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면앙정(俛仰亭, 시도기념물 6호)
이곳 답사의 시작은 담양군 봉산면 제월리에 있는 면앙정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다. 면앙정의 주인은 면앙정 송순(宋純 : 1493 -1582)이다. 아름드리 참나무를 마주보고 있는 정자의 이름인 면앙은 하늘을 우러르고 땅에 구부려 한줌 부끄러움 없는 삶을 살고 싶다는 굳굳한 선비의 정신을 담고 있다. 송순은 일찍이 과거에 급제하여 급제 60주년에 열리는 ‘회방연’(回榜宴)을 가질 정도로 장수하신 분으로 중추원부사, 대사헌 등 중앙과 지방의 여러 관직을 두루 거친 후, 나이 들어 이곳에서 후진을 양성하고 마음을 수양하기 위해 이 정자를 세우고 기거하였다.
회방연 때, 정철, 박순, 이후백, 임제 등 제자이자 유학자로 명망이 높았던 분들이 직접 가마를 메고 선생을 모셨다고 하니 학문과 인품, 그리고 덕망이 대단한 분이었다는 짐작을 하게 한다. 이 이야기는 215년 후에 과거시험 문제로 출제되기도 했다. 또한 송순은 이 지역의 국문학사에 큰 영향을 끼친 분으로 학문뿐 아니라 문학에도 조예가 깊었으며 백성들의 아픔을 함께 노래했던 현실참여 시인이기도 하였다. 국문가사인 「면앙정가」를 비롯한 많은 한시와 시조 20여 수를 남기고 있는 그는 주로 자연의 아름다움을 노래했지만 거기에 머물러 있지만은 않았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선생은 지식인으로서, 참으로 바른 자세를 갖추었던 분이라 생각된다.
날이면 날마다 밤이면 밤마다
포악한 정치와 몹쓸 부역 벌떼처럼 달려든다.
쌀독은 텅 비어 소리를 내고
베틀은 덩그러니 비어 있는데
부뚜막의 가마솥도 다 뺏어 갔다.
지아비는 칼 쓰고 아들은 착고 찬 채 감옥에 갇힌 몸
채찍질에 남은 살갗 썩은 내가 물씬 난다.
인생살이 이 같은데 어이 대체 견딜꼬
차라리 죽어 흙에나 묻히면 좋으련만
송 순 문린가곡(聞隣家哭)
면앙정은 한 칸 짜리 방을 들이고 앞면 3칸, 옆면 2칸에 팔작지붕을 얹은 소박한 건물이다. 멀리 담양의 추월산을 뒤로하고 제월봉을 바라보며 앉은 이 정자는 둥근기둥을 사용하였고 지붕 선을 살리기 위해 활주를 세워 놓았다. 소박하면서도 기품이 있는 정자로 들판을 바라다보지 않고 커다란 참나무를 향해 돌아앉아 있는 것이 특이하다. 처음 있던 정자는 선조 30년(1597) 임진왜란으로 없어지고 효종 5년(1654)에 후손들이 다시 지었다.
2. 송강정(松江亭, 시도기념물 1-2호)
봉산면의 딸기는 제법 맛이 좋다. 이곳의 딸기재배용 비닐하우스들을 멀리서 바라보면 호수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면앙정에서 되돌아 나와 광주 쪽으로 길을 잡아 달리면
너른 들판에 한 무더기씩 햇살을 받아 반짝인다. 면앙정에서 5분 정도 차를 달리면 쌍교라는 지명을 가진 곳에 이른다. 일제강점기 때 만들어진 광주와 담양간에 있던 철도를 식민지 말기 군수물자의 부족으로 철거해버려 지금은 쓸모를 잃은 철교가 보통다리와 함께 나란히 서있어 쌍교라 이름지어진 곳이다.
송강정(淞江亭)은 이곳의 나직한 얻덕받이에 고서천으로 걸쳐진 2개의 다리를 내려다보며 솔숲 속에 아늑하게 자리를 잡고 있다. 송강 정철(鄭澈 : 1536-1593)이 선조 18년(1585)년 대사헌에서 물러나 4년 동안 이곳에 머물다 간 적이 있었던 탓으로 본래 이름인 죽록정(竹綠亭)을 버리고 송강정로 바뀌었다. 지금도 정자의 한쪽에는 죽록정이란 현판이 걸려있으며 이곳을 흐르는 고서천의 이름도 한 때 송강, 죽록천 등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송강은 환벽당의 주인인 사촌 김윤제의 제자이자 외손서(외손주 사위)로 소쇄원의 주인인 소쇄옹 양산보와 필암서원의 하서 김인후(河西 金麟厚 : 1510-1560), 면앙정 송순, 식영정의 주인인 석천 임억령 등 대유학자이자 문필가들에게 교육을 받아 과거에 급제한 후, 중앙정계에 진출하여 이름을 날린 분이다. 더구나 국문가사문학에 있어서는 해남의 고산 윤선도(孤山 尹善道 : 1587-1671)와 함께 독보적인 존재로 인정받고 있다. 그러나 그의 생애는 그리 평탄하지 만은 않았던 것 같다. 어릴 때는 을사사화로 아버님이 귀양가게 되어 외가인 창평에 내려와 살았고 중년에도 몇 차례의 어려움을 겪었으며, 결국 강화 송강촌에서 쓸쓸한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등 부침이 심한 일생이었던 것이다.
송강정 주변의 소나무 숲은 오래되지는 않았으나 제법 규모가 있어 송강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모습으로 가꾸어져 있는데, 사람들이 많이 찾게 되면서 보존에 어려움이 많다고 한다. 송강정은 앞면 3칸, 옆면 3칸에 한 칸의 방을 들이고 둥근 기둥에 팔작지붕을 올렸는데, 근래에 만들어진 것이라 그런지 너무 날렵해서 기품이 없어 보이다. 송강의 국문가사로는 「성산별곡」, 「사미인곡」, 「속미인곡」, 「관동별곡」 등이 있으며 내용은 주로 자연 경관을 노래하거나 임금에 대한 충절을 바탕에 깔고 있다. 「성산별곡」에 대해서는 이곳에서 머물 때 지어졌다는 설과 그 전에 지어졌을 것으로 추정하는 경우가 있으나 「사미인곡」과 「속미인곡」은 이곳에서 지어졌다는 것이 정설이다.
웬일인지 나를 보시고 네로다 여기실제
나도 임을 믿어 딴 뜻이 전혀 없어
응석이야 교태야 어찌나 어지럽게 굴었던지
반기시는 낯빛이 옛과 어찌 다르신고
누워 생각하고 일어 앉아 헤아리니
내 몸의 지은 죄가 산같이 싸였네
하늘을 원망하며 사람을 허물 하랴
서러워 다시 생각하니 조물의 탓이로다.
정철 속미인곡(續美人曲) 가운데서
3. 명옥헌원림(鳴玉軒園林, 시도기념물 44호)
이 원림은 크고 작은 네모난 연못 2개로 이루어져 있고 못 주변으로 목백일홍을 심어놓아 여름철이면 붉게 물든 원림과 시원하게 뚫린 앞쪽의 경치가 참으로 아름답다. 네모난 연못의 가운데에는 조그맣고 둥근 섬을 띄어 놓았다. 명옥헌에 앉아 가지가 멋들어지게 휘어진 늙은 소나무와 고목이 되어 가는 배롱나무를 보고 있노라면, 우리 조상들은 긴 안목으로 무언가를 만들고 다듬어 왔는데, 현대의 우리는 왜 그리 조급하기만 한지 안타까운 생각이 든다. 자연 그대로를 사랑하고 자연 속에 겸허하게 자신의 자리를 잡으려 했던 조상들의 깊은 생각이 가슴으로 전해져 오는 곳이 바로 명옥헌이다.
옥이 구르는 듯한 맑은 물소리가 들리는 집이라는 명옥헌은 앞면 3칸, 옆면 2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팔작지붕을 올렸다. 정원 안에는 배롱나무와 붉은 소나무 등이 심어져 있고 연못 위쪽의 시냇가에는 ‘명옥헌 계축’이라고 새겨진 바위도 눈에 띈다. 본래는 명옥헌 뒤편에 도장사(道藏祠)라는 사당이 있었으므로 도장정(道藏亭)이라고도 부르기도 했으며, 오이정의 호가 장계(藏溪)여서 장계정(藏溪亭)이란 현판이 걸려있기도 하다. 이 정자는 처음 세운 뒤 100여년이 지나 후손인 오대경(吳大經)이 다시 중수하였다.
명옥헌을 뒤로하고 후산마을을 빠져 나오다 보면 500년 이상 묵은 은행나무가 보이는데 가을이면 마을을 온통 샛노랗게 물들일 정도로 커다랗다. 이 은행나무는 인조대왕이 타고 온 말의 고삐를 매었다고 하여 더욱 유명하다. 후산마을을 돌아 나와 광주호 쪽으로 방향을 잡아 달리면 제법 넓은 들판이 펼쳐지는데, 가을날이면 누렇게 익는 벼들과 주변의 산세가 어우러져 평화로움이 그득한 풍경을 연출한다.
4. 창평향교 등
고서면 소재지에서 광주댐으로 가는 길로 접어든 다음, 곧바로 왼쪽으로 꺾어지면 나직한 산 능선의 경사면에 창평향교(昌平鄕校, 유형문화재 104호)가 자리잡고 있다. 정종 원년(1399)에 창건하였다고 읍지에 기록되어 있으나 지금의 건물들은 성종 때 이곳으로 옮겨와 숙종 15년(1689)에 대대적으로 수리하였다고 한다. 가을이면 명륜당의 좌우에 500여년 묵은 은행나무가 아름다움을 뽐내는 창평향교는 대성전, 내삼문, 명륜당, 외삼문 순으로 전학후묘의 배치를 보여준다. 남서쪽을 바라보고 있는 건물들은 제법 규모가 있고 대성전은 단청이 화려하다. 명륜당은 앞면 4칸에 우옆면은 2칸인데 민흘림과 배흘림이 약한 둥근기둥을 각각 세웠으며 지붕은 겹처마에 맞배지붕이다.
창평향교에서 광주호 가는 길로 약 1.5Km 쯤 가다 오른쪽으로 들어가면 저수지가 나오는데 그 옆의 낮은 구릉지대에 있는 영은사라는 절에 영은사 석조여래좌상(石造如來坐像, 유형문화재 143호)이 있다. 이 돌부처들은 모두 2구인데 둘 다 앉아 있는 모습이고 하나만 광배(光背)가 있다. 이 돌부처 중 광배를 갖춘 돌부처가 문화재로 지정된 것이다. 고려시대 작품으로 보여지는 이 돌부처는 광배와 불상이 하나의 돌로 되어있는데, 대좌 아래는 시멘트로 발라버려 알아볼 수가 없다. 소발의 머리에 높직한 육계가 솟아 있고 얼굴은 원만한 느낌을 주며 광배는 배 모양을 하고 있고 화불 7구가 돋을새김되어 있지만 정교한 작품은 아니다.
분향리 석불입상(石佛立像, 유형문화재 144호)은 광주댐 바로 아래 구릉지대의 밭 가운데 서 있다. 주위에 절터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고 돌부처만 덩그마니 연꽃을 새긴 받침돌 위에 서 있다. 소발의 머리에 낮은 육계와 원만한 얼굴모양을 하고 있으나 많이 손상되어 있다. 목에는 삼도가 선명하고 옷은 통견으로 가슴에서 굵은 곡선을 새겨 물결모양을 그리다가 양쪽 다리 밑으로 내려오면서 두 갈래로 갈라지며 둥근 주름모양을 나타낸다. 이 돌부처는 양쪽 손바닥을 안으로 구부려 서로 대치되게 하여 허리춤에서 쥐고 있으며 왼손은 약병을 쥐고 있는 모습을 하고 있어 약사여래로 보여진다. 2m가 넘는 비교적 큰 돌부처이며 옷의 주름모양이나 수인 등이 특이하여 고려시대 초기의 작품으로 추정하고 있다.
5. 식영정(息影亭, 지방기념물 1호)과 서하당정원(棲霞堂庭苑)
광주호를 오른쪽으로 바라보며 구불구불 위쪽으로 향해 가면 서하당정원 옆의 높은 언덕배기에 식영정이 그림처럼 앉았는데, 그 이름이 ‘그림자도 머무는 정자’라는 뜻이니 이름조차 그림 같다. 식영정이 앉아있는 산줄기의 이름이 별뫼, 즉 성산(星山)이므로 정철선생의 성산별곡이 이곳에서 태어났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서하당의 주인인 서하당 김성원(金成遠 : 1525-1597)이 장인어른인 석천(石川) 임억령(林億齡 : 1496-1568)을 위해 만든 식영정은 광주호와 무등산을 바라다보며 별뫼의 혈이 뭉쳐진 자리에 좌청룡, 우백호의 산줄기까지 거느리고 있어 여러 정자들 중 가장 빼어난 경관을 가지고 있다.
광주댐이 만들어지기 전에는 정자의 앞으로 자미탄(紫薇灘)이라는 별칭의 창계천이 휘돌아 들고 여름이면 붉은 꽃을 화사하게 피워 여울을 적시고 있었을 것이어서 그 모습을 상상하면 식영정 주변의 경치가 얼마나 아름다웠을까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더구나 정자마루에서 바라다보는 구름 쌓인 무등산의 신비로움까지 더하면 선경이 따로 없다 할 것이다. 더구나 석천 임억령은 시가문학에 뛰어난 분이었으니 이 정자의 주인으로 조금도 손색이 없었으리라는 생각도 함께 한다.
정자의 입구에는 한 쌍의 아름드리 소나무가 수문장처럼
서 있었는데, 몇 해 전에 한 그루가 그만 벼락을 맞아 지금은 외롭게 한 그루만 남아 있다. 비록 한 그루만 남아 있지만 우리 소나무인 적송만이 가질 수 있는 아름다움 자태는 여전하다. 문화재의 보호란 그 자체만을 보호하는 것으로는 의미가 없으며 주변의 자연환경까지 함께 보전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현장이다. 식영정은 앞면 2칸, 옆면 2칸의 작은 규모로 팔작지붕을 올렸으며 한쪽 귀퉁이로 방을 몰아 붙이고 앞면과 옆면을 마루로 하였는데, 이곳의 지형에 알맞게 규모를 줄여 지은 것으로 보인다.
한가롭구나, 서석 산마루에 저 구름,
잠깐 날리더니 걷히어 숨네.
운유 즐기던 길손 그 누구인고.
보고 서로 또 보아도 싫지가 않네.
임억령 식영정 이십영(息影亭 二十詠) 가운데서
어떤 길손이 성산에 머물면서
서하당 식영정 주인아 내 말 듣소.
인생 세간에 좋은 일 많건마는
어찌 한 강산을 그처럼 좋게 여겨
적막한 산중에 들고 아니 나시는고
소나무 밑을 다시 쓸고 죽상(竹床)에 자리 보아
잠시 올라앉아 어떤가 다시 보니.
하늘가에 뜬구름 서석을 집 삼아
나가 듯 드는 모습 주인과 어떠한고
창계 흰 물결이 정자 앞을 둘렀으니.
천손 운금 (직녀성과 은하수를 가리킴)을 그 뉘가 베어내어
잇는 듯 펼쳐 놓은 듯 경치도 호화롭네.
산중에 책력 없어 사시를 모르더니
눈 아래 펼친 경치 철따라 절로 나니
듣거니 보거니 일마다 선경일세.
--- 정철 성산별곡(星山別曲) 가운데서
식영정 아래편의 서하당정원은 김성원이 꾸민 정원으로 부용당과 서하당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지금은 과거의 모습이 많이 사라지고 새로 지은 건물과 송강선생을 기리는 비석으로 인해 그나마 예스러움마저 많이 손상되었다. 서하당은 정철과 짝을 이룰 만큼 학문과 문학적 조예가 깊은 분이었다고 하며, 거문고 타는 솜씨가 좋아 성산별곡의 한 구절에 등장하기까지 한다. 더구나 정유재란 때 늙은 어머니를 구하기 위해 화순군 동복면의 모후산에서 부인과 함께 왜적에게 대항하다 돌아가셨으니 그 효성의 지극함이 하늘을 감동시킬 정도였다 한다.
6. 환벽당(環碧堂, 시도기념물 1호)
서하당정원에서 창계천에 놓여진 다리를 건너면 푸르름을 두른 집이라는 환벽당이 계단식으로 이루어진 정원을 바라보며 날아갈 듯 서있다. 사촌 김윤제(金允悌 : 1501-1572)의 서재 겸 사랑방으로 14세 소년 정철이 우연히 사촌선생을 만나 학문을 연마한 곳이기도 한다. 환벽당 아래쪽을 흐르는 창계천의 조대(釣臺)라 불리는 곳에서 용이 헤엄치는 꿈을 꾼 사촌선생이 그곳에서 목욕하던 소년 정철을 제자로 거두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환벽당과 창계천 건너편의 서하당정원 사이에 지금은 시멘트다리가 놓여 있지만, 예전에는 나무로 만든 무지개다리를 놓아 서로 오갈 수 있도록 했다고 한다. 환벽당은 초여름이면 상사초가 곳곳에 피어 서글픔을 담은 아름다움으로 정원을 가득 메운다.
김윤제는 여러 관직을 두루 거친 후 이곳에서 말년을 보내며 후진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그 중 한 분이 바로 정철이다. 환벽당 아래의 조대는 오래 묵은 소나무가 옛이야기 속으로 우리를 부르기는 하지만 창계천은 이미 목욕을 하기에는 너무 더러워져 있어 안타까움이 더한다. 앞면 3칸, 옆면 2칸 규모에 팔작지붕을 올렸으며 원래는 전통적 정자 형식이었으나, 다시 세우면서 가운데 2칸은 방으로 하고 앞쪽과 오른쪽을 마루로 바꾼 것으로 보인다. 이곳에는 우암 송시열이 쓴 글씨가 걸려 있으며, 임억령과 조자이의 시가 현판으로 걸려있다.
7. 취가정(醉歌亭)
환벽당 뒤쪽으로 난 조그만 소롯길을 따라가면 취가정이 나오는데, 이 정자는 김덕령의 후손들이 장군의 억울함을 달래기 위해 ‘취시가’(醉詩歌)라는 시의 제목을 따서 정자이름을 붙여 놓았다. 억울한 모함으로 감옥에 갇혀 모진 고문 끝에 돌아가신 장군은 석주 귄필선생의 꿈에 나타나 취시가를 읊고 억울함을 호소했다고 하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취가정 앞에는 늙은 소나무 한 그루가 정자의 운치를 더하였는데, 그만 벼락을 맞아 예전의 멋들어진 모습은 간곳없고 흉한 상체기의 고목으로 남아있다. 주변에 피뢰침 하나만 세워 놓았더라도 이렇게 흉한 모습이 되지는 않았을 것을, 문화재가 제 모습을 갖추고 오래도록 보존되기 위해서는 많은 돈이나 외형의 확대보다 작은 정성이 더욱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앞면 3칸, 옆면 3칸 규모에 팔작지붕을 올린 취가정은 후손인 김만식씨가 1890년에 세웠고 6.25전쟁 때 불타버린 것을 최근에 복원한 것이니 장군의 생애처럼 정자의 운명도 기구하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취하여 노래하니
이 곡 듣는 이 없구나
나는 꽃과 달에 취하고 싶지 않네
공훈을 세우는 것은 뜬구름 같고
꽃과 달에 취하는 것도 뜬구름 같은 것
취하여 이 곡을 노래하니
내 마음 알아주는 이 없구나
다만 긴 칼 잡고
어진 임금께 보은하기만 바라네
--- 김덕령의 취시가
8. 소쇄원(瀟灑園, 사적 304호)
광주광역시 충효동의 취가정에서 다시 창계천을 건너면 담양군 남면 지곡리가 되는데, 여기에 소쇄원이 자리잡고 있다. 별뫼라고도 불리는 성산의 자그마한 계곡에 감춰놓은 듯 자리잡은 소쇄원은 우리 조상의 자연에 대한 세심한 배려와 자연과 인간의 조화로운 만남이 어떻게 가능한가를 나직하게 속삭여 주는 곳이다.
이곳의 주인인 소쇄옹 양산보(梁山甫, 1503-1557)는 기묘사화로 스승인 조광조가 화순군 능주면의 적려유허지(謫廬遺墟地)에서 사약을 받고 억울한 죽임을 당하자, 세상의 어지러움을 한탄하며 평생을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다. 그리고 이곳에서 심신을 수양하고 학문을 연마하며 후진을 양성하였고 그러는 동안 주위의 여러 친구들과 함께 뜻을 모아 소쇄원을 가꾸어 놓았다. 그래서 소쇄원의 곳곳에는 나름의 뜻을 담고 있으며 소박함과 함께 단정함, 인공과 자연과의 절묘한 조화가 함께 한다.
소쇄원이란 이름에는 ‘가슴에 품은 뜻의 맑고 맑음이 마치 비 갠 뒤의 볕에 부는 청량한 바람과 맑은 날의 달빛과 같다.’는 의미를 품고 있다고 하니 소쇄옹의 삶에 대한 생각이 어떠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지금 남아 있는 모습은 조성 당시에 비해 많이 축소되었고 최근 들어 더욱 사람들의 발길이 잦아지면서 그윽한 정취마저 사라져가고 있다.
싱그러운 향기를 지닌 입구의 대밭을 지나면 계곡의 양쪽으로 원림이 펼쳐지는데, 맨 처음 찾는 사람의 발길을 반기는 곳이 대봉대(待鳳臺)라는 초당(草堂)이다. 봉황을 맞는다는 뜻이니 이곳에 오는 손님이 상당한 학식과 인격을 갖추어야 함을 은연중에 내포하고 있다. 대봉대 아래로는 크고 작은 네모난 못이 2개 있는데 나무 홈통을 타고 계곡의 물을 받아들이도록 설계되어있다. 한 때 소쇄원 위쪽 계곡에 축산농가들이 들어서서 축산폐수를 방류하는 바람에 계곡 물이 더러워져 연못도 제 구실을 못했었으나 지금은 당국에서 철수시키고 여러 가지 조처를 취하고 있다. 문화재보호를 위해서는 문화재 자체만이 아니라 주변의 자연환경까지 잘 보존해야 하는데, 이곳의 원림과 정자들은 주변의 자연조건을 함께 생각하면서 조성된 것들이어서 더욱 그렇다.
대봉대를 지나면 소쇄원에서 가장 햇살이 따사로운 애양단(愛陽壇)에 이르고 여기서 외나무다리를 건너면 매대라는 정원에 다다르는데, 외나무다리의 위쪽으로 담장이 둘러쳐져 자연과의 경계를 이루고 있다. 이 담장은 밑을 뚫어 놓아 계곡 물이 원림으로 자연스럽게 흘러들게 해놓았다. 이는 자연 속으로 인공의 원림을 다가가게 하기 위한 세심한 배려이다. 문 위의 담에 오곡문(五谷問)이라 이름을 밝혀두고 있고, 매대 위의 담에는 ‘소쇄처사 양공지려(瀟灑處士 梁公之廬)’라는 글귀가 적혀있는데, 모두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 : 1607-1689)의 글이라고 한다.
이런 글과 정자들의 천장에 붙어 있는 제영을 통해 조선중기 당대의 저명한 학자들이 두루 이곳을 찾았음을 알 수 있다. 매대에는 본래 우리나라에서 보기 힘든 많은 기화요초들이 심어져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지금은 거의 사라져 버려 안타깝다.
매대를 지나 양산보선생의 사랑방 역할을 하던 제월당(霽月堂)에 이르면 툇마루에 걸터앉아 소쇄원 전체를 굽어볼 수 있다. 단아함과 그윽한 품격이 함께 느껴진다. 제월당에서 쪽문을 열고 계곡 쪽으로 내려서면 서재의 역할을 하던 광풍각(光風閣)이 날렵한 모습을 드러내는데, 계곡에 살그머니 단을 쌓고 정자를 얹어 놓았다는 표현이 적절한 정자이다. 소쇄원의 가장 중심이 되는 건물이기도 한 광풍각에는 독특한 방법으로 그려진 소쇄원도를 방안에 걸어놓고 매일 이곳에 대한 설명을 해주는 사람이 있어 많은 사람에게 소쇄원에 대한 이해를 돕고 있다. 계곡은 작은 폭포와 한 두사람 정도 앉아서 발을 물에 담구고 더위를 식힐 수 있는 공간이 있고 계곡 아래쪽으로는 나무다리가 놓여져 있어 다시 입구로 나갈 수 있도록 해놓았다.
소쇄옹은 이 원림을 아무에게도 팔지 말고 상하지 않도록 하라는 유언을 남겼고 그 유언을 따르기 위해 후손들이 여러 어려움을 견디어야 했다고 한다. 그로 인해 민간정원으로는 가장 탁월한 문화유산을 우리 모두에게 남겨줄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고암정사 등의 여러 건축물과 나무와 화초 등이 과거에 비해 많이 훼손되었고 규모도 줄어들기는 하였지만 지금 남아 있는 것만으로도 조선선비의 정신과 품격을 함께 느낄 수 있는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창이 밝으니 책과 두루마기 축이 깨끗하구나
물 속 바위에 책과 그림이 비치네
자세히 생각함에 쫓아가고 엎어지고 우러러보니
땅에 인연 있음에도 솔개와 물고기가 드는구나
김인후 소쇄원 48영 중 제2영 침계문방(枕溪文房)
9. 독수정원림(獨守停園林, 시도기념물 61호)
소쇄원에서 내려와 담양군 남면 소재지로 가면 독수정원림이 나오는데, 독수정은 고려말 충신 서은 전신민(瑞隱 全新民)의 정자이다. 전신민은 이성계에 의하여 고려가 망하자 고려조의 신하로서 두 임금을 섬기지 않을 것을 굳게 다짐하고 이곳으로 내려와 은거하였다고 한다. 그는 계류가 흐르는 남쪽 언덕 위에 북쪽을 향해 정자를 짓고 이백의 시 ‘백이와 숙제는 어떤 사람이었던가? 자신을 지키다가 굶어 죽었다네(夷齊是何人 獨守西山餓)’ 귀절에서 독수란 이름을 가져왔다. 두 임금을 섬기지 않겠다고 수양산으로 들어간 백이, 숙제의 고사를 통해 자신의 의지를 담아냈던 것이다. 또 뒤뜰에는 소나무를 심고 앞쪽에는 대나무를 심어 수절의 일념을 표현하였다. 앞면 3칸, 옆면 2칸에 가운데 한칸의 방을 들이고 팔작지붕을 올린 독수정은 고종 28년(1891)에 후손에 의하여 다시 세워진 것이며, 1915년에는 떼지붕을 기와지붕으로 바꾸었다.
독수정은 자연림 속에 자리잡고 있긴 하지만 인공적으로 만든 흔적이 나타난다. 진입로에 중국원산종인 회화나무, 자미나무 등의 노거수가 심어져 있어 조성의 흔적이 나타나며 정(亭)의 앞에는 자미나무, 매화나무 등이 심어져 있는데, 그 크기로 보아 1890년대 중건 당시에 심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특히 독수정원림은 고려시대에 성행했던 산수원림으로 여겨지며 이 지방에 산수원림을 도입하는데 선구적인 역할을 했었던 것으로 보여 그 중요성이 크다.
10. 충효정려비와 충효동(忠孝旌閭碑와 忠孝洞, 시도기념물 4호)
독수정으로 갔던 길을 되돌아 와 식영정 앞의 창계천을 건너면 천을 사이에 두고 광주광역시 충효동과 담양군 남면으로 행정구역이 분리되어 있어 약간 느낌이 달라진다. 사람이 자연에 그은 선이 사람들의 생각에 영향을 주는 모양이다.
충효동은 김덕령(金德齡 : 1567-1596)의 이야기들이 여러 곳에 간직되어 있는 곳이다. 김덕령장군은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용맹을 떨친 분으로 비록 모함을 당하여 스물 아홉살의 젊은 나이에 억울하게 돌아가시기는 하였지만 그분의 삶은 의로움 바로 그것이었다. 석저촌이라 불리던 장군의 생가가 있는 마을은 나중에 장군의 억울함이 알려지자 정조 12년(1788) ‘충장공’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마을 이름을 충효리로 정하게 된다. 무등산의 원효계곡에는 장군에 대한 많은 이야기들이 전해지는데, 그 이야기들이 스며들어있는 장소로는 주검동, 야금지, 풍암정, 충장사, 충효마을, 취가정 등이 있다. 창계천의 건너편에는 송강의 일화가 많은 반면 광주광역시 쪽에는 김덕령장군의 이야기들로 채워져 있는 셈이다.
김덕령은 글 읽는 선비이면서도 국난을 당하여 목숨을 아끼지 않고 싸움터로 나아갔고 여러 전투에서 용맹을 떨쳐 왜적들이 벌벌 떨었다고 한다. 김덕령의 형인 김덕홍(金德弘)도 광주광역시 대촌동의 포충사에 모셔져 있는 고경명(高敬命)과 함께 싸우다 장렬한 죽음을 맞이했으니 형제가 모두 나라의 어려움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걸었던 것이다. 충효마을에는 장군의 생가가 둥근기둥의 5칸 집으로 무등산을 바라보며 자리하고 있고 그 옆에 아담한 사당이 흰색으로 단장하고 있으며 마을 입구에는 충효정려비(忠孝旌閭碑)와 비각이 자리하고 있다.
충효마을은 큰 당산과 작은 당산, 수구맥이 역할을 하는 오래 묵은 왕버들이 멋들어진 모습으로 남아 있다. 본래는 소나무
11. 개선사지 석등(開仙寺址石燈, 보물 111호)
개선사지 석등은 담양군 남면 학선리에 있는데 충효동에서 금곡마을(쇳골)쪽으로 500m 쯤 가다 저수지 있는 곳에서 광주호의 오른편 호안을 따라가면 나온다. 보물로 지정된 이 석등은 원래 아래 부분이 땅 속에 묻히고 부분적으로 파손되어 있던 것을 보수한 것이다. 팔각의 지대석 위에 귀꽃이 있는 연꽃잎을 새긴 하대석이 있고 그 위에 장고의 모양을 가진 기둥을 세운 것이 특이하다. 팔각의 연꽃받침 위에 불을 밝히는 화사석(火舍石)을 놓고 귀꽃이 있는 팔각의 지붕돌을 얹어 놓았다. 화사석에는 이 석등과 관련된 내용을 알려주는 명문이 해서체로 오목새김 되어 있어 남국신라의 진성여왕 때(891년)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려준다. 개선사 터에는 석등 하나만 외롭게 남아 있는데, 크기나 조각수법으로 보아 상당히 큰절이 있었을 것으로 보여진다.
12. 삼괴정(三愧亭)
충효동 금곡마을의 당산에 있는 삼괴정은 조상님께 세 가지 부끄러움을 저질렀다는 겸손한 마음이 담긴 이름의 정자로 쇳골(金谷마을)의 꾀꼬리 당산에 자리잡고 있다. 그 부끄러움이란 학문을 이뤄 뜻을 펴지 못함과 부모님을 제대로 모시지 못함, 그리고 자식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했음을 가리키는 것이라 한다. 1900년대에 세워진 정자로 문병일이 아버지의 뜻을 받들기 위해 만들었다.
삼괴정의 한켠에는 남근석이 하나 놓여 있는데, 자식을 바라는 사람들이 소망을 비는 곳이다. 노동력이 많이 드는 벼농사를 지으며 남성 위주의 사회였던 옛적에 우리나라 사람들은 아들 낳는 것을 중요하게 여겨 이런 신앙형태가 나타났을 것이다. 이 삼괴정에서 무등산을 바라보면 원효계곡이 구불구불 산 속으로 스며들 듯 하는데 여기에 분청사기 전시관과 풍암정이 자리잡고 있다.
13. 분청사기 전시관
무등산 일원에는 7개소 가량의 도자기를 굽던 가마터가 발견되었다. 1963년 국립박물관에서 발굴 조사한 결과 가마터와 상감청자파편을 비롯한 분청자, 백자 등이 나타났으며 그 중에서 풍암정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있는 가마터를 복원하여 놓았다. 그리고 자그마한 분청사기 전시관을 만들어 놓았다.
1991년 봄과 가을 두 차례에 걸쳐 광주국립박물관에 의해 발굴 조사된 이 분청사기 가마터는 우리나라 전역에 분포되어 있는 분청사기 가마로서는 최초의 학술적인 발굴조사가 이루어진 곳이다. 조사결과 3기의 가마가 확인되었으며 퇴적층 조사를 통하여 분청사기의 변천과정을 파악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 가운데 제2호 가마는 아궁이에서부터 굴뚝에 이르기까지 거의 완벽한 상태로 드러나 도자기 가마의 변화과정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를 제공해주고 있다. 가마의 구조는 바닥에 모래를 깐 반지하식 등요이다.
14. 풍암정(楓岩亭, 문화재자료 15호)
분청사기 가마터를 돌아들어 원효계곡을 거슬러 올라가면 계곡 속에 수줍은 듯 자리잡은 풍암정이 살짝 모습을 드러낸다. 풍암정은 김덕령장군의 동생인 김덕보(金德普)가 두 형을 전란 중에 여의고 아픈 마음을 달래며 은거한 정자이다. 원효계곡의 크고 작은 바위 사이로 아스라히 보이는 풍암정은 커다란 전나무가 일품이다. 또 계곡을 향해 가지를 드리우고 있는 오래 묵은 소나무도 소박하고 기품이 있는 정자로 가꾸는데 한몫을 거들고 있다.
풍암정은 앞면 2칸, 옆면 2칸 규모로 팔작지붕을 올렸고 ‘풍암정사’라고 쓴 현판이 걸려 있다. 이 작은 정자와 계곡의 물과 바위와 나무들이 서로 어우러져 한 폭의 산수화를 그려낸다. 다른 정자와는 달리 계곡 속에 묻혀 있으나 그런 대로 전망이 좋은 편이고 주변의 산세 또한 아름답다. 가을에는 주변의 단풍이 계곡의 물에 비추어 마치 물 속의 바위들이 울긋불긋하게 물들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여 풍암이라는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15. 충장사(忠壯司)
충장사는 원효사로 올라가는 무등산 관광도로를 따라 배재에 이르면 왼편에 잘 가꾸어진 묘소와 함께 넓게 자리잡고 있다. 임진왜란을 맞아 의병을 일으켜 나라를 구하는데 앞장섰던 의병장 충장공 김덕령을 배향한 사우이다. 현재의 사우는 충장공 김덕령장군 유족 보존회에서 1974~1975년에 건립하여 영당에는 영정을 비롯한 교지가 보관되어 있고 내삼문인 일로문과 외삼문인 충용문이 있으며 영당 앞에는 현종8년에 광주목사 조철영이 세운 은륜비, 유물관에는 충장공묘를 이장할 때 발굴된 관과 옷 등을 전시하고 있지요. 사우 뒤쪽에 충장공의 묘와 묘비가 조상들의 묘와 함께 위치하고 있다.
16. 경렬사
무등산 제 4 수원지 아래쪽의 분토동 뒷산에 고려말의 용장 경렬공 정지(鄭地 : 1347-1391)장군을 모신 경렬사(景烈司)가 있다. 1868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없어졌다가 정지장군유적보존회에 의하여 1978년 묘소가 있는 지금의 자리에 복원공사를 착공하여 1981년에 준공하였다고 한다. 이곳은 처음에 정지장군만을 모셨다가 1718년에 그의 9대 손인 정충신을 배향하는 등, 그 후 몇 분을 더 추가하여 8현을 모시게 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현재의 사우는 사우, 내삼문, 외삼문과 관리실로 구성되어 있으며, 사우 안에는 영정이 모셔져 있고, 사우 입구에는 경렬공 정지장군 사적비가 있다.
참고문헌과 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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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형근선생님 홈페이지 - 누정원림
http://ipcp.edunet4u.net/~namu/ict01/top6-4.htm
전남 담양의 원림과 정자
http://www.tourguide.co.kr/photo/jeonnam_01d/index_e.htm
디지털한국학 http://www.koreandb.net/
국립중앙박물관 http://www.museum.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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