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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의 문화유산

무등산 원효계곡의 원림과 누정(2)

by 햇살과 뜨락 2023. 5. 15.

1. 원림과 누정에 깃든 정신세계

 

  전라남도 담양군 남면 지곡리의 조그마한 계곡에는 조선시대 별서정원(別墅庭園)의 으뜸으로 손꼽히는 소쇄원(瀟灑園)이 풀잎에 아침이슬 맺히듯 자리 잡고 있다. 주변의 자연경관과 함께 그저 있는 듯, 혹은 그냥 자연 그대로인 듯 소박하고 단정한 몸가짐으로 다만 머물러 있을 뿐이다. 그것은 은자(隱者)의 이상을 담은 극히 절제되고 거스름 없는 손길로 살짝 어루만지듯 해 놓았기 때문일 것이다. '가슴에 품은 뜻의 맑고 맑음이 마치 비 갠 뒤의 볕에 부는 청량한 바람과 맑은 날의 달빛과 같다.'는 뜻을 지닌 소쇄원을 하서 김인후(河西 金麟厚)는 그의 소쇄원 48영 중 제4 영 부산오암(負山鼇巖)에서 다음과 같이 읊었다.

 

등에 여러 겹의 청산을 지고

푸른 옥빛 시내로 고개를 돌렸네

나이 들어 편안하니 손뼉 칠 일조차 없어

매대와 광풍각이 영주를 능가하는구나

명옥헌 윈림

  영주(瀛州), 즉 선계의 신선이 사는 전설 속의 섬에 비유되고 있는 소쇄원에는 자연과 인공의 조경이 서로 격을 다투지 않으며 스스로의 분수에 맞게 자리를 잡고 있다. 자연의 틈새에 몇 채의 정자를 조심스럽게 얹어놓은 것이다. 그리하여 그냥 자연 그대로이고 싶은 은자의 꿈을 소박하게 가다듬어 펼쳐 보인다.


  춘향전 탓일까? 보통 원림(園林)이나 누정(樓亭)이라 하면 질펀한 잔치마당과 땀흘리지 않는 자들의 여유로움을 떠올리기 쉽다. 그래서인지 곱지 않은 시선을 받는 경우도 간혹 있으며 ‘참 품위 있게 즐겼구먼’이라는 조롱 섞인 중얼거림을 듣기도 한다. 물론 그런 부분도 배제할 수 없는 사실이긴 하지만 너무 경직된 접근은 본질을 왜곡하기 십상이다.

  원림과 누정에는 조선시대를 관통하는 지조 있는 선비정신과 도가적 자연주의 사상이 함께 어울려 있음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또한 학문의 정진과 인격의 도야, 그리고 아름다운 문학작품이 함께 벗하고 있음도 챙겨야 할 것이다. 비록 민중의 삶터는 아니었지만 하릴없이 자연을 벗하여 시나 읊조리고 은일한 삶을 구가했던 기득권자들의 잔재로 묶어서야 그 고고한 아름다움을 어찌 찾을 수 있겠는가? 더구나 조선시대를 관통하는 자연주의와 선비정신이 5백 년 조선왕조를 이어온 중요한 사상과 정신이라면 조금은 겸허하게 다가가 보아도 좋을 것이다.

  우리나라의 원림과 누정은 살림을 하는 공간이라기보다는 여유공간으로서의 역할이 더 두드러진다. 그런 까닭으로 보편적인 기능적, 경제적 요소보다는 철학적, 사상적 요소가 더욱 풍부하며 우리 민족의 밑바탕에 깔린 정신세계가 은연중 나타나고 있다. 원시신앙적 자연숭배사상과 도가적 신선사상을 비롯한 불교, 유교, 성리학, 음양오행, 자연숭배, 풍수 등이 곳곳에 실체로서 모습을 드러낸다. 특이한 것은 이러한 사상들이 우리의 원림과 누정들 속에서는 상호 배타적이 아니라 거리낌 없이 어울려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그런 현상은 현재 남아 있는 원림과 누정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광한루의 연못은 보통 네모난 못에 하나의 둥근 섬을 띄우는 경우가 대부분인 우리나라의 연못과는 달리 평면이 매우 자유스럽다. 그리고 그 속에 세 개의 섬을 띄워놓았는데, 봉래(蓬萊), 방장(方丈), 영주(瀛洲)의 삼신산으로 이름하였다. 도가적 신선사상이 은연중에 드러나 있는 것이다. 노장사상에서 비롯되는 신선사상은 수행을 통해 신통력을 가진 불멸의 존재가 되고자 하는 것이며 여기에는 나름의 세계관, 즉 삼신산이 그 모습을 드러낸다. 우리의 원림과 누정에 조성되는 연못들에서 그 모습을 쉽게 살필 수 있으며 백제 무왕의 연못 조성에 관한 삼국사기의 기록에서도 살필 수 있다.

  경회루는 주역의 음양오행사상이 강하게 드러나는 건물이다. 경회루 평면은 가운데에 있는 여덟 개의 기둥이 가장 높아 임금이 자리하는 곳으로 8괘를 상징한다고 하며 이는 천지만물의 온갖 현상과 형태를 나타내는 역(易)의 처음이자 근본인 것이다. 그다음 열두 개의 기둥은 달을 표시하며 그다음 스물네 개의 기둥은 제일 낮은 곳으로 24 절기를 상징한다. 구체적으로 음양오행사상을 드러내 보이는 누각인 것이다.

면앙정

  원림과 누정의 조성에서 빠지지 않는 것이 풍수지리이다. 건물의 좌향은 물론이거니와 허한 곳을 막기 위해 숲을 조성하거나 물길을 돌리거나 하는 등의 경우는 너무 흔하게 발견되는 것이다. 우리의 원림과 누정은 특히 자연과의 조화를 중요시하며 자연 속에서 거스름 없는 손길로 아름다움 창출하려는 노력이 중심이 된다. 그 밑바닥에는 무위자연의 노장사상이 짙게 깔려있으며 민족 고유의 자연숭배사상도 한몫 거들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노장사상은 천지자연의 운행과 발생법칙인 도에 순응해야 한다는 개념을 가지므로 원림과 누정의 조성에 가장 중요한 기본 원칙으로 작용하는 사상인 셈이다.

  유교사상의 흔적은 누정의 이름이나 조성배경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소쇄원은 주자가 중국 숭안현의 무이구곡에 정사를 짓고 은둔생활을 하였던 것을 동경하여 조성된 것이다. 소쇄원에 있는 광풍각과 제월당이라는 정자의 이름도 주자의 시에서 연유한다. 소한정(小閒亭)의 주인인 우규동은 학문에 뜻을 두어 정자를 짓고 학문을 가르치며 여가를 보내는 장소로 정자를 지었다. 그러므로 소한정의 조성배경 역시 유학사상에 의거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이곳에 조성된 12경에서는 신선사상, 음양오행설, 불교, 칠성신앙 등이 함께 나타나는 독특한 모습까지 보여준다.

무등산 서석대 주상절리대

   대부분 남아 있는 원림과 누정이 조선시대의 작품들인 만큼 성리학적 선비정신이 곳곳에서 배어 나오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면앙정은 송순의 정자인데 '하늘을 우러르고 땅에 구부려도 한 점 부끄럼 없는 삶을 살겠다'는 의지를 보여준다. 절개와 지조를 삶의 근간으로 삼는 올곧은 선비정신에 다름 아니며 출세와 경륜보다는 의리와 명분을 중시하던 조선선비의 정신세계가 담겨있는 것이다. 세심정이라는 이름 정자를 간혹 볼 수 있는데, 이 또한 마음을 깨끗이 가다듬어 정도가 아니면 따르지 않고 오직 학문에만 전념하겠다는 투철한 선비정신에 다름 아닌 것이다.

  이렇듯 우리의 원림과 누정에는 자연친화적인 조형 요소와 맑은 정신세계가 함께 숨 쉬고 있다. 그러므로 원림과 누정을 살핌에 있어서 외적인 조형적 요소도 무시할 수는 없지만, 그 속에 갈무리되어있는 의미를 파악하는 것이 더욱 깊이를 더한다. 취가정(醉歌亭)이라는 정자가 술 한 잔에 취해서 노래 부르는 정자가 아님을 알 수 있을 때, 누정이 그 건물 자체보다 주변의 경관에 더 큰 의미를 지닌다는 것을 알 때, 우리의 원림과 누정은 보다 바르게 보존되고 많이 흐트러진 제 모습을 그나마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2. 원림이란?

 

  원림은 일종의 정원이다. 하지만 좀 더 다가가면 확연하게 그 의미와 구조가 다르다. 정원(庭園)이라는 말은 일본인들이 만들어낸 말로 일제강점기 때부터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그런 까닭에 지금은 정원(庭苑)으로 고쳐 쓰고 있는데, 보통 담장으로 둘러싸인 기능적인 공간에 인위적인 조경으로 동산의 분위기를 끌어들인 경우를 가리킨다. 즉 닫힌 공간, 자연과 격리된 공간인 것이다. 이에 비해 원림은 자연상태의 동산과 숲을 그대로 두고 거기에 적절하게 인공의 조경을 해놓은 경우를 말한다. 자연을 향해 한껏 열려있는 상태의 정원이라고 할 수 있다. 

자연 그대로의 모습

  우리나라에서는 정원이란 말 대신 가원(家園), 임원(林園), 임천(林泉), 원림(園林), 궁원(宮苑) 등으로 쓰여 왔으며 정원과 원림을 따로 구분하지는 않았다. 굳이 구분할 필요가 없었던 것은 우리네 정원이 거의 원림에 가까운 경우가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자연물에는 의도적인 조경을 삼갔는데, 나무 하나만 두고 보더라도 일부러 자르거나 다듬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분재 등의 방법으로 왜곡하지 않고 자연상태 그대로를 연출하여 즐겼던 것이다.

원림으로 조성한 모습

     원림에는 자연과 하나되려는 의지가 담겨있다. 사람 속에 자연을 가두기보다는 자연 그 자체에 사람이 안기는 또 다른 가꿈의 미학을 지니고 있는 것이 원림인 것이다. 삼천리 금수강산이라 이름한 우리네 자연이 워낙 아름다운 탓도 있었겠지만, 오랜 농경생활 속에서 얻어진 삶의 지혜가 담겨있기도 하다. 그것은 자연의 흐름에 거스르지 않으면서 삶을 영위하려는 보다 범위가 넓은 미적 관조의 세계를 깨달은 탓일 것이다.

 

3. 누정이란?

 

  지금도 그렇지만 우리나라에는 누정이 유달리 많았다. 조선 중종 연간에 편찬된 『신 증동국여지승람』에 등장하는 이름 있는 누정의 수만도 5백여 개가 훌쩍 넘는다. 농부들의 쉼터였던 모정(茅亭)까지를 포함하면 거의 마을 하나에 정자 하나쯤은 가지고 있었으리라는 예상을 할 수 있다. 그리고 그중 반 이상이 호남과 영남지역인 한반도의 남쪽지방에 분포해 있음도 알 수 있다. 이는 누정이 자연과의 공간을 나누는 벽이 없는 건물이었던 까닭으로 따뜻한 기후에 적합했던 것이 가장 중요한 요인일 터이다.

독수정원림

  누는 멀리 경치를 감상할 수 있도록 하는 기능과 물건을 간직하는 곳이라는 의미를 동시에 지닌 다락(多落)의 한 종류라 할 수 있다. 누는 높다랗게 지은 다락이어서 전망을 살피기 쉽고 시원하여 여러 가지 기능에 활용되었다. 대부분의 누는 2층집의 형태를 취하는데, 2층 마루 밑에 누하주(樓下柱)라는 기둥을 세운다. 물론 1층 부분은 사용하지 않는 것이 상례이다. 2층에는 난간을 두른 누마루를 깔고 1층에서부터 올라오는 높은기둥에 의지하여 지붕을 올리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정에 비해서 규모가 크고 공용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고려시대 문장가인 이규보의 『사륜정기』에 의하면 정자는 안으로는 비워지고 밖으로는 열려 있는 공간을 가진 건물로 비슷한 구조인 사(舍), 루(樓)와는 다르다고 구별했다. 그러므로 정은 규모가 작고 단출한 건물을 가리키며 공용인 것도 있지만 개인적인 것도 많다. 공용의 대표적인 것으로 오리정(五里亭)을 들 수 있는데 고을에서 5리쯤 떨어진 곳에 지어 중요인사의 영접을 하는 곳이다. 그러므로 길가에 주로 짓게 된다. 그러나 대부분의 정자는 물길이 휘돌아들어 절벽을 만들어 놓은 전망 좋은 곳에 세우는 것이 일반적이다. 물론 모정의 경우는 그 성격상 논밭에 가까운 곳이나 마을 어귀에 짓는다.

  정자는 보통 휴식을 취하며 경관을 즐기는 장소로 볼 수 있다. 또한 가까운 사람들의 모임장소로서의 역할도 하는 곳이다. 하지만 개인적인 정자의 경우는 학문의 정진과 전수, 그리고 수양을 위한 곳인 경우도 많다. 그런 이유로 조선시대의 시문학은 정자와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 선비들의 모임에서 자연스럽게 시작(詩作)을 하며 즐기며 일부는 제영이라 부르는 액자에 시를 적어 정자에 걸어 놓는 것이다. 송강 정철의 성산별곡이 식영정이라는 정자를 중심으로 주변 경치를 읊은 것도 이와 다름 아니다.

  누정은 전망이 좋고 자연경관이 아름다운 곳에 세워지기 마련이다. 모정과 같이 일하는 사람들의 휴식공간도 예외는 아니며 주변의 경치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다. 마을 어귀나 넓은 들판의 한켠, 휘돌아 드는 물길이 깎아놓은 절벽 위, 전망이 좋은 언덕, 계곡이나 강변의 머물고 싶은 생각이 드는 곳에 세워 놓는다. 그러므로 누정은 건축물의 조형보다는 주변경관에 더 무게중심이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