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벅수와 짐대

순천 선암사 나무벅수

by 햇살과 뜨락 2023. 5. 3.

전라남도 순천시 승주읍 선암사길 450

 

  조계산 선암사는 우리나라 태고종의 총본산이다. 오밀조밀한 절집들의 배치와 검소하게 가꾼 정원의 꽃과 나무의 조화가 아름다운 이 절집에 들리려면 먼저 험상궂은 나무벅수를 만나야 하기 때문에 마음을 가다듬고 옷매무새를 단정히 해야 한다. 밤나무로 만든 한 쌍의 벅수는 남녀가 아니고 모두 남성이며 호법선신(護法善神), 방생정계(放生淨界)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그야말로 불법을 지키고 절집을 맑고 자유롭게 하는 역할을 가진 수호신이라는 것이다. 근래에는 나무벅수와 모양은 닮았으나 새김솜씨는 한참 떨어지는 커다란 돌벅수도 만나야 한다. 도대체 무슨 생각일까? 절집의 위세를 보이기 위한 것이거나 지금 세워져 있는 나무벅수가 썩으면 그 벅수의 구실을 대신하기 위해서라면 이건 완전 실패다.

  지금의 나무벅수 이전의 옛 나무벅수는 1904년 세워진 이래 80여 년 동안 한 자리를 지킨 벅수였다. 보통 나무벅수의 수명은 10년 정도인데, 이 벅수는 조직이 치밀한 밤나무로 만들어진 탓으로 부분적으로 훼손되기는 했으나 정교한 새김솜씨를 보여주고 있으며 지금도 선암사 경내의 설선당에 보관되어 있다. 옛 벅수를 닮게 만든 것이 지금의 나무벅수인데, 1987년에 만든 것이다. 지금의 나무벅수도 1904년에 만든 나무벅수의 새김솜씨를 따라잡지 못하고 있을 뿐 아니라, 2018년 세워진 돌벅수는 한술 더 뜬다. 돌을 재료로 할 생각이라면 나무벅수를 무작정 닮게 하는 것보다 돌벅수 나름의 조형언어와 재료의 특성을 고려했으면 좋았을 것을…. 이런 작품 하나하나가 시대의 문화적 수준을 보여준다고 하는데, 우리가 사는 시대의 문화적 척박함이 여과 없이 드러나 안타깝다.

  지금의 나무벅수는 부도밭을 지나 무지개 돌다리로 소박한 듯하면서도 화려한 멋을 갖춘 ‘승선교’란 이름의 돌다리를 건너 2층 누각인 ‘강선루’를 지나 ‘삼인당’에 이르는 길 양옆에 자리 잡고 있다. 왕방울 눈에 역사상의 모습을 갖추었으며 길게 내려온 수염이 멋들어진 선암사 벅수의 높이는 3m로 그리 위압적이 아니다. 돌벅수는 크기만 컸지 신격을 부여하기에는 그 모습과 표정이 어울리지 않는다. 지금의 나무벅수도 옛 나무벅수의 함상 궂은듯하면서도 온화함을 지닌 오묘한 표정과 정교한 새김솜씨를 제대로 드러내는 것에서는 실패한 것 같아 보여 아쉽다.

  1780년 제작된 선암사 팔상전의 ‘석가모니 후불탱화’에는 법수보살과 서방법수보살이 그려져 있었는데, 1999년 탱화를 도둑맞아 버렸다. 법수보살은 불법을 닦고 지키는 보살이며 절집의 들머리에 세워져 절집을 지켜주는 수호신 구실을 하는 보살로 보통 벅수를 말한다고 한다. 이 탱화에서 법수보살을 찾아낸 강현구선생은 1991년 『향토사연구』 3권의 「선암사 벅수고⌟에서 이를 밝히고 있다. 서양미술을 전공한 본인에게 우리 문화의 아름다움에 다가갈 수 있도록 길잡이를 해준 고마운 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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