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남도 부여군 외산면 만수리
마을 앞산이 만수산이어서 만수리라는 이름을 갖게 된 이 마을에는 ‘무량사벅수’라고 잘못 알려진 나무벅수들이 모셔져 있다. 마을의 당산 한쪽에 자리를 마련하여 가장 오래 묵은 벅수를 맨 왼쪽에 모시고 차례대로 오른쪽으로 세워 놓았다. 그런 까닭으로 왼쪽의 벅수들은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썩었고 오른쪽으로 갈수록 새로 만든 것이어서 싱싱하다. 특별하기보다는 깔끔하고 단정한 느낌을 주는 벅수를 모신 자리가 마을사람들의 정성을 느끼게 한다. 벅수들 중 가운데 있는 벅수가 형태를 보존하고 있으면서도 연륜을 짊어지고 있어 먼저 눈길을 끈다
만수리가 무량사로 들어가는 외길이기도 하고 또, 무량사벅수로 불리기도 해서 절집지킴이인줄 알았더니 절과 관계없이 만수리 사람들이 만들어 세우고 제사도 지낸다. 그러므로 만수리 나무벅수가 바른 표현이며 이 벅수들은 마을지킴인 것이다. 한편 만수리 나무벅수의 이름은 오래된 벅수는 확실하지는 않으나 상원주장군, 하원당장군이었다가 근래에 만들어 모시는 벅수의 이름은 천하대장군, 지하여장군이다. 이렇게 벅수의 이름은 방위와 전혀 거리가 멀지만 그 신격은 전형적인 오방장군으로 보인다. 그것은 정월 초사흗날 거리제를 지낼 때, 오방신장전(五方神將前)이라 쓴 신위를 벅수의 몸통에 붙이고 술잔과 탕을 다섯 개씩 준비하기 때문이다. 충청남도의 나무벅수들은 음양오행사상을 근거로 하고 있는 경우가 두드러지게 많다.
무량사는 신라시대에 범일국사가 세운 절집으로 조선 세조 때 생육신 중의 한 사람인 김시습이 은둔생활을 한 곳으로 유명하다. 그래서 김시습의 초상과 부도가 경내에 있다. 여러 차례 고쳐지어 졌지만 임진왜란 때 병화에 의해 절집 전체가 불타버린 뒤 조선 인조 때에 오늘날의 모습보다 더 크게 고쳐지어 졌다.. 만수리도 무량사에 속한 사하촌이었다고 한다. 친조카를 살해하고 왕이 된 수양대군을 비판하며 모든 것을 버리고 방랑길에 오른 매월당 김시습을 생각하면 419혁명과 동학농민전쟁을 노래한 금강의 시인 신동엽이 겹쳐진다.
백제 예부터 이곳은 모여 썩는 곳 망하고 대신 거름을 남기는 곳
금강 예부터 이곳은 모여 썩는 곳 망하고 대신 정신을 남기는 곳
현재 모셔져 있는 벅수는 모두 10기이며 예전 것은 톱과 자귀를 이용하여 코만 강조하였는데, 근래의 벅수들은 얼굴을 한층 정교하게 다듬어 무섭게 만들려 애를 쓴 흔적이 엿보인다. 하지만 세련된 맛은 예전 벅수만 못하다. 벅수는 매년 만들어 세우는 것이 아니고 전에 세운 것이 썩어 그 생명을 다하면 새로운 벅수를 마을의 재능 있는 사람이 만든다. 벅수의 재료는 잘 썩지 않는 밤나무를 사용하며 제사는 매년 음력 정월 초사흗날 거리제로 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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