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거리 당산)
봄은 마른 나뭇가지에 언뜻 비친 물빛으로 시작한다. 물이 오른 나뭇가지 끄트머리는 수줍음으로 바알갛고 줄기에는 살그머니 초록이 담겼다. 아직은 옷깃 새로 파고드는 바람결이 소름을 돋우지만 한결 다소곳하다. 노랑을 옅게 머금은 햇살은 양지쪽 들판에서 싹을 돋우기 위해 부지런히 아지랑이를 피워 올린다. 아직은 이른 봄, 유난히 돌짐대와 돌벅수가 많은 전라북도 고창과 부안을 향해 길을 나선다. 정월에 마을 사람들이 편을 갈라 줄다리기를 한 줄로 단장한 짐대들을 그리며 고창․담양 간 253번 고속도로로 올라선다.
반듯하게 뚫린 고속도로나 4차선 도로에 올라서면 되레 바빠진다. 시간적 여유가 있어도 속도를 높이기 마련이어서 찬찬한 살핌도, 자유로운 멈춤도 허락하지 않는다. 점에서 점으로 쏜살같이 달릴 뿐이다. 느긋한 여유로움이나 계획의 변경, 갑작스러운 멈춤, 과정에의 성찰 등은 없다. 그저 빨리 목적지에 닿고 싶어 안달할 뿐이다. 빠르고 편리하지만 아기자기한 삶의 이야기가 사라져버리는 것이다. 건성건성 많이 보긴 해도 깊이가 없고 메마른 느낌뿐이다. 그래서 요즈음 많은 이들이 자동차 여행을 버리고 걷는 여행을 선택하는 것일까?
남녘 땅 서해안인 영광, 고창, 부안은 짐대당산의 고장이라 일러도 별무리가 없다. 그것도 나무가 아닌 돌로 만든 돌짐대당산! 본래 당산신은 당산나무가 대부분이지만, 이곳의 당산들은 특이하게도 짐대가 주역이다.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마을 입구에 당산나무, 짐대, 선돌, 벅수 등 여러 신들을 모셨다. 마을공동체가 평안하고 복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일궈놓은 신앙체다. 이러한 마을 신앙은 대부분 당산이라는 형태로 나타나며 느티나무, 팽나무, 소나무 등의 오래 묵은 나무가 당산신 역할을 한다. 그러나 드물게 짐대, 선돌 등 하위신이 당산신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당산은 그 마을을 수호해 주는 신이 사는 곳이며 당산신을 잘 모셔야 마을 사람들에게 나쁜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믿었다. 그래서 매년 정초가 되면 마을에서 공동으로 제사를 지내고 공동체의 안녕과 개인적인 소망을 함께 빌었다. 이러한 신앙형태는 삼한시대부터 내려오는 것으로 농경이 발달한 지역에서 집중적으로 나타난다.
고창읍에 도착해 먼저 읍성을 찾는다. 순천 낙안읍성, 서산 해미읍성과 함께 거의 완벽한 모습으로 남아있는 읍성이다. 사십대 초반 이곳에서 소나무를 보고 처음으로 나무가 아름답다는 생각을 했던 기억이 새롭다.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힘차고 날렵하게 뻗은 가지에서 명필의 필치마저 느껴졌다. 도시에서만 살았던 탓으로 사십이 넘어서야 겨우 자연의 아름다움 곁으로 한 걸음 다가간 것이다.
옛 고창 고을의 읍성이었던 이곳은 모양성(牟陽城)이라 부르기도 한다. 백제 때 이 지역을 모량부리로 불렀었기 때문으로 짐작한다. 이 읍성은 단종 때 세워진 것이라고도 하고 숙종 때 완성되었다고도 하나 확실하지 않다. 성벽은 비교적 잘 남아 있으나 내부의 건물들은 거의 없어졌다. 한 시간쯤 걸려 성을 한 바퀴 돈 다음 오거리 당산으로 향한다.
고창 오거리 당산은 오거리에 있는 당산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옛 고창읍의 중앙과 동서남북 다섯 방향에 자리 잡은 당산을 한꺼번에 이르는 말이다. 고창읍 중심부인 중앙동과 읍내리의 상거리, 중거리, 하거리에 각각 당산이 조성되어 있고 북쪽 교촌리에도 당산이 있다. 중앙동과 중거리, 하거리에는 독특한 모양의 돌기둥이 세워져 있고 나머지는 자연석으로 되어 있다.
고창은 동서로 흐르는 고창천 때문에 자주 물난리가 났었는데, 정조 연간에 특히 심해지자 순조 3년(1803) 오늘날과 같은 당산을 조성하였다. 사진을 찍으면서 하늘을 본다. 봄날치고는 하늘이 그리 나쁘지 않다는 느낌이다. 요즈음엔 티 없이 맑은 하늘을 보기 힘들다. 봄에는 물론이고 가을에도, 도시가 아닌 시골에서도 그렇다. 눈이 시리게 푸른 하늘을 보기 힘들게 되어 버렸다. 황사의 계절이 다가온다. 이십여 년 전까지만 해도 황사현상은 물론이고 그런 소리조차 들어본 적이 없었다. 갈수록 심해지더니 최근에는 눈을 뜨기 힘든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걱정이다.
고창읍성에서 걸어서 5분 남짓 거리에 있는 상거리 당산을 찾는다. 고을의 동쪽 천북동(川北洞), 천변남로가 시작되는 지점에 있는 상거리 당산은 할아버지, 할머니, 아들, 며느리까지 한 가족이 모여 있는 당산이다. 문화재 지정이 되어 있지 않아 안내문이 없는데다 골목길 안쪽에 들어앉아 있어서 한참 헤맨 후에야 찾을 수 있었다. 천변으로 난 길을 가다 민가 안에 커다란 팽나무가 보여 긴가민가하며 기웃거리다 찾은 것이다. ‘동산물 숲쟁이’, 또는 ‘동부리 당숲거리’라고도 불리는 이곳은 방장산에서 내려오는 월산천과 노동저수지에서 내려오는 노동천이 만나는 지점이다. 그러다 보니 물난리가 잦은 곳이어서 조선 중기까지만 해도 마을이 없었다고 한다. 치수를 하고 수구막이로 숲을 조성하면서 마을이 들어섰다. 지금은 민가들이 천변 길을 따라 들어섰고 수구막이 숲쟁이는 사라졌다.
금줄을 두른 할아버지는 키가 180cm 남짓 되는 아무런 새김이 없는 선돌로 골목길 안의 당산에 자리 잡고 있다.
금줄은 정월 초하루에 지낸 당산제의 흔적일 것이다. 할머니 역시 선돌로 당산 바로 옆 민가의 마당에 갇혀 있다. 그 곁엔 며느리라고 하는 300여년 된 팽나무가 민가 지붕사이로 제법 멋스러운 자태를 뽐낸다. 아마 당산이었던 곳에 민가가 들어서 버린 것 같다. 아들 역시 다듬지 않은 입석으로 할아버지당산에서 300m쯤 떨어진 큰 길가에 있으며 땅에 묻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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