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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의 문화유산

무등산 원효계곡의 물줄기를 따라서(1)

by 햇살과 뜨락 2023. 5. 14.

선비정신과 계산풍류, 그리고 자연 속에 그윽한 누정과 원림의 향기

 

1. 원효계곡과 무등산

  원효계곡(元曉溪谷)은 무등산 서석대의 수정병풍을 휘돌아 규봉의 절경을 돌아 내려오는 물줄기이다. 상류에 김덕령 장군이 임진왜란을 맞아 의병을 일으키기 위해 칼을 만들었다는 주검동이 있는 이 물줄기는 의상봉에서 산장 쪽으로 인공의 폭포가 되어 떨어진다. 이 폭포를 원효폭포, 또는 세심폭포라 부르며 여기서 떨어지는 물을 맞으면 신경통을 비롯한 잔병에 효험이 있다고 한다. 산장을 지난 맑은 물은 여러 골짜기의 물줄기들과 합쳐져 무등산 동북쪽 계곡을 굽이쳐 흐르다가 풍암정, 삼괴정 등의 정자를 뒤로하고 담양 남면 쪽에서 내려온 창계천으로 합쳐진다.

  주변에 소쇄원과 환벽당, 식영정 등이 모여있는 창계천은  

광주광역시와 담양군 남면을 경계로 하여 곧바로 광주호에 이른 다음, 다시 담양의 고서․창평의 들판을 적시면서 극락강으로 모인다. 광주댐이 세워지기 전에는 창계천을 자미탄(紫薇灘)이라 부르기도 했는데, 여름 내내 붉은 꽃을 피우는 목백일홍(자미나무, 또는 배롱나무)이 여울을 따라 그 모습을 살며시 드리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물줄기를 따라 물길이 휘돌아 드는 곳에 절벽이 생기고 전망 좋은 언덕이 곳곳에 자리 잡고 있으며 여기에 우리 조상들은 한 칸짜리 자그마한 방이 있는 정자를 세웠다. 크고 화려하지는 않지만 학문연마와 마음의 수양처였던 이 정자들에서 조선중기 호남학파의 학문과 문학의 향기, 의로움을 지닌 선비정신과 삶의 발자취를 함께 찾을 수 있다. 또, 자연과의 조화로운 삶을 생각하며 정성 들여 만들어 놓은 소박하면서도 기품이 있는 원림들을 둘러보며 자연친화적이었던 조상들의 지혜와 환경보전의 중요성을 일깨울 수도 있다. 원

효계곡의 물줄기가 시작되는 무등산(無等山 : 1,187m)은 광주광역시와 담양군, 화순군에 걸쳐 있는데 30.23㎢의 면적을 차지하고 있다. 호남정맥 산줄기가 장안산에서 한 번 솟구치고 500m 정도의 높이로 크고 작은 봉우리를 이루다가 무등산에 이르러 1,000m 이상의 높이까지 용솟음치기 시작한다. 이 산줄기는 정상인 천왕봉과 장불재, 백마능선, 안양산으로 이어지고 화순 구봉산에 이르러 점차 낮아진다. 호남정맥은 남해를 향해 장흥 쪽으로 향하다가, 다시 동쪽으로 고개를 틀어 송광사가 있는 조계산을 지나 광양의 백운산에 이르러 다시 한번 크게 용트림을 하고는 남해의 쪽빛 바다로 내려앉는다.

  무등산은 광주의 진산으로 산세가 단순하고 부드러우며 흙산으로 되어 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덕스럽고 믿음직한 느낌을 갖게 한다. 그러나 정상부근의 규봉, 입석대, 서석대 등으로 불리는 웅장한 기암괴석들은 가까이 다가가야 볼 수 있는 또 다른 무등산의 매력이다. 무등산은 백제 이전까지는 무돌이나 무당산이라 일컬었고, 남국신라 때는 무돌의 이두음인 무진악(武珍岳), 또는 무악으로 표기하다가 고려 때부터 서석산(瑞石山)이라는 별칭과 함께 무등산으로 부르게 된 것으로 짐작된다. 또 다른 이름으로는 무돌뫼, 무당산, 무덤산, 무정산 등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광주의 동남쪽에 위치한 무등산은 어느 곳에서나 바라다 보이고 마치 뒷동산을 오르내리듯 손쉽게 찾을 수 있는 산이다. 봄의 철쭉, 여름의 산목련, 가을의 단풍과 겨울의 설경 등 변화가 많은 자연경관이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소나무, 참나무, 물푸레나무, 서어나무, 단풍나무, 노각나무 등 890여종의 온대남부식물이 자라고 있어 자연의 식물원이라고 할 수 있다. 무등산은 아름다운 경치, 맑은 공기와 물을 제공할 뿐 아니라 여유공간, 또는 문화공간으로서의 역할까지 맡고 있어서 광주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에게는 언제나 어느 곳에서나 아련한 향수 갖게 하는 산이다.

 

2. 원효계곡에서 피어난 조선중기 호남성리학과 시가문학

 

  무등산 동북쪽을 굽이굽이 흘러내리는 원효계곡의 물줄기는 광주광역시와 담양군의 남면을 경계로 흐르는 창계천이 된다. 지금은 광주호로 물이 차올라 당시의 모습을 많이 잃어버렸지만, 이 물줄기들이 이루어놓은 아름다운 풍광 속에 중종 14년(1519)일어난 기묘사화(己卯士禍) 이후 대거 지방으로 내려온 사림(士林)들이 곳곳에 원림과 정자를 세우게 되는 것이다. 이를 터전으로 삼아 호남성리학의 학문적 토양이 가꾸어지고 남도 땅의 정서를 가득 담은 풍부한 시가문학이 함께 펼쳐지게 된다.

  흔히 이 지역을 ‘가사문학의 산실’이라 하여 송강 정철을 먼저 떠올리게 마련이다.

물론 가사문학이 꽃피우기 시작한 곳으로서 나름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며 그 점도 높이 평가할 만하다. 그러나 자칫 가사문학에 국한시켜 이곳의 원림과 정자가 가지는 나름의 의미와 그 주인들이었던 당시 호남성리학의 대유(大儒)들에 대한 평가가 가려져서는 안 될 것이다. 더구나 조선성리학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전환점이 되는 논쟁의 주인들이 이곳을 스스로 가꾸고 서로 교류하였다는 것은 이곳이 가지는 가장 중요한 의미일 것이다.

  호남성리학은 야은 길재(冶隱 吉再 : 1353-1419)로부터 비롯되어 김숙자(金叔滋), 김종직(金宗直), 김굉필(金宏弼), 정여창(鄭汝昌), 조광조(趙光祖) 등으로 이어지는 학맥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다. 또한 김굉필의 제자인 김안국(金安國 : 1478-1543)의 『소학(小學)』 보급활동이 상당한 영향을 끼치면서 이 지역 사림들에 의해 받아들여져 활발하게 발전하였다. 이를 토대로 16세기에 들어서면서부터 이항(李恒 : 1499-1576), 김인후(金麟厚 : 1510-1560), 기대승(奇大升 : 1527-1572) 등의 성리학자들에 의하여 나름의 학문적 특색을 보이게 된다. 소학을 토대로 이기일원론이 중심을 이루며 왕도정치를 주장하는 도학을 기본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이항은 전라북도 태인출신으로 서경덕(徐敬德)과 함께 주기론적인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다. 이에 반해 장성출신인 김인후는 주리론적인 입장에 섰으며 서경덕의 학문이 사색에 빠져 있음을 비판하였다. 또 이황과 조식과는 달리 『중용(中庸)』의 성(誠)을 중요시하였다. 광주출신인 기대승은 퇴계와 8년 간에 걸친 그 유명한 ‘사단칠정논쟁(四端七情論爭)’을 벌이게 된다. 이에 따르면 기대승은 퇴계의 이기이원론과 달리 이와 기는 떨어질 수 없다는 점에 중점을 두고 기만이 운동성을 갖는다고 하여 이황이 주장한 이의 작용성과 운동성을 부정하였다. 또 ‘칠정 속에 사단이 있는 것(七情包四端)’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기대승의 학설은 김인후와의 많은 토론 끝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이며 퇴계로 하여금 자신의 학설에 수정을 가하도록 했다. 호남성리학의 이런 전통은 불행하게도 나름의 학파로 발전하지 못하고, 율곡 이이(栗谷 李珥 : 1536-1584)에 의해 기호학파로 계승되었다.

  이 지역은 호남의 시가문학에도 큰 영향을 끼친다. 이곳의 원림과 정자들에서 많은 가사와 시조들이 탄생하였고 대문장가들도 함께 등장한다. 박순(朴淳 : 1523-1589), 백광훈(白光勳 : 1537-1582), 최경창(崔慶昌 : 1539-1583) 등이 당시 호남지역 출신의 대문장가였으며, 이들은 물론 송순, 임억령, 양산보, 김인후, 고경명, 임제, 김인후, 임억령, 정철 등도 이곳을 시가문학의 산실로 만든 주인공들이다. 국문가사로는 송순의 면앙정가(俛仰亭歌)를 시작으로 정철의 성산별곡(星山別曲), 사미인곡(思美人曲), 속미인곡(續美人曲) 등이 이곳에서 탄생하였다. 이런 흐름은 해남의 윤선도(尹善道 : 1587- 1671)의 산중신곡(山中新曲),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로 이어진다. 조선선비의 절개와 지조를 중시하는 철학사상과 소박하고 절제된 미의식과 평범한 듯하나 나름의 운치를 갖춘 자연이 함께 어우러져 계산풍류 멋을 한껏 드러내던 때가 있었던 것이다.

 

3. 기축옥사(己丑獄事)로 스러진 계산풍류의 향기

 

  원효계곡의 물줄기를 따라 도도히 흐르던 호남성리학과 시가문학, 그리고 계산풍류의 그윽한 향기는 기축옥사로 인해 멈추어버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여립 모반사건으로 더 잘 알려진 이 옥사는 호남지방의 많은 사림들이 직․간접으로 서로 얼키고 설켜 갈등과 반목을 일으키고 만 것이다. 옥사를 주도하는 가해 세력과 멸문의 화에 이르는 등의 피해 세력 모두에게 커다란 시련이었으며 이후 호남지역은 배역의 땅이라는 오명마저 얻게 되고 말았다. 그러나 선조 22년(1589) 일어난 기축옥사는 오늘날 정여립(鄭汝立 : 1546-1589)의 사상이 재조명되고 옥사에 대한 진실도 『선조실록(宣祖實錄)』에만 의존하는 시각에서 벗어나 새롭게 해석하는 등 변화가 일고 있어 다행스럽다는 생각이 든다.

  실록에 의하면 정여립은 조정에서 높은 벼슬에 오르지 못함을 불평하다가 그의 고향을 중심으로 많은 무리를 모아 대동계(大同契)라는 조직체를 만들어 활동하였다. 또 ‘이씨는 망하고 정 씨(鄭氏)가 일어난다’는 목자망전읍흥(木子亡奠邑興) 설을 퍼뜨리는 등 민심을 현혹하여 모반을 하려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정여립은 전라북도 진안의 죽도(竹島)에 서실을 지어놓고 대동계를 조직하여 매달 사회(射會)를 여는 등 훈련을 하고 세력을 확장하였다. 이어 전국적으로 조직이 확대되어 황해도 안악의 변숭복(邊崇福)․박연령(朴延齡), 해주의 지함두(池涵斗), 운봉(雲峰)의 승려 의연(義衍) 등이 신분에 차별 없이 다양한 계급과 계층이 참여하였다. 그러다 1589년 10월 황해도관찰사 한준(韓準) 등의 고변으로 죽도로 피신하였다가 관군의 포위가 좁혀들자 자살하고 말았으며 아들인 옥남은 생포되었다.

  이 사건을 기축옥사라고 하며, 그 옥사를 맡아 처리한 사람은 서인인 정철(鄭澈)이었다. 이 옥사로 이발(李潑), 이호(李浩), 백유양(白惟讓), 유몽정(柳夢井), 최영경(崔永慶) 등은 처형되었고 정언신(鄭彦信), 정언지(鄭彦智), 정개청(鄭介淸) 등이 유배되는 등 2년여에 걸쳐 동인계열의 사림 약 1,000여명이 화를 입었다. 당시 화를 입은 대부분의 사림들이 호남사람들이었으며 이로 인해 원효계곡의 물줄기를 따라 형성된 원림과 정자에서 그윽하게 풍기던 조선성리학과 시가문학의 향기는 사그라지고 말았다.

  그러나 오늘날 정여립의 모반사건은 조작이라는 설이 만만치 않게 대두되고 있다. 정여립이 도피하면서 집 안에 각종 문서들을 방치한 점과 연고지인 죽도로 피신한 점, 150년 뒤에 나온 『동소만록(桐巢漫錄)』에서는 그가 죽도에 가서 놀고 있을 때, 선전관 등이 달려와서 박살하고 자결한 것으로 보고하였다고 기록된 점, 김장생(金長生)의 『송강행록(松江行錄)』에 정철이 그의 도망을 미리 알고 있었던 것으로 되어있는 점 등이다. 더구나 광해군(光海君) 때 편찬된 『선조실록』은 당파(黨派) 관련 서술이 공정하지 못하다 하여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북인 정권이 무너지고 서인이 정권을 잡게 되자 다시 편찬되었다. 그것이 바로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이며 그런 까닭으로 당파에 관련된 부분들은 신뢰도가 다소 떨어지는 편이기도 하다.

   이 조작의 주범으로 송익필(宋翼弼)을 들고 있는데, 서인의 참모격이었던 그는 노비출신으로 자신과 그의 가족 70여 명을 환천(還賤)시키고자 했던 동인의 이발, 백유양 등에게 복수하기 위해 이 사건을 조작하였으며 거기에 서인의 집권욕이 작용했으리라는 것이다. 즉, 정여립 사건을 이용하여 역모와 전혀 관계가 없는 정적들과 개인적인 원한관계에 있었던 사람들까지 제거했던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한편으로 정여립의 사상은 당시 상황에서 혁명적인 요소를 지니고 있었던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천하공물설(天下公物說), 하사비군론(何事非君論) 등이 그것이며 오늘날의 공화주의적 요소를 보여준다. 그는 중국의 성인인 요․순․우가 그들의 자식에게 왕위를 물려주지 않고 당대의 현자(賢者)에게 왕위를 계승케 한 것을 높이 평가하면서 천하의 제위(帝位)가 혈연이 아닌 능력에 따라 이어져야 한다고 믿었다. 또한 임금과 신하가 절대적 충성심으로 이루어지는 수직적 관계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이는 군신의 주종관계가 무너짐을 의미하며, 이것은 일종의 민중주의적 입장으로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