 지역에서 나타나는 벅수들 역시 이런 문화 속에서 형성된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이 지역을 선택한 것은 유난히 마을을 지키는 벅수가 많이 남아 있는 까닭이다. 한편으로 못생기고 볼품없는 이 작은 돌멩이 속에는 민초들의 삶의 애환과 바람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더구나 일제강점기의 문화말살정책과 근대화과정에서 미신으로 내몰려 사라질 뻔한 위기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을에 따라 그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지리산 자락 아래 남원의 운봉지역은 지리적 조건이 가지는 특수함과 정유재란의 아픔 때문인지 더욱 많은 벅수들이 남아 있으며 아직도 신앙대상으로서 마을을 지키는 역할을 다하고 있다.

  남해 고속도로를 타고 가다 옥과 나들목에서 내려온다. 옥과면소재지와 반대로 길을 잡아 오산면으로 향한다. 

청단리 초현(招賢)마을 돌벅수를 보러 가는 길이다. 오산면소재지로 가기 전 오른쪽으로 꺾어져 청단마을을 지나 구불구불 좁은 계곡 길을 한참 올라가야 초현마을이 모습을 드러낸다. 마을 앞 꾀꼬리봉의 버드나무에서 꾀꼬리가 서식하며 울었다 하여 유정(柳頂), 또는 초현동(招賢洞)이라고 하는 이 마을은 계곡 깊숙이 자리 잡고 있다. 커다란 팽나무를 돌아들자 갑작스럽게 마을이 눈 안으로 가득 들어온다. 개울에 걸쳐진 다리를 건너 마을로 오르니 입구에 당산 숲과 작은 정자가 있다. 그런데 근처에 있어야 할 돌벅수가 없다. 그만 마을이 나타난 것이 반가워 다리 건너자마자 길 양옆에 서있는 돌벅수를 지나쳐 버린 것이다.

  키가 130㎝ 남짓 되는 이 돌벅수는 마을에서는 영감, 할멈으로 통하며 할멈의 키가 조금 크다. 마을에서 볼 때 오른쪽이 할멈, 왼쪽이 영감이다. 마을의 솥단지를 훔쳐 도망치던 도둑이 밤새 이 돌벅수 주위를 맴돌다 결국 솥단지를 놔두고 나서야 마을을 빠져나갈 수 있었다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영감님은 퉁방울 눈에 뭉툭한 코를 가졌는데, 입모양이 위로 치켜 올라가 은은한 미소를 짓고 있는 듯하다. 할머니는 어설픈 선으로 새겨져 있는데다 돌이끼가 많아 표정을 분간하기 힘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