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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등산 무돌길

무돌 8길(영평길)

by 햇살과 뜨락 2023. 5. 9.

무돌 8길(영평길)

 

  영평길이라 이름 붙인 이 길은 이서초등학교에서 출발하여 영평리(永坪里)의 영신마을과 도원마을을 지나 안심리 정자에 이르는 길이다. 감나무에 파릇한 싹이 제법 무성한 걸 보니 봄이 가는 모양이다. 봄꽃에 취하다 보면 내내 마른 나뭇가지일 것만 같던 감나무에도 어느새 싹이 돋는다. 곳곳에 찔레, 아카시, 이팝나무, 층층나무 꽃들이 하얗게 피고 향기는 바람에 실려 코끝을 상큼하게 한다. 연보랏빛 오동나무도 한몫 거들고 있다. 작년 초겨울에 걸었던 때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다. 더구나 햇살마저 투명해서 걷는 동안 내내 무등산 천왕봉과 규봉, 그리고 입석대가 선명하게 눈 안을 가득 채운다. 오월인 것이다.

 영평리는 영신마을과 유평마을에서 한 자씩 취하여 이름 지었다.

그러나 이서초등학교 주변에 있던 유평마을은 거의 없어졌고 외지에서 들어온 사람들의 전원주택이 몇 채 남아있을 뿐이다. 다만 영신마을과 장복동이라 불리기도 하는 도원마을은 아직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영신마을은 산골치고는 논배미가 제법 넓어 예전에는 살만했을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을 한다.

   이서초등학교 정문에서 포장도로를 따라 조금 걷다가 학교 담장이 끝나는 지점에서 왼쪽으로 꺾어진다. 규봉암(圭峯庵)으로 올라가는 길이다. 규봉의 바위들인 광석대(光石臺) 아래로 암자의 지붕까지 언 듯 비친다. 규봉은 두 봉우리가 깎아지른 듯 서 있는데, 그 모습이 마치 옥으로 만든 홀(笏)과 같이 보인다 하여 규봉이라 이름 지었다고 한다. 영신마을로 넘어가는 소나무 숲정이 옆 오솔길을 지나쳐 규봉암 길로 조금 더 올라가면 돌탑 무더기가 길손을 반긴다. 크고 작은 독특한 모양의 돌탑들이 백 여 개는 될듯하고 목장승도 보인다. 20여 년 전 이곳에 들어온 사람이 지금까지 줄곧 쌓아 놓은 것이라 한다.

    다시 되돌아와 나직한 오솔길을 넘어가면 서원재(瑞源齋)라는 진양 하 씨 제각(晉陽 河氏 祭閣)과 묘역 주변의 멋들어진 소나무가 걸음을 멈추게 한다. 그리고는 제법 널찍한 계곡의 논배미 너머로 안심마을이 살며시 엿보인다. 여기에서 오른쪽으로 꺾어지면 바로 영신마을이 모습을 드러낸다. 한 여름이면 돌담길에 주황색으로 등을 내건 듯 피어나는 능소화(凌霄花)가 아름다운 마을이라고 한다. 시인 박남준 씨는 ‘혼자서는 일어설 수 없어 나무에, 돌담에 몸 기대어 등을 내거는 꽃’이라고 했던 능소화. 슬픈 전설까지 간직한 그 여린 능소화에 독이 있어 실명의 위험이 있다는 소리가 있다. 하지만 전혀 근거 없는 이야기란다. 독은 물론 없고 꽃가루가 갈퀴모양이라는 소리도 헛소문이라는 것이다.

  영신마을은 이곳에 영신사(靈神寺)라는 절이 있었기 때문에 절 이름을 취하여 영신(靈神)이라 하였다가 영신(永神)으로 바뀌었단다. 마을에는 구봉과 율곡이 이곳을 지나다 샘물 맛을 보고 반천이라 이름 하였다고 전하는 ‘설시암’이라는 샘이 있다. 구봉 송익필(龜峯 宋翼弼)은 천재, 문장가, 예학의 대가라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하지만 서얼출신으로 서인의 모사(謀士)였으며 기축옥사를 일으켜 동서인 간의 극단적인 반목을 부추긴 장본인으로 지목되는 사람이기도 하다. 율곡과는 막역한 사이였던 듯한데, 두 사람이 함께 이 외진 산골을 지나다 물을 마셨다니 쉽게 믿기진 않는다.

  동남향으로 트인 마을 앞으로는 화순적벽을 품고 있는 적벽산이 아련하고 북서쪽으로는 도원마을을 거쳐 장불재를 넘어 광주까지 이어진다. 마을 앞의 넓은 논배미 사이로는 영신천이 흐른다. 영신마을을 돌아 나와 도원마을로 향하는 길가 곳곳에 진양 하 씨들의 묘가 눈에 띈다. 아마 영신마을에는 진양 하 씨들이 많이 사는 모양이다. 도원마을로 가는 길은 그리 급하지 않은 고갯길이지만, 등에 땀이 흥건하고 숨이 찬다. 시멘트로 포장되어 있는 숲길을 한참 올라가 산등성이를 넘으면 마을이 모습을 드러낸다.

   찔레꽃 향기와 함께 다다른 도원마을은 무등산 동쪽 중턱에 높직하게 자리 잡고 있어 전망이 툭 틔어 있다. 동남쪽으로는 멀리 적벽산이 짙은 보랏빛으로 바라다보이고 남서쪽으로는 골짜기의 논배미들 사이로 안심리의 마을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모습을 드러낸다. 도원마을은 장불재 아래 장복동(長福洞)과 그 아래에 자리 잡은 하장복(下長福)마을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1914년 광주군에서 화순군이 되면서 신선이 산다는 무릉도원을 뜻하는 도원(桃源)으로 바꾸었다 한다. 지금 사람들이 사는 곳은 예전 하장복이라 불리던 곳이다. 마을에는 소를 키우는 축사들이 여러 채 눈에 띈다. 그래서인지 산골마을다운 잔잔한 평온함은 쉽사리 다가오지 않는다. 더구나 축사를 지키는 개들의 짓는 소리와 축사의 냄새까지 어우러져 오래 머물고 싶은 생각을 가시게 한다.

  휭하니 둘러보고 안심리 하반동으로 걸음을 재촉한다. 도원마을에서 하반동으로 가는 길은 거의 내리막길이어서 편안한 마음으로 주위를 살필 수 있다. 더구나 전망도 좋고 주변의 풍광도 그럴듯해서 걸음걸이가 자연 느려진다. 계곡을 건너 산자락 길을 조금 오르자 가산 명가원과 무등산 펜션이 모습을 드러낸다. 영평길은 무등산 펜션 푯말을 따라가면 찾기 쉽다. 이어 아담한 전원주택들과 사슴요리 전문집이기도 한 OK사슴목장을 만난다. 이제 막 모내기를 마친 다랑이 논들과 푸른 산 능선과 하얀 꽃들이 서로 어울려 초여름 정취가 풍성하다. 아직도 철쭉꽃이 남아 있고 이른 모내기를 해 놓은 걸 보면, 이곳이 제법 추운 곳일 거라는 생각이 든다.

  여기서부터 하반동으로 내려가는 길은 포장되어있지 않아 걷는 사람에게는 더없이 좋다. 더구나 소나무가 우거진 숲길도 마련되어 있다. 길 주변과 숲 속에는 철 늦은 들꽃들이 한창이다. 미나리아재비, 뱀딸기, 애기똥풀, 양지꽃, 엉겅퀴 등등……. 평지 같으면 벌써 저버렸거나 시들어갈 들꽃들이 오월의 햇살을 만끽하고 있다. 소나무숲길에서 벗어나 논둑길을 따라 하반동 정자에 이른다. 묘지 옆을 지키는 멋들어진 소나무 한 그루에서 쉽사리 눈길을 떼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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