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광역시불교 문화유산
높고 낮음이 없는, 그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무등등(無等等)의 경지를 가리키는 무등산(1187m)은 원효계곡(元曉溪谷), 의상봉(義湘峯), 장불재 등 불교와 관계있는 지명들을 많이 품고 있다. 그래서인지 너그러운 산골짝에 많은 절을 안고 있다. 조선 중기까지만 해도 30여 개소에 이르는 절집이 산자락 곳곳에 자리잡고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 무등산에는 증심사(證心寺), 원효사(元曉寺), 약사사(藥師寺) 등 아담한 절집만 남겨져 있을 뿐, 규모 있고 오래 묵은 절집은 찾을 수 없다.
삼국시대 백제의 옛 땅이었던 이곳에서 백제 때의 절집과 절터는 발견되지 않는다. 백제불교가 상당히 융성했음에도 백제의 세력권이었던 이 지역에서 당시의 절집과 절터를 발견하지 못했고 기록에서도 찾을 수 없다. 남북국시대에 들어서야 증심사, 원효사, 약사암 등이 세워진 것으로 되어 있다. 고려시대에는 무등산 자락보다는 광주의 중심지에 큰 절집이 많이 들어섰는데, 지금은 대부분 터만 남기고 사라져 버렸다. 현 광주공원 서오층석탑이 있는 곳에 있었던 성거사, 임동 옛 광주농고 주변의 십신사, 지산동 동오층석탑이 있는 자리의 백천사 등이 바로 고려 때의 절집들이다.
숭유억불정책으로 인해 불교계가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던 조선시대에도 무등산 주변을 중심으로 많은 절집들이 명맥을 유지하였다. 일제강점기 때에는 원각사, 덕림사, 신광사, 흥룡사, 보덕사, 삼광사, 관음사 등이 있었으나 오늘에 이르러서는 대부분 모습을 감추었다. 해방 후에도 광림사, 용화사, 동광사 등이 새로 세워졌으나 불교계가 광주지역에서는 그리 활발한 움직임을 보이지는 않았다. 이어 한국전쟁으로 인해 증심사와 원효사가 불에 타버리는 등 피해를 입고 말아 더욱 어려움을 겪었다.
1. 증심사(證心寺, 문화재자료 1호)
증심사는 무등산의 서쪽 자락에 살짝 몸을 숨기고 있다. 지금은 큰 절집이 아니지만 화려한 전력과 규모를 갖추고 있었다. 처음 세워진 후 여러 차례 불에 타버리는 어려움을 겪은 탓으로 예전 같지 않을 뿐이다. 증심사의 이름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與地勝覽)」이나 「유서석록(遊瑞石錄)」 등의 기록에 “증심사(證心寺)”라 하였고 중수약사전기(重修藥師殿記)나 「광주읍지(光州邑誌)」에는 “징심사(澄心寺)”라 하였는데, 언제 어떤 연유로 ‘징심’이라 하였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9세기 중엽 쌍봉사에 주석하던 선종 사자산문의 개산조인 철감(澈鑑)선사가 맨 처음 세웠으며 고려 선종 11년(1094) 혜조국사(慧照國師)가 중창하였다. 조선시대에 들어서는 세종 25년(1443) 광주목사이던 김방(金倣)이 다시 일으켜 세웠고 정유재란으로 불타버린 뒤 광해군 원년(1609) 석경(釋經), 수장(修裝), 도광(道光)선사가 중창하였다. 한국전쟁 때 오백전과 노전(사성전)을 제외한 모든 전각이 불에 타 여기에 있던 불상과 범종, 탑 등의 귀중한 문화재들이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지금 있는 건물들은 대부분 1970~80년대에 다시 세운 것이다.
증심사는 계곡의 방향을 따라 동서의 축선을 기준으로 하여 가람배치를 하였다. 대부분의 산지가람이 그렇듯이 몇 개의 큰 단으로 나누어 축대를 만들고 건물들을 배치하였다. 일주문을 지나 절마당에 이르는 과정이 지형의 흐름에 따라 여러 차례 굽이쳐 있어 나름의 운치가 있다. 절마당에 들어서면 대웅전을 중심으로 좌우대칭으로 정돈되어 차분한 느낌을 준다. 다만 오백전, 지장전, 비로전 등이 서로 규모에 맞지 않게 배치되어 있는 것이 아쉽다.
증심사는 비록 한국전쟁 때 그 원형을 잃어버렸지만 그래도 광주의 대표적 절로 손꼽힌다. 무등산이라는 빼어난 산세의 중심에 있을 뿐 아니라 오랜 역사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증심사가 있는 곳을 호남의 빼어난 명승으로 꼽았다. 다만 지금의 건물들이 1971년 이후 중창된 것들이어서 예스러움이 덜한 것이 안타깝다.
증심사 철조비로사나불좌상(鐵造毘盧舍那佛坐像, 보물)
이 철불은 본래 증심사의 것이 아니고 폐사지에서 옮겨온 것이라고 전하며 신라 하대의 시대적 유행에 따라 9세기경에 이루어진 작품으로 추정된다.
증심사 삼층석탑(三層石塔, 유형문화재 1호)
삼층석탑은 이곳에서 가장 오래된 문화재이다. 신라 전형양식을 따르고 있는 아담하고 상큼한 탑이다. 기단은 이중으로 되어 있는데, 갓기둥과 버팀기둥이 도드라지게 새겨져 있고 아래층 기단의 각 면에는 가늘고 긴 안상이 섬세하게 새겨져 있다. 탑신부는 몸돌과 지붕돌이 각 하나의 돌로 되어 있으며 몸돌에는 갓기둥이 나타난다.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은 4단씩으로, 남국신라 말에서 고려 초에 주로 나타나는 모습이다. 네 귀퉁이는 살짝 치켜 올라가 있다. 꼭대기에는 네모난 받침돌위로 앙화만 남아 머리장식을 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9세기의 작품인 승주 선암사의 동․서 삼층석탑과 그 양식이 흡사하며 높이 3.4m의 화강암으로 되어 있다.
증심사 오백전(五百殿, 유형문화재 13호)
오백전은 증심사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광주목사였던 김방이 1443년에 짓고 오백나한과 십대제자를 모셨다. 이 고장 사람들의 평안을 기원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한다. 이를 위해 김방은 지금은 없어진 경양방죽을 쌓는 대공사를 하기도 한 사람이다. 오백전은 부처님의 제자인 오백나한을 모신 곳으로 앞면 3칸, 옆면 3칸에 맛배지붕을 하고 있는 소박한 건물이다. 거친돌 허튼층쌓기의 기단 위에 두리기둥을 세웠으며 익공식 건축이다.
증심사 석조보살입상(石造菩薩立像, 유형문화재 14호)
이 보살상은 원통형의 보관을 쓰고 있어 눈길을 끈다. 그렇게 섬세한 새김솜씨를 보여주지는 않지만 단순하고 소박한 느낌을 준다. 특히, 3단으로 된 원형의 연화대좌가 눈길을 끈다. 타원형의 갸름한 얼굴을 지니고 있으며 목에는 목걸이를 했다. 옷은 왼쪽 어깨를 감싸 자연스럽게 흘러내리는 것처럼 새겨져 있다. 이 불상은 담양군에 있었던 서봉사라는 절집에서 옮겨왔다고 하며 고려전기를 넘지는 않을 것으로 여겨진다.
이러한 양식은 10세기 고려 불상인 강릉 한송사(寒松寺) 석조보살좌상이나 오대산 월정사 석조보살좌상 등에서 보여진다.
증심사 오층석탑(五層石塔)
오백전 옆에 있는 오층석탑은 이 삼층석탑과 비슷하지만 조금 수준이 뒤지는 고려시대 작품이다. 이 탑에서 석가여래입상과 금동보상입상이 나왔다. 이들은 국보로 지정될 정도의 수작이었으나 안타깝게도 지금은 행방이 묘연하다. 오층석탑 바로 옆에 있는 칠층석탑에는 몸돌에 범어가 새겨져 있는 것이 특이하다.
2. 약사사(藥師寺, 문화재자료 2호)
증심사 입구에서 새인봉 쪽을 향하여 600m 정도 오르다보면, 새인봉 바라보며 자리잡고 있는 아담한 절집을 만나게 된다. 철감선사가 증심사를 세우기에 앞서 세운 암자이며 원래 인왕사라 불렀었다. 그러나 고려 충렬왕 때 절을 고쳐 세우면서 약사암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근래까지 조그만 암자로 명맥을 유지하다가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중반에 많은 전각을 새로 지었다. 지금은 약사사라 부른다.
이 절집 역사를 전해주고 있는 것은 9세기 전반 남국신라 때의 작품인 석조여래좌상과 대웅전 앞의 삼층석탑뿐이다. 탑은 증심사의 것과 비슷하지만 파손이 심한 편이다. 가람배치는 증심사와 마찬가지로 동서로 축을 삼았고 계곡의 일주문을 지나 50m 정도 가면 1탑 1금당식으로 된 대웅전 앞마당에 이르게 된다. 앞면 3칸, 옆면 2칸의 대웅전과 좌우의 요사채가 있으나 모두 근래에 세워진 것들이다.
약사암 석조여래좌상(石造如來坐像, 보물 600호)
호남지방에서 보기 드문 신라 하대의 불상으로 보존 상태가 양호하며 화강암을 다듬어서 만들었다. 약사사 대웅전에 모셔져 있는 이 불상은 팔각의 연화대좌에 앉아 오른쪽 어깨를 드러낸 얇은 옷을 입고 있다. 머리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붙여 놓았으며, 약간 숙이고 있는 얼굴은 위가 넓고 아래가 좁은 모양이다. 체구는 전체적으로 당당하게 표현되었으나 어깨선이 급한 경사를 이루고 있어 약간 쳐져 보인다. 허리는 지나치게 가늘게 표현되어 상대적으로 가슴쪽의 양감이 풍부해 보인다.
유난히 넓은 무릎과 형식화된 표현, 그리고 대좌와 불상 높이의 비례가 1:1인 점 등에서 석굴암 본존불의 특징을 이어받았다. 불상이 앉아있는 대좌(臺座)는 전형적인 8각의 연꽃무늬 대좌인데, 각각 한 개의 돌로 상·중·하대를 구성하고 있다. 광배는 없어지고 불상과 대좌만 남아있으며 약사암이 처음 세워지던 때인 9세기 말 경의 불상으로 추정된다. 질병에 빠진 모든 중생을 구제한다는 약사불을 형상화한 것이다.
약사사 삼층석탑(三層石塔)
대웅전 앞에 세워진 삼층석탑은 원래 불완전한 파탑(破塔)이었던 것을 다시 복원하여 놓은 것이다. 대구 동화사 비로암 삼층석탑과 거의 흡사한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양식적인 비교를 통해 이 석탑도 9세기 중엽을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현재 복원된 이 석탑의 모습을 보면 단층의 기단만을 마련하여 탑신부를 받쳐줌으로써, 2층의 기단을 갖는 신라석탑의 전형양식에서 벗어나 전체적인 균형을 잃고 있다.
3. 원효사(元曉寺)
무등산의 북쪽 원효계곡이라 이름한 곳의 상류지역은 그 경치가 매우 수려하다. 이곳에 원효대사가 세웠다고 전하는 암자가 바로 원효사이다. 「조선절사료」에 전하는 원효암 중건기에 의하면 원효대사가 세운 것으로 되어 있지만, 원효사가 처음 세워진 때는 신라말기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신라말기에는 작은 암자로 이루어졌다가 고려 충렬왕대에 이루러 품격을 갖춘 절로 중창된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그 이유는 1980년 6월에 실시된 발굴조사 결과 신라 하대와 고려․조선시대에 걸치는 와당과 ‘원효사’명이 보이는 조선 초기의 명문와 등과 같은 유물자료들이 나왔기 때문이다. 또 조선시대에 들어서도 여러 차례 중창불사가 있었다는 기록 등이 있어 고려시대 이후 제법 규모있는 절집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의상봉을 마주 바라보고 있는 이 절집은 6.25 때 모두 불에 타버려 최근 새로 지어진 것들이다. 1980년 5월 대웅전 신축 작업 중 청동불상, 구리거울 등 100여 점의 유물이 발굴되었다. 이 유물들은 남국신라 말에서 조선시대에 이르는 것이어서 이 절집의 오랜 역사를 말해주고 있다.
한 편 원효사 뒤편 산기슭에는 눈에 띠는 부도가 하나 있다. 나름의 맛을 지닌 이 부도는 남국신라 팔각원당형의 기본형에서 약간 벗어나 있다. 받침부분이 4각으로 되어 있고 지붕돌에 동물조각 등이 나타나 있어 고려 후기의 작품으로 추측되는 부도다. 원효사는 가파른 경사의 구릉에 남북 축으로 동향을 하고 있다. 중심에 대웅전을 두고 그 앞의 넓은 마당 좌우에 요사와 명부전을 두었다.
원효사 소장 만수사 범종(元曉寺所藏萬壽寺梵鍾, 유형문화재)
광주에 소재하는 유일한 범종인 원효사 범종은 유곽 아래에 새긴 글로 보아 이 종이 숙종 36년(1710) 만수사에서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종을 매다는 부분인 용뉴는 각각 여의주을 물고 있는 2마리의 용으로 장식하였는데, 용머리 위에도 불꽃에 휩싸인 1개의 여의주을 마련하였다. 종 위쪽 띠에는 범자 문양 띠를 둘렀으며, 띠 아래에는 사각형의 유곽과 4구의 보살상이 동일선상에 번갈아 배치되었다. 유곽과 보살상 사이에 왕실의 안녕을 비는 글이 새겼다. 유곽 안에는 연꽃무늬의 바탕에 연봉오리 모양의 9개의 유두가 도드라지게 새겨 있다.
이 종은 몸체 높이와 입 지름의 비율이 거의 1:1로 전형적인 조선종의 비율을 지니고 있으나, 용뉴 부위의 표현이 경직되고 음통대신 음구멍을 넣는 등 양식의 퇴화가 엿 보인다. 또 당좌 및 하대의 문양이 없어지는 등 조선후기 범종의 특징이 나타나는 점에서, 범종의 양식 변화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원효사 동부도(元曉寺東浮屠, 유형문화재)
원효사 대웅전에서 왼쪽으로 약 150m 떨어진 숲속에 자리하고 있는데, 이 절에 전하고 있는 몇 안되는 유물 가운데 하나이다. 신라하대의 팔각원당형에서 약간 변화된 모습을 보이는 부도로 주인을 알 수 없다, 네모난 바닥돌 위에 3개의 받침돌로 이루어진 기단을 마련한 후, 몸돌을 올려놓았는데 바닥돌과 기단의 일부를 제외한 부재들은 팔각을 이루고 있다.
기단은 아래받침돌 윗면에 연꽃조각을 두르고, 옆면의 네 모서리에 숫사자와 암사자를 교대로 배치하였다. 가운데받침돌은 4면에 연꽃을 새기고, 네 모서리마다 사자와 용을 각각 암수로 나누어 조각하였으며, 윗받침돌은 옆면에 연꽃을 돌려 새겼는데 너무 얕아서 형식에 치우친 감이 있다. 탑신의 몸돌은 너비보다 높이가 길며 약한 배흘림을 하고 있다. 지나치게 큰 지붕돌은 가득 새겨진 조각들로 인해 더욱 무거워 보인다. 윗면에는 기왓골과 여덟 모서리선이 뚜렷하고, 밑면에는 2중의 서까래를 조각하여 겹처마를 표현하고 있으며, 여덟 귀퉁이에는 꽃조각 대신 용, 다람쥐, 비둘기, 거북 등의 동물들을 조각하여 장식하였는데 이러한 모습은 고려 후기에 나타나는 특이한 양식이다.
4. 그 외의 불교 문화유산
광주에는 무등산 자락이 동서로 내려앉은 자리에 오층석탑이 2기가 자리고 있다. 이 탑들은 마치 광주를 지켜주고 있는 듯 하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옛 광주읍지도를 보면 이 탑들이 있는 곳이 광주의 동쪽과 서쪽 요지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같은 때에 세워진 것이 아니고 절집도 각각 다른 것을 보면 나중에 붙여진 이야기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동오층석탑이 있는 곳은 본래 백천사라는 절집이 있었던 자리라고 한다. 전체적으로 훤칠하고 시원한 느낌을 주는 아름다운 탑이다. 2중의 기단 위에 5층의 탑신을 올렸으며 신라 전형양식을 충실하게 따르고 있다. 기단부는 여러 개의 돌을 짜 맞추어 구성하였고 갓기둥과 버팀기둥을 두었다. 탑신부의 몸돌과 지붕돌은 각각 하나의 돌로 이루어졌다. 특히 지붕돌 밑면의 받침이 1층은 5단인데 비해 2층부터는 4단으로 되어 있어 전성기를 지난 9세기말의 작품일 가능성이 높다.
서오층석탑은 광주공원의 성거사터라고 전해지는 곳에 자리하고 있다. 광주공원의 모양이 거북이처럼 생겼으므로 광주를 떠나지 못하도록 등에 절을 세우고 목 부분에 이 탑을 세웠다고 전해진다.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여겨지는 이 탑은 단층기단에 5층의 탑신을 세웠다. 조금은 가냘픈 듯한 몸으로 하늘을 향한 이 탑은 1층 몸돌을 아래위 2단으로 나누어 5개의 돌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 특이하다. 고려 이전에는 잘 나타나지 않는 양식인 것이다.
지붕돌 밑면의 받침은 4단이고 귀퉁이는 약간 하늘을 향해 치켜올려져 있다.
중흥산성 쌍사자석등은 광주의 불교문화재 중 유일하게 국보로 지정되어 있으나 본래 자리는 전남 광양의 중흥산성이다. 지금은 광주박물관 로비에 모셔져 대접을 받고 있지만 중앙박물관에 있다가 한 때 일본으로 빼돌려지기도 했던 이 석등의 운명은 기구하기만 하다. 우리나라에 몇 기 없는 사자석등 중 새김솜씨가 매우 뛰어나고 아름다운 조형미를 갖춘 석등이다. 유려한 연화대좌 위에 두 마리의 사자가 뒷발로 버티고 서서 가슴을 맞대어 위를 받치고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사자의 모습이 매우 사실적이고 역동적이다. 받치는 연화좌 위의 8각 화사석에는 4개의 창이 뚫려 있다. 지붕돌은 여덟 귀퉁이에서의 살짝 치켜올려져 있어 아름다움을 더 하며 보주로 머리장식을 하고 있다.
이외에도 지금은 민속박물관 앞뜰에 놓여있는 십신사터 석불과 석비, 운천사 마애여래좌상, 신용동 오층석탑, 광주박물관 뜰에 있는 장운동 오층석탑 등이 광주의 불교문화유산으로 남겨져 있다.
광주의 불교문화유산은 많지 않다. 또 화려하거나 역사적 가치도 높지 않다. 그러나 우리 고장의 소중한 문화유산이며 우리 선조의 땀과 지혜가 함께 깃들어 있는 것이다. 사랑스런 눈길로 다가가면 기대 이상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고 나름의 아름다움을 내 비추어 준다. 그런 만큼 소중히 보살피고 조심스레 가꾸어 나가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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