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광역시 남구 임암길 183 임정마을
천하대장군과 지하여장군! 이름이 마음에 걸린다. 이 이름은 이정표 구실을 하는 노표 장승이 주로 사용하는 이름이다. 임정마을 나무벅수는 마을의 서쪽 방향을 지키기 위해 세운 마을지킴이로서의 구실을 하는 것으로 벅수가 맞고 이름도 ‘서방축귀대장군’으로 하는 것이 내용에 어울린다. 임정마을은 예전에는 광주시내와 광산군 대촌동 간의 길목이었다. 국도 1호선이 생기기 이전의 일이다. 광주시내로 드나들기 위해서는 벅수가 서있는 이 마을길을 이용하는 것이 편리했으므로 통행이 잦았다. 임정마을은 풍수 지리적으로 지네가 수풀 속에 엎드리고 있는 모양이라고 한다. 지네의 상극은 닭이고 닭의 방향인 서쪽에 소나무와 팽나무 수십 그루로 바람막이숲을 가꾸어 닭의 기세를 잡고자 했다. 그리고 그것도 모자라 벅수를 세워서 마을을 평안하게 하려는 소망을 담은 것이다. 또 바람막이숲에는 오리를 올린 짐대도 있었으나 지금은 없어졌다. 마을의 안녕을 위해 상당한 노력을 기울인 것이다.
임정마을 벅수는 남녀 한 쌍이다. 오래전부터 있었다고만 할 뿐 정확한 기록과 근거를 찾기는 힘들다. 1987년 세운 벅수가 썩자 2001년 지금의 벅수로 바꾸었다는 기록도 벅수 연구 비롯한 민속연구를 집중적으로 하여 많은 업적을 남긴 ‘강현구 선생’이 1990년 초에 작성한 기록이다. 두 벅수는 모두 키가 3m 정도여서 훌쩍 크다는 느낌을 받는다. 영감벅수는 몸통에 천하대장군이라 돋을새김해 놓았으며 소나무의 뿌리를 이용하여 머리를 장식한 것이 재미있다. 나무를 이용하여 벅수를 만들 때 나무 아래쪽이 위로 가도록 하는 것이 더 오랫동안 썩지 않고 보존할 수 있다고 한다. 할멈벅수는 가죽나무로 만들었고 역시 지하여장군이라고 돋을새김 했으며 모자를 씌우지 않은 맨머리이다. 영감벅수는 불에 탄 흔적이 있으며 눈의 한 부분과 이마가 손상되었다. 턱과 코 부위는 수염을 새기고 드러낸 이빨은 엇물리게 하여 야무진 인상을 주도록 하였다. 할멈벅수는 코를 유난히 크게 새기고 수염은 없다.
벅수제는 매년 2월 초하룻날 지낸다. 1970년대 초 새마을사업 당시 미신이라 하여 벅수를 땅에 묻은 후, 없어졌다가 1987년 다시 세우면서 부활하였다. 지금은 당산제 없이 벅수제만 지낸다. 당산나무가 죽은 이후 자동으로 당산제는 없어지고 지네명당의 거센 기운을 누르고 마을사람들의 안녕과 풍년을 바라면서 벅수제만 지내고 있다. 제례는 유교식으로 진행한다.
지하여장군이라는 벅수의 이름에서는 남녀 차별의 뜻이 감추어져 있는데, 이곳에서는 특이하게도 벅수제에 여성이 종헌관으로서 제의에 참여한다. 잔을 올리고 소지를 담당하는 등 남녀평등의 내용을 갖고 있다. 옛날의 당산제는 아예 길을 막고 제사를 지낸 후, 마을 공동 샘으로 가 풍물을 치는 샘굿에 이어 마당 밟기를 하였다. 그리고는 공동 샘을 중심으로 우데미와 아랫데미로 마을사람들을 나누어 줄다리기를 하였으나 지금은 사라졌다. 임정마을 벅수에도 흔한 도둑이야기와 전염병이나 천연두가 조선 전역에 심한 피해를 주었을 때도 마을에서는 죽은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는 이야기 등이 전해온다.
천하대장군과 지하여장군! 이름이 마음에 걸린다. 이 이름은 이정표 구실을 하는 노표 장승이 주로 사용하는 이름이다. 임정마을 나무벅수는 마을의 서쪽 방향을 지키기 위해 세운 마을지킴이로서의 구실을 하는 것으로 벅수가 맞고 이름도 ‘서방축귀대장군’으로 하는 것이 내용에 어울린다. 임정마을은 예전에는 광주시내와 광산군 대촌동 간의 길목이었다. 국도 1호선이 생기기 이전의 일이다. 광주시내로 드나들기 위해서는 벅수가 서있는 이 마을길을 이용하는 것이 편리했으므로 통행이 잦았다. 임정마을은 풍수 지리적으로 지네가 수풀 속에 엎드리고 있는 모양이라고 한다. 지네의 상극은 닭이고 닭의 방향인 서쪽에 소나무와 팽나무 수십 그루로 바람막이숲을 가꾸어 닭의 기세를 잡고자 했다. 그리고 그것도 모자라 벅수를 세워서 마을을 평안하게 하려는 소망을 담은 것이다. 또 바람막이숲에는 오리를 올린 짐대도 있었으나 지금은 없어졌다. 마을의 안녕을 위해 상당한 노력을 기울인 것이다.
임정마을 벅수는 남녀 한 쌍이다. 오래전부터 있었다고만 할 뿐 정확한 기록과 근거를 찾기는 힘들다. 1987년 세운 벅수가 썩자 2001년 지금의 벅수로 바꾸었다는 기록도 벅수 연구 비롯한 민속연구를 집중적으로 하여 많은 업적을 남긴 ‘강현구 선생’이 1990년 초에 작성한 기록이다. 두 벅수는 모두 키가 3m 정도여서 훌쩍 크다는 느낌을 받는다. 영감벅수는 몸통에 천하대장군이라 돋을새김해 놓았으며 소나무의 뿌리를 이용하여 머리를 장식한 것이 재미있다. 나무를 이용하여 벅수를 만들 때 나무 아래쪽이 위로 가도록 하는 것이 더 오랫동안 썩지 않고 보존할 수 있다고 한다. 할멈벅수는 가죽나무로 만들었고 역시 지하여장군이라고 돋을새김 했으며 모자를 씌우지 않은 맨머리이다. 영감벅수는 불에 탄 흔적이 있으며 눈의 한 부분과 이마가 손상되었다. 턱과 코 부위는 수염을 새기고 드러낸 이빨은 엇물리게 하여 야무진 인상을 주도록 하였다. 할멈벅수는 코를 유난히 크게 새기고 수염은 없다.
벅수제는 매년 2월 초하룻날 지낸다. 1970년대 초 새마을사업 당시 미신이라 하여 벅수를 땅에 묻은 후, 없어졌다가 1987년 다시 세우면서 부활하였다. 지금은 당산제 없이 벅수제만 지낸다. 당산나무가 죽은 이후 자동으로 당산제는 없어지고 지네명당의 거센 기운을 누르고 마을사람들의 안녕과 풍년을 바라면서 벅수제만 지내고 있다. 제례는 유교식으로 진행한다.
지하여장군이라는 벅수의 이름에서는 남녀 차별의 뜻이 감추어져 있는데, 이곳에서는 특이하게도 벅수제에 여성이 종헌관으로서 제의에 참여한다. 잔을 올리고 소지를 담당하는 등 남녀평등의 내용을 갖고 있다. 옛날의 당산제는 아예 길을 막고 제사를 지낸 후, 마을 공동 샘으로 가 풍물을 치는 샘굿에 이어 마당 밟기를 하였다. 그리고는 공동 샘을 중심으로 우데미와 아랫데미로 마을사람들을 나누어 줄다리기를 하였으나 지금은 사라졌다. 임정마을 벅수에도 흔한 도둑이야기와 전염병이나 천연두가 조선 전역에 심한 피해를 주었을 때도 마을에서는 죽은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는 이야기 등이 전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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