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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의 문화재 (북구)

정지장군 예장석묘(鄭地將軍 禮葬石墓, 기념물 제2호)

by 햇살과 뜨락 2023. 6. 5.

정지장군 예장석묘(鄭地將軍 禮葬石墓, 기념물 제2호)

광주 북구 망월동 산 176

  이 예장석묘는 고려말에 창궐했던 왜구의 침략을 분쇄한 정지장군(1347~1391)을 모신 묘소이다. 본래 장군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1644년(인조 22) 지금의 동명동에 경열사(景烈祠)를 세워 배향해 왔으나, 1871년(고종 8)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헐리게 되었다. 그 후 1974년에 후손들을 중심으로 정지장군 유적보존회를 만들어 복원에 노력하였고, 1981년 장군의 묘역을 단장하고 경열사를 지었다.

  정지장군은 나주에서 태어난 고려말의 명장으로 초명(初名)은 준제(准提), 시호는 경렬이며 본관은 하동이다. 장군은 1365년(공민왕 14) 사마시(司馬試)에 장원하고 이듬해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갔고, 전라도 안무사 겸 왜인추포만호(倭人追捕萬戶)로 임명되어 수군의 창설과 조련에 힘쓰게 되었다.

  1377년(우왕 3)에는 순천도병마사(順天道兵馬使)가 되어 순천, 낙안 등지에 침입한 왜구를 격퇴하였고, 이듬해에는 영광, 광주, 동복 등에 침입한 왜구를 격퇴하였다. 장군은 해도원수(海道元帥)가 되고 재상의 자리에 올랐으며, 왜구토벌에 종사한 11년 동안 8차에 걸쳐 승리하였다. 장군은 1388년(우왕 14)에 안주도원수로 요동정벌에 참여하였다.

   장군은 나라를 왜적으로부터 지킨 용장일 뿐만 아니라 충의와 절개가 굳기로 이름이 높았다. 태조 이성계가 위화도회군을 계기로 조선왕조를 세우려 하자 장군은 이를 저지하고 우왕을 복위시키려다 발각되어 경주로 유배되었다. 그러나 장군은 고려왕실 복구음모에 관련되어 옥고를 치르자 관직에 염증을 느껴 광주로 낙향하였다. 1390년(공양왕 2) 위화도회군의 공으로 2등 공신이 되면서 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로 임명되었으나, 병을 핑계 삼아 부임하지 않고 절개를 지켰다. 장군이 45세의 나이로 세상을 하직하자, 국가에서는 그 공적과 충절을 기리어 경렬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석조로 된 묘는 둘레가 19.3m, 높이가 1m이며, 묘비(墓碑)와 석인(石人) 2기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