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광역시 대덕구 법2동 77-8번지 , 95-2
법동 석장승(法洞 石長牲, 대전광역시 민속문화재 제1호)
법동 돌벅수는 말이 많은 마을지킴이다. 고려시대에 세웠다느니, 1700년대라느니, 근대 개화기가 맞는다는 둥, 여러 가지 설이 있어서 어느 쪽의 설을 믿어야 할지 난감하다. 아무튼 고려시대는 너무 멀리 간 것 같고 기록이나 근거가 불충분하며 억지스러운 면이 있다. 1700년대의 경우, 당시의 돌벅수들은 천연두를 막기 위한 ‘두창벅수’가 대부분이어서 주로 상원주장군이나 하원당장군처럼 중국의 장수를 용병으로 불러 전염병을 막게 했다. 천하대장군과 지하대장군이란 이름은 19세기 후반에 많이 등장한다. 방향을 가리키는 오방장군에서 하늘과 땅, 둘로 나뉘어 간략화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지하대장군에서 지하여장군으로 바뀌는 때는 근대 개화기인 19세기 후반, 또는 20세기 초인 경우가 많다. 개화기라는 말이 무색하게 유교사회 보다 더 심한 성차별적인 내용을 드러내다니……
법동의 돌벅수는 본래 나무벅수였다가 20세기 초에 돌벅수로 바뀌었다는 것이 마을 노인들의 구술이다. 어쨌든 여러 정황상 18세기 후반 나무벅수로 처음 세워졌다가 일제강점기인 20세기 초반 돌벅수로 바뀐 것이 아닌가 싶다.
본래 이 한 쌍의 돌벅수는 범천골 마을의 한복판을 흐르는 냇가의 양쪽에 세워져 있었으나 지금은 아파트촌으로 변해버린 법동의 범천골 들머리 길 양쪽에 서 있다. 돌벅수는 잘 다듬지 않은 돌기둥에 위쪽에는 모자를 씌우고 돋을새김으로 얼굴을, 아래쪽 몸통에는 오목새김으로 이름을 새겨 놓았다. 전체적으로 새김솜씨가 떨어지고 크기도 150㎝이하이며 지하여장군은 더 작다. 하나 특이 한 것은 벅수들 옆에 각각 선돌을 세워 두었다는 것이다. 남성과 여성을 상징하는 듯하고 고려시대 설과 17세기 설을 주장하는 이들의 중요한 근거이기도 하다. 한편 이 선돌들은 벅수 내외의 아들과 딸이라고도 하여 ‘아기벅수’라고도 한다.
매년 음력 정월 열나흗날 밤 12시경 산신당에서 산신제를 올리고 그 후 벅수에게는 거리제를 치른다. 마을의 액운을 막고 동네사람들이 안녕과 건강을 바라는 마을 공동의 제사다. 초사흗날부터 벅수 주위를 깨끗이 청소하고 황토를 뿌린 뒤 벅수에게 왼새끼로 꼰 금줄을 친다. 풍물패는 집집마다 돌며 ‘지신밟기’를 하면서 추렴을 한다. 제사비용을 걷는 것이다. 대도시임에도 불구하고 오늘날까지 동네사람들이 힘을 모아 진행하는 산신제와 거리제가 열린다는 것은 드문 일이다.
매년 음력 정월 열나흗날 밤 12시경 산신당에서 산신제를 올리고 그 후 벅수에게는 거리제를 치른다. 마을의 액운을 막고 동네사람들이 안녕과 건강을 바라는 마을 공동의 제사다. 초사흗날부터 벅수 주위를 깨끗이 청소하고 황토를 뿌린 뒤 벅수에게 왼새끼로 꼰 금줄을 친다. 풍물패는 집집마다 돌며 ‘지신밟기’를 하면서 추렴을 한다. 제사비용을 걷는 것이다. 대도시임에도 불구하고 오늘날까지 동네사람들이 힘을 모아 진행하는 산신제와 거리제가 열린다는 것은 드문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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