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장사(忠莊祠)
광주 북구 금곡동 산 1023
역사 현장에서 탁월한 능력을 지녔음에도 현실이 그를 받아들이지 못해 비극적인 종말을 당했던 이가 참 많다. 이들은 간혹 세월에 씻기면서 역사 현장 밖에서 민중에 의해 영웅으로 재창조되기도 한다. 충장사의 주인 김덕령 장군(金德齡, 1567~1596)이 바로 그런 인물이다. 충장사는 임진왜란 때 의병장이던 충장공 김덕령 장군을 배향하고 있는 사우로 1975년 2월에 장군의 애국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되었다.
무등산 산장 쪽으로 올라가다가 원효사 못 미처 왼편에 자리한 충장사는 본당인 충장사와 내삼문, 외삼문 그리고 충장공의 수의와 관을 보관하고 있는 유물관, 동재, 서재, 은륜비각 등이 무등산 정상을 향해 앉아 있다. 그리고 500㎡의 정도의 연못과 관리사무소 등이 한국 고유의 전통 양식과 정감을 살려 장엄하게 조성되어 있다. 이곳에서 볼 수 있는 특이한 유물은 김덕령 장군이 당시에 입었던 의복이다. 1974년 9월 광주광역시 금곡동에 있는 그의 묘소를 현재의 장소로 이장할 때 발견된 것으로 이때가 장군 사후 379년이 되니 400여 년 전의 것이다.
이 의복은 저고리 1점, 직령포 4점, 바지 1점으로 1975년 전남도 지방 민속자료 제1호로 지정되었다가 1980년 중요민속자료 제111호로 승격되었다. 4백 년이 넘도록 그 모양이 잘 유지된 의복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마치 김덕령 장군이 다시 살아 이 옷을 입고 뚜벅뚜벅 걸어오는 듯하다. 저고리에는 솜이 덧대져 있고 치마는 맞주름으로 처리되어 있으며, 소매는 양쪽을 뗄 수 있게 되어 있다. 흰 무명 직령포는 흰 무명에 솜을 두고 촘촘하게 곱게 꼬아서 누빈 옷이다.
무등산 사나이 김덕령 장군은 광주에서 가장 많은 신화를 낳은 인물이다. 1567년 충효동에서 김붕섭의 둘째 아들로 출생하였다. 우계 성혼의 문하에서 수학하다가 선조 25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형 덕홍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수백의 군사를 이끌고 고경명과 함께 전주까지 진군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형의 당부로 집으로 돌아와 노모를 봉양하였다. 그 후 형 덕홍은 의병장 조헌이 이끈 금산싸움에서 전사하였으며, 이듬해 8월에는 노모마저 세상을 떠났다. 장군은 아우 덕보에게 집안을 맡긴 다음 담양부사 이경린과 장성 현감 이귀 등의 천거로 선조로부터 형조좌랑의 벼슬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왜적은 끊임없이 괴롭혔다. 김덕령 장군은 1593년 “광주의 덕령은 온 고을 선비 여러분께 알립니다. 지금 왜적은 우리 강토를 침범하여 함부로 날뛰고 있습니다. 우리는 뭉쳐 일어나 왜적을 물리쳐야겠습니다.”라는 격문을 돌리고 담양에서 의병 5천 명을 이끌고 출정하였다. 1594년 1월, 나라에서는 장군을 선전관으로 임명하고 익호장군이라는 호를 내렸다. 이후 장군은 권율 장군의 휘하에서 진해, 고성에서 왜군을 방어했으며, 9월 장문포에서 충무공 이순신과 수륙연합전으로 왜군을 크게 물리쳤다. 장군의 활약상은 날로 두드러지기 시작하여 왜적은 그를 석저장군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1595년 3월에는 의병장 곽재우 장군과 연합작전으로 정암 전투에서 왜군을 크게 무찔러 6월에는 선조로부터 충용군이란 군호를 받았다. 1596년 7월 충청도 홍산에서 이몽학이 반란을 일으키자 이를 토벌하기 위해 전라도 운봉까지 진군하였으나, 이몽학이 관군에 패하여 참수당하자 회군한다. 그러나 장군을 시기하는 이들이 장군을 이몽학의 반란에 가담했다는 모략을 해서 투옥되었다. 선조는 장군을 잡아들이게 하여 쇠사슬로 묶고 큰 나무로 묶고 큰 나무로 깍지를 끼웠는데, 장군은 크게 웃으면서 이르기를 “신이 나라의 두터운 은혜를 입어 왜적을 토멸하고자 맹세하였는데, 어찌 역도를 좇아 반역을 꾀했겠습니까…. 만일 내가 반역을 하기로 든다면 어찌 이런 것으로 막을 수 있겠는가?” 하면서 노하여 힘을 쓰니 쇠사슬이 끊어져 버렸다고 한다. 이렇게 호소하던 장군은 여러 대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20여 일간에 걸친 여섯 차례의 형문과 수백 회에 달하는 혹독한 고문으로 정강이뼈가 부러지고 몸의 피부는 완전히 벗겨진 끝에 29세의 나이로 옥사하였다.
장군이 돌아가신 지 65년 만에 그 억울함이 밝혀져 관직이 복권되었으며, 정조는 충장공의 시호를 내리고 태어난 마을 석저촌을 충효의 고을이라 하여 충효리로 바꾸도록 하였다. 그리고 벽진서원에 모시도록 하고, 의열사라 사액하였다. 오늘날 장군의 애국충절을 기리기 위해 무등산 자락에 충장사를 세우고 광주광역시는 가장 번화가를 충장로라 이름하여 장군의 나라사랑의 정신을 추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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