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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의 문화유산

광주의 전통가옥과 생가들

by 햇살과 뜨락 2023. 5. 10.

오지호생가/정율성거리/이장우가옥/최승효가옥/우일선선교사사택/

광주향교/고원희가옥/만귀정/서창향토문화마을/박용철생가/김봉호가옥/

광산구장덕동527번지가옥/김용학가옥

 

 

오지호생가(吳之湖生家, 기념물 제6호)

광주 동구 지산동 275

이곳은 서양화의 대가 오지호가 조선대학교 미술대학 교수로 근무 중이던 1954년부터 1982년 타계할 때까지 살던 집이다. 원래는 100여 년 전의 건축물이었으나 퇴락하자 1986년에 전면적인 보수작업을 했다.

오지호(1905∼1982)는 인상주의의 회화 양식을 받아들여 토착화시킨 화가이다. 화순 동복 출신이며 휘문고보(徽文高普)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도일유학(渡日遊學) 유화가인 고의동

(高義東)과 함께 있었으며 동경 미술학교에 유학했다. 1948년 광주에 내려와 정착하였고,「광주미술연구회」를 조직하는 한편 조선대학교 미술과 교수를 역임했다. 또「전남도전」의 창립과 더불어 지방 미술의 발전을 주도하면서 구상회화 우위의 개념과 이론으로 광주권 화단의 유화 화풍을 고착시켰고 만년에는 교과서에서 한자를 병용하여 과학적 두뇌를 개발할 것을 강조하는 한자 교육 부활 운동에 앞장서기도 했다.

국전 초대 작가, 심사 위원, 운영 위원을 역임하였고, 예술원 회원을 역임하였다. 1977년에는 대한민국예술원상을 수상하였으며, 1973년, 국민훈장 모란장(牧丹章)을 받았다. 오지호 가옥의 대문을 들어서면 화실로 사용되었던 채광창이 있는 문간채가 있다. 안채는 초가집인데 정면 4칸, 측면 1칸의 전후퇴집으로 우진각 지붕이다. 평면은 1칸 반의 부엌과 1칸씩의 방 3개로 되어 있고, 배면에는 툇마루와 골방이 있다. 부엌에는 살창과 찬장을 복원했으며 판장으로 된 문은 옛날 것을 그대로 달았다. 부연은 대나무로 엮었고, 연목(椽木)은 가늘고 끝을 훑었다.

기단은 막돌허튼층 쌓기의 외벌대 기단 위에 덤벙주초를 놓고 전면과 측면에는 네모기 둥, 뒷면에는 두리기둥을 세웠다. 현재의 기둥은 모서리 기둥만을 남기고 원래의 크기 대로 복원되어 있으며, 문은 외짝의 띠살문이다. 앞마루도 우물 마루를 살리기 위해 부분적으로 보수하였다. 방형기둥 위에는 우미량과 납도리를 결구하였고, 가구는 고주( 高柱)위에 대량을 걸친 뒤 동자주, 종량, 종도리를 차례로 올려놓은 일반적인 구조방식을 적용하고 있다. 화실은 6평 남짓한 크기로 북쪽으로 채광창이 있고, 장마루와 맞배지붕을 한 유럽 스타일의 화실이다.

 

 

정율성거리(鄭律成거리)

남구 양림동 휴먼시아 아파트 입구 일대

중국 최고의 인민음악가로 추앙받고 있는 정율성(1914-1976)을 기리기 위해 남구 양림동 휴먼시아 입구 일대에 조성된 ‘정율성로(路)’에는 지난해 5월 남구가 정율성 선생과 관련된 각종 사진과 영상 자료를 모아 조성한 ‘정율성 거리전시관’이 마련돼 광주를 찾는 중국인들에게 큰 관심을 끄는 거리이다.

정율성은 광주에서 태어났고, 초명은 부은이다. 광주숭일보통학교를 마치고 1933년 항일운동에 가담한 형들을 따라 중국으로 건너가 난징·상하이 등지를 전전하는 동안 크리누아에게 작곡과 성악을 배웠다. 1937년 옌안의 루쉰예술학교에서 작곡을 전공하고 1939년 중국공산당에 입당, 옌안송, 팔로군대합창 등을 작곡 발표하였다. 그 가운데 팔로군대합창 중의 <팔로군행진곡>은 1949년 중국 건국과 함께 <인민해방군가>로 불려 오다가 1988년 중국 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에서 정식 군가로 비준을 받았다. 한때 문화대혁명에 협력하지 않은 죄로 시련을 겪었으나 다시 작곡활동을 개시하여 가곡·가극·영화음악분야 등에서 많은 작품을 남겼다.

 

 

이장우가옥(李章雨家屋, 민속자료 제1호)

광주 남구 양림동 128

광주광역시 남구 양림동에 가면 민속자료로 지정된 전통가옥이 있다. 광주광역시 민속자료 1호인 이장우 가옥이다. 전통가옥이라고 하면 기와집과 초가집이 얼른 연상된다.

자연을 중심으로 살아야 했던 옛사람들은 가옥을 여러 생활공간으로 활용했다. 가옥에서 여러 대가 살면서 결혼도 하고 상례도 치르고 농사일도 했다. 이런 만큼 전통가옥의 구조는 마당이 있는 일자형 3칸이거나 4칸 또는 5칸 평면 집이 많았다. 안방을 사이에 두고 양쪽에 방과 대청과 부엌을 둔 단순 형식이다.

양림동 민속길에 있는 이장우 가옥은 단순가옥이 아니다 권세가나 상당한 갑부들이 지녔음직한 웅장하고 화려한 가옥이다. 이 가옥은 1899년에 지어진 정병호의 집이었는데, 이장우가 1965년에 사들여 보존 관리하고 있다. 이장우 가옥은 남성들의 주거 공간인 사랑채와 행랑채, 그리고 여인네들의 거주공간인 ‘ㄱ’자형 안채로 지어져 있다. 서민들은 보기만 해도 주눅이 드는 상류층 팔작 기와지붕 가옥이다.

5백여 평의 대지에 건축된 이장우 가옥은 바깥대문과 안대문이 있다. 바깥대문은 사랑채와 행랑채로 들어가는 대문이고 또 하나는 안채로 들어가는 대문이다. 바깥 대문을 열고 들어서면 부채가 펴지는 듯 화려한 팔작 기와지붕의 정면 4칸 사랑채와 행랑채가 있다. 마당에는 큰 연못이 있고 100여 년을 살아온 은행나무도 있어 그 당시의 사람들의 생활이 보이는 듯하여 마음이 감격스럽다.

‘ㄱ’자형 안채 또한 넓은 마당이 있다. 크고 화려한 목조 건축 안채는 왼쪽부터 툇마루, 건넛방, 대청, 안방, 부엌 그리고 오른쪽으로 꺾이면서 4개의 작은 방들이 배열되어 있다. 온돌방의 문은 겹문으로 안은 미닫이, 밖은 여닫이 문으로 달고 대청은 들고 나는 문을 두었다. 안채를 받치고 있는 원형기둥과 사각기둥들은 가옥을 더욱 안정감 있게 받쳐주고 있다. 안채 오른쪽 뒤에는 4칸이나 되는 큰 곳간이 더욱 부를 상징하고 있다.

 

 

최승효가옥(崔昇孝家屋, 민속자료 제2호)

광주 남구 양림동 166-19

광주광역시 남구 양림동에 위치한 최승효 가옥은 광주광역시 민족자료 2호이다. 광주광역시 민속자료 1호인 이장우 가옥에서 왼쪽으로 5분 정도 걸어가면 최승효 가옥이 나온다. 양림산 동남쪽 끝 부분에 건축된 최승효 가옥 또한 서민들의 가옥이 아니다. 넓은 마당과 연못을 지닌 커다란 안채가 결코 서민들의 가옥이 아님을 여실히 보여준다. 그러나 이장우 가옥과는 다른 느낌이 나는 상류층 가옥이다. 이장우 가옥이 화려한 멋이 있다면 최승효 가옥은 단아하고, 그리고 어딘지 모르게 흔들림 없는 엄정한 기품이 서려있다. 바로 독립운동가 최상현 집이다.

최상현의 후손인 최승효 부인이 현재 거주하고 있는 가옥은 1920년대 건축된 것이다. 이장우 가옥보다는 20년 정도 늦게 건축된 것이지만 한말의 전통가옥에서 개화기의 한옥으로 변화하는 과정을 살필 수 있는 가옥이라 할 수 있다.

이 가옥도 이장우 가옥구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동쪽을 향한 일자형 정면 8칸, 측면 4칸의 안채는 오른쪽의 경사진 지형을 그대로 이용하여 조그만 공간의 반지하층을 만들었다. 서향인 뒤쪽은 너비 60센티미터의 마루를 두르고 미닫이 창문을 만들어서 서쪽의 빛을 차단하고 있다. 또 대청을 제외하고는 모든 장소에 다락을 설치하여 독립운동가들을 피신시키는 장소로 사용했다.

 

 

우일선 선교사사택(우일선宣敎師私宅, 기념물 제15호)

광주 남구 양림동 226-25

광주광역시 양림동 양림산 기슭에 동향으로 세워진 합각지붕의 2층 벽돌건물이다. 이 건물은 미국인 선교사 우일선(Wilson)에 의해 1920년대에 지어졌다고 전해 올 뿐 정확한 건립 연대는 알 수 없고 광주에 현존하는 양식주택으로는 가장 오래된 건물로 추정된다. 개화기 서양 선교사들이 목포를 통해 나주를 거쳐 광주에 이르렀을 때 광주읍성 밖의 광주천 건너에 있는 양림산 중턱이 정착하기에 용이했던 것이다. 이로 인해 이후 시민들은 양림동을 가리켜 일명 "서양촌"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본 건물은 개화기의 귀중한 근대건축사적 자료의 하나이다.

평면은 정사각형으로 1층은 거실, 가족실, 다용도실, 부엌, 욕실이 있고, 2층은 사생활 공간으로 침실을 두었었으나 현재는 용도가 바뀌어 1층은 거의 사용하지 않고 방 한 칸 만 작업실 및 침실로 사용하고 있다. 2층은 침실, 욕실, 부엌, 다용도실로 사용하며, 지 하층은 창고와 보일러실이다. 현관이 동향인 점은 광주지역에서 선호되었던 방위를 받아들인 것이라 해석된다. 크기는 정면과 측면 10.6m, 연면적 350㎡이다.

구조를 보면 벽은 회색벽돌(225㎜×110㎜×55㎜)을 사용하여 네덜란드식으로 쌓았다. 내부는 회반죽으로 마감을 하고 고막이 부분은 화강석을 쌓아 처리하였으며, 지하의 통 풍과 채광을 위해 정면 부분에 십자형 구멍을 두는 장식벽돌 쌓기를 하였다.

개구부는 모두 반원의 아치형으로 만들었고 창대 부분은 벽돌 마구리 세워쌓기를 하였다. 창은 이중창으로 외부는 열개창, 내부는 오르내리창으로 구성되어 있다. 허리돌림띠 (String Course)를 사용하여 1층과 2층의 구분을 주었으나 지하층은 구분이 생략되어 있다. 또한 현관 2개의 기둥상부에는 1층과 2층에 각각 6켜 내쌓기의 주두장식이 되어 있다.

 

 

광주향교(光州鄕校, 유형문화재 제9호)

광주 남구 구동 22-3  서쪽 도심에 있는 광주공원 뒤, 서현교회 맞은편 골목으로 50미터쯤 들어가면 광주 향교 건물이 나타난다. 그곳은 반가운 사람을 기다렸다는 듯이 골목 어귀에 숨어 있다가 살포시 얼굴 붉히며 모습을 드러내는 순박한 시골 아낙의 형상이다. 평소 눈여겨보지 않은 사람은 쉽게 지나치기 십상인 이곳 향교는, 광주공원 뒤편에 있는 듯 없는 듯 숨어 있다.

조선시대 유학교육을 담당했던 이곳 향교는 1985년 광주유형문화재 제9호로 지정되었다. 원래는 1398년 무등산 장원봉 아래 세워졌으나 호랑이의 피해가 잦아 동명동으로 이전했다. 그러나 그마저 1488년 홍수로 수해를 입게 되자 광주 현감 권수평이 지금의 구동 자리에 세웠다고 한다. 그 후 정유재란 때 왜군들에 의해 불타버렸는데, 다행히도 대성전 안 위패는 권일제가 화를 피해 안전한 곳에 보존하고 있다가 건물을 재건한 뒤에 다시 봉안되었다. 당시 향교를 옮기게 된 기록은 성종 때의 문신 성현이 자세히 써서 남겼는데, 사건이 벌어지자 서민들이 모두 자신의 일처럼 나서서 수개월 만에 일을 마쳤다고 전해진다.

이때 완성된 향교는 대성전, 동서무, 명륜당, 사마제, 동서제, 전사청 등 현재의 규모와 거의 비슷했다고 한다. 광주향교는 세파에 지친 현대인들에게 한 줄기 맑은 정신의 정화소 역할을 하고 있다. 선현을 기리는 제향행사는 물론이고 충•효•예 유교 사상을 대중화시킨 한문 강좌와 시민들의 생활과 결합한 생활문화프로그램이 운영되고 있다. 광주향교의 대표적인 제향 행사로는 석전대제를 들 수 있다. 석전대제는 1년에 두 번 봄, 가을에 지방관들과 유림 및 시민들이 모여 성균관과 전국 향교에서 일제히 경건하게 봉향한다. 유일하게 우리나라에서만 드리는 유교제사로서 중요무형문화재 제85호로 지정되어 있다.

 


고원희가옥(高元熙家屋, 민속자료 제8호)

광주 남구 압촌동 101-1

광주광역시 남구 압촌동에 있는 고원희 가옥은 고경명 옛 집터에 후손인 고종 석씨가 1917년에 지은 것으로 광주광역시민속자료 제8호이다. 현재 고경명 17대 후손인 고원희 씨 부부가 거주하고 있다. 고원희 가옥은 이장우 가옥과 최승효 가옥과는 아주 다른 느낌을 준다.

팔작기와지붕 집이지만 화려하거나 웅장하거나 사치스럽지 않다. 엄정한 기품이 있고 호방함이 있고 단박에 왜구의 기세를 눌러줄 기백이 한껏 서린 가옥이다. 가옥 뒷산의 청청한 푸른 소나무와 이것저것 걸리는 바가 없이 이루어진 제봉산이 고경명장군의 기백을 말해주고 있다. 고원희 가옥에 들어서면 먼저 눈에 띄는 것이 소나무산 아래, 오른편에 건축된 부조묘이다. 부조묘에서 풍겨 나오는 경건함이 몸과 마음을 함부로 할 수 없도록 제압한다. 고원희 전통가옥구조는 마당을 사이에 두고 대문간에 사랑채와 곳간이 있고 안채와 부조묘는 소나무산 아래에 자리하고 있다. 안채는 앞면 6칸과 옆면 1칸, 그리고 왼쪽부터 부엌과 방과 대청마루와 방의 순서로 배치되고 사랑채는 정면 4칸과 측면 1칸 그리고 마루가 있다.

 

 

만귀정(晩歸亭, 문화재자료 제5호)

광주 서구 세하동 274-1

만귀정은 흥성 장 씨의 선조인 장창우가 학문을 가르쳤던 옛 터에 후손들이 그의 덕을 기리고자 지은 정자이다. 1934년에 세웠으며 1945년에 고쳐 지은 건물로 앞면 2칸·옆면 2칸 규모를 갖추고 있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 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만귀정 안에는 많은 시문과 현판들이 걸려 있다. 만귀정은 큰 연못 가운데에 세운 정자로 다리를 사이에 두고 다른 정자들과 한 줄로 늘어서 있다.

 

 

서창향토문화마을

광주 서구 세하동

광주~송정리 간 공항로를 시원하게 달리다 보면 왼편으로 세하동으로 들어서면 자연경관이 아름다운 정자가 한 눈에 들어온다. 만귀정이다. 아름드리 소나무와 삼나무, 단풍나무, 해송 왕벚나무가 운치를 더해주는 정자다. 그곳을 지나 대촌동 방향으로 10분 정도 걸으면 서창향토문화마을이 있다. 마치 그림 같은 풍경, 낮은 담장 너머로 기와집이 가지런하게 눈앞에 펼쳐지는데, 모처럼 도시에서 만나는 한옥마을이다.

대문을 밀고 들어가면 ‘죽로지실’ 이라는 다실이 있다. 뒤뜰로 열린 문을 통해 내다보이는 장독대가 향수를 자아낸다. 뒤안에는 절구와 나무공이, 가래, 망태, 삼태기, 지게가 사이좋게 모여 있고 대문 옆 민속용품전시장에는 벼루, 먹, 남바위, 나막신, 가야금 등 옛사람들의 손때 묻은 귀한 생활 소품들을 따로 모아 두었다. 시골 고향마을에 가도 이제는 쉽게 볼 수 없는 것들이라 더욱 진귀하다.

향토문화마을로 조성되어 보존되고 있는 이 마을은 본래 전통 한옥의 목가구 구조를 갖추고 있던 마을이다. 한옥은 마당을 중심으로 일자형, 튼’ㄱ’ 자형 모양이다. 대나무와 싸리나무들을 엮은 바자울, 잘 정돈된 맞담으로 이어진 고샅길이 전형적인 한국의 시골을 보여준다.

향토문화마을에서는 해마다 만드리 축제가 펼쳐진다. ‘만드리’란 논의 마지막 김매기를 뜻하는 말로 세벌 김매기를 할 때인 7월 백중에 불렀던 노동요다. 백중은 “여름 짓다”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농사일이 한창인 계절을 뜻한다. 한편 ‘어정 7월’이나 ‘동동 8 월’처럼 추수를 앞둔 달이라고 하여 잠시 허리를 펼 수 있다는 즐거움도 내포하고 있다.

백중날 농가에서는 머슴과 일꾼들에게 후한 아침상을 차려주고 용돈과 휴가를 주었다. 이것을 “백중 돈 탄다.”라고 하여 백중놀이로서 농사의 고단함을 달랬다. 만드리 축제는 서창향토문화마을 앞 들녘 6,000㎡ 논에서 상머슴들이 김매기 하는 작업에서부터 시작한다. 풍물놀이패가 앞장서 북. 장구. 꽹과리를 치면서 흥을 돋우면 상머슴들은 소리꾼의 뒤를 따르면서 선소리에 따라 뒷소리를 부르며, 풍년 농사를 기원한다.

김매기를 끝낸 상머슴들은 풍물놀이패를 앞세우고 황소 등을 타고 논 주위를 한 바퀴 돈 후 마을로 돌아온다. 마을에서는 마을 주민과 상머슴, 풍물놀이패가 한데 어울려 한바탕 잔치를 벌인 후 대미를 장식한다. 만드리 축제는 힘든 농사일에도 풍년을 기원하기 위해 주민들의 화합과 단결 등 협동정신을 발휘하여 농사를 짓던 선조들의 지혜를 엿볼 수 있다.

 

 

용아생가(龍兒生家, 기념물 제13호)

광주 광산구 소촌동 363-1

 

나두야 간다/ 나의 이 젊은 나이를/ 눈물로야 보낼 거냐/

안윽한 이 항구인들 손 쉽게야 버릴 거냐~

 

가수 김수철이 불러 대중의 사랑을 받고 있는 <나두야 간다>라는 노래다.

이 노래는 용아 박용철의 시 <떠나가는 배>에 곡을 붙인 것이다. 질식할 것만 같은 식민지 땅에서 울분을 가슴에 품고 희망을 찾아 떠나는 젊은이의 마지막 작별의 시는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의 젊은이들에게도 찡한 감동을 안겨준다.

광주가 낳은 서정시인 용아 박용철(龍兒 朴龍喆 : 1904∼1938)은 영랑 김윤식과 함께 한국 시문학의 새 지평을 연 개척자다. 1930년대 문단을 휩쓸던 경향파에 대항하여 순수서정시운동을 전개했던 용아의 생가는 광산구 소촌동 금호타이어 앞 삼거리 근처에 있다.

‘박용철 생가’라는 표지판을 지나 꼬불꼬불한 골목길을 100여 m 들어가면 토석 담장에 둘러싸인 초가집이 나타난다. 입구에 용아 생가임을 알리는 자그마한 표석이 세워져 있다. 지방기념물 13호로 지정된 이곳은 본채와 사랑채, 행랑채, 사당, 서재가 남아 있고 텃밭까지 포함하면 2,600㎡에 달하는 널찍한 집이다. 뜨락의 윤기 흐르는 동백잎, 초가이엉 얹은 담장이 조촐하면서도 정갈한 아름다움을 풍기고 뒷동산에는 소나무가 병풍처럼 둘러서 있다. 바로 이곳에서 용아가 낳고 자랐다.

1904년 태어난 그는 서너 살 때 덧셈, 뺄셈을 하고 사자소학을 외우는 등 일찍이 천재의 바탕을 드러냈다. 서울 배재고에 진학한 그는 시험기간에도 밤늦게까지 삼국지나 소설책을 읽는데도 항상 우등을 차지했다. 공부만 잘하는 것이 아니었고, 조국과 민족을 가슴에 품고 있었다. 배재고 3학년 때 동급생들과‘목탁’이라는 비밀신문을 찍어 돌리기도 했다. 그는 3.1 운동이 실패로 끝나자 학교를 자퇴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 청산학원 4학년에 편입한다. 그곳에서 그는 평생의 지기 영랑을 만났다.

용아와 영랑의 만남은 한국현대문학사의 한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자네는 뒤를 따르게나! 나는 앞장서서 풀섶 이슬 떨어줌세’라는 용아의 말처럼 용아는 시의 이론으로 무장하여 20년대 위축된 문학의 자율성 정립에 앞장섰고, 영랑은 남도의 가락에 서정시의 숨결을 담아 노래했다.

용아는 생전에 유독 초가지붕을 사랑했다고 한다. 어느 날 그의 부친이 기와로 개조하려고 하자 용아는 “시골집은 초가라야 어울립니다. 가을에 이엉을 올려놓은 후 은은한 달빛이 비추는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노랗게 빛나는 그 색깔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하고 만류했다고 한다.

1970년대 새마을사업으로 시멘트 기와를 얹었던 이곳은 1995년 초가지붕으로 복원되었다. 지금은 돌담에도 초가 이엉을 얹어 정겨운 고향의 내음이 물씬 풍긴다.

용아의 자취는 광주 곳곳에서 찾을 수 있다. 그의 문학세계를 기리는 시비가 송정공원과 광주공원에 세워져 있다. 생가 바로 지척에 있는 송정공원을 오르다 보면 왼편으로 돛배 모양의 시비가 보인다.

이 시비에는 용아의 대표시 ‘떠나가는 배’가 새겨져 있고, 동판으로 만든 용아 초상이 있다. 광주공원에는 용아의 시비와 영랑의 시비가 나란히 세워져 두 사람의 아름다운 우정을 확인할 수 있다. 광주광역시에서는 ‘박용철문학상’을 제정하여 매년 시상하고 있고, 광산구에서는 1992년부터 박용철 선생 추모 전국백일장대회가 열리고 있다.

용아의 후배들이 다니는 송정중앙초등학교는 용아축제 한마당을 열고 있으며, 교정에 진달래와 개나리, 산수유가 피는 ‘용아동산’을 만들었다. 비록 용아는 조국해방을 보지 못하고 요절했지만 그가 남긴 작품은 청춘들의 가슴을 울리는 절창으로 영원히 사랑 받을 것이다.

 

 

김봉호가옥(金鳳鎬家屋, 문화재자료 제25호)

광주 광산구 하남동 71,72

1946년에 지은 집으로 안채, 문간채 등과 축사를 갖추고 있다. 안채는 앞면 6칸·옆면 1칸 규모의 건물로 왼쪽에서부터 방·부엌·큰방·대청마루·건넌방 순으로 되어 있다. 큰방과 대청마루, 건넌방 위에는 대청 다락방을 설치하였는데, 3칸 규모로 넓고 높이도 높아 특이하다. 문간채는 앞면 5칸·옆면 2칸 규모이며 지붕은 서양식 기와를 얹었다. 외양간·대문·방·헛간·뒷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광주 광산구 장덕동 527번지 가옥(등록문화재 제146호)

광주 광산구 장덕동 527번지

이 가옥은 효령대군의 손자인 율원군의 후손들이 거주한 주택으로 근대기에 지어진 개량한옥이다. 이 가옥은 2004년에 수완 택지개발지구로 지정되어 철거 위기에 놓여 있었지만 조상 대대로 살던 터와 가옥을 지키고자 하는 소유자의 강력한 의지로 택지개발지구 내 근린공원으로 이전하여 보존되고 있다.

 

 

김용학가옥(金容鶴家屋, 민속자료 제3호)

광주 북구 매곡동 306

김용학 가옥 일원은 살림집과 정자가 언덕진 대지 위에 조화 있게 배치된 1900년대 초의 건축물이다. 건물의 배치는 동북쪽이 낮고 남서쪽이 높게 된 지형을 살려 낮은 동북쪽에 사랑채와 안채를 배치한 데 이어 주거공간의 왼쪽에 연못과 뒤쪽으로 하은정을 또 그 뒤쪽에 연파정을 동향으로 배치하여 멀리서 바라볼 때 건물상호 간에 잘 어울리며 주변의 자연과도 조화를 이루고 있다. 각 채들의 구성은 고저 차가 있는 대지를 돌계단을 놓아 각 건축물에 이르도록 구성하였다. 또한 지단(地壇)을 높여 하은정을 앉히고 언덕 위에 있는 연파정은 지단을 낮추어 전체적인 조화를 도모하였다.

마당 및 담 주위는 100년생 벚나무 등은 상당한 수령을 가진 것이어서 철 따라 그것들이 주는 운치가 각별하다. 청풍헌(淸風軒)이란 현판이 걸린 사랑채는 1고주 5량가, 홑처마 팔작기와지붕으로 상량의 기록이 “정사 윤이월(丁巳 閏二月)”인 것으로 보아 1917년 건축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정면 5칸, 측면 3칸의 규모에 평면구성은 중앙의 2칸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측은 온돌방으로 되어 있으며, 후대에 들어 마루와 부엌을 증축했다. 대청마루는 우물마루이며 천장은 연등천장이다.

하은정과 연파정은 모두 공부자(孔夫子) 2485년 즉, 1933년에 신축된 것으로 안채마당에서 돌계단을 밟고 동산으로 올라가면 100년생의 벚나무들에 둘러싸여 있다. 하은정은 정면 5칸, 측면 3칸이고 연파 정은 정면 3칸, 측면 3칸 이며 두 건물 모두 팔작지붕의 기와집이다. 연파정은 김용학의 부친 하은 김희수(荷隱 金喜洙)가 조부 김영덕(金永德)을 위해 1934년에 지었던 것인데 김용학이 부친을 위해 하은정을 신축하던 때에 인부들의 잘못으로 불이 나서 같은 해에 중건한 것이라 한다.

연파정은 정자의 사면에 오동나무 마루를 덧붙여 덧문을 달아 비바람을 막을 수 있게 하였다. 두 건물 모두 처마의 곡선이 중앙에서부터 반전을 이루어 조로와 후림이 매우 자연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