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한국의 승탑

섬진강변을 따라가는 환상의 승탑기행

by 햇살과 뜨락 2023. 5. 7.

 

1. 답사를 시작하면서

  쌍봉사 철감선사탑, 태안사 적인선사조륜청정탑, 연곡사 동․북부도 등 섬진강의 물줄기들이 어우러진 곳에 남겨져 있는 하대신라 때의 팔각원당형 승탑들은 섬세하고 화려한 새김솜씨와 빼어난 조형적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9산선문(九山禪門)이 형성되던 시기이기도 하겠지만 전라도 땅에는 유난히 수준 높은 승탑들이 많다. 이 지역에서 가지산문(迦智山門), 동리산문(桐裏山門), 실상산문(實相山門)의 개창이 이루어졌고 사자산문(獅子山門)의 중요한 근거지 또한 자리 잡고 있는 까닭이다.

  그중에서도 사자산 쌍봉사에 자리 잡은 철감선사탑(澈鑒禪師塔)은 승탑이 가지는 아름다움을 그대로 드러내 보여준다. 단단하기 그지없는 화강암을 그토록 정교하고 섬세하게 다듬어 놓은 탁월한 솜씨는 물론이고, 깊은 불심과 풍부한 상상력으로 섬세하게 새긴 형상들에 곧 살아 움직일 듯한 생동감을 불어넣은 예술혼은 보는 이를 사로잡는다. 삼천대천세계의 한 복판에 솟아 있는 수미산이라는 부처님의 자리, 아미타불의 서방극락정토를 현실로 옮겨 놓은 철감선사탑! 깨달음을 얻어 이미 부처가 되어버린, 속세의 인연과 업을 모두 끊어버리고 열반적정(涅槃寂靜)의 경지에 오른 철감대선사의 사리가 모셔져 있는 이 사리탑은 우리나라의 석조조형물들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작품이라 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남북국시대인 9세기경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한 팔각원당형 승탑(八角圓堂型 浮屠)들은 유난히 아름다운 새김솜씨를 보여준다. 풍부한 감성과 날카로운 감각을 함께 갖추고 있어 우리나라 석조조형의 예술적 경지를 살피는데 더할 나위 없는 문화유산인 것이다. 그러나 이 시기의 승탑들은 절의 한켠에 호젓하게 자리 잡고 있는 경우가 많아 자칫 감상의 기회를 놓치기 쉽다. 요즘은 대부분 절의 입구에 한데 모여 부도전(浮屠殿)을 이루고 있지만, 쌍봉사는 물론이고 연곡사, 태안사, 보림사 등의 팔각원당형 승탑들은 대부분 절 뒤나 옆으로 상당한 거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불교 최초의 예배대상이었던 불탑은 건축적 요소가 강한데 반해, 승탑은 조소로서의 가치가 높다. 불탑에 비해 정교하고 섬세한 새김솜씨를 보여주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불교의 이상향인 극락세계를 형상화하였으므로 나름의 조형적 창의성까지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당시 사람들이 가진 피안의 세계에 대한 불교적 세계관과 미의식을 드러내주는 한 편으로 전각(殿閣)을 비롯한 목조건축물의 모습을 추측할 수 있게 한다. 승탑에는 ‘모든 사람이 깨달음을 성취하여 부처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는 뜻의 일체중생 실유불성(一切衆生 悉有佛性)이라는 대승의 여래장 사상(如來藏 思想)이 담겨 있기도 하다. 또한 ‘문자에 의존하지 않고 경전밖에 따로 전하니 사람의 마음을 올곧게 가리켜 성품을 보고 깨달음에 이른다.’는 불립문자 교외별전 직지인심 견성성불(不立文字 敎外別傳 直指人心 見性成佛)의 경지, 즉 선불교의 원리가 함께 내포되어 있음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2. 쌍봉사(雙峰寺)

 

가. 사자산이 머금은 절집

  신라 말에 중국에서 건너온 새로운 불교종파인 선종(禪宗)은 경전의 해석과 수행을 중심으로 하는 교종(敎宗)과는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선종은 ‘불립문자 직지인심(不立文字 直指人心)’을 내세우며 신라의 지배세력과 결합하여 세속적인 모습을 보여 가는 교종인 화엄종과 대립하였던 것이다. 당시 무주라 불리던 전라도 지역은 동북아시아의 해상무역을 장악했던 장보고의 청해진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당나라로 유학 갔던 많은 스님들이 이 지역을 거쳐 가거나 아예 자리를 잡게 된다. 그리고 당시 신라의 중심지인 경주의 지배층들이 주로 화엄종을 믿었으므로 이와 대립하는 선종들은 거의 주변부에 자리 잡을 수밖에 없는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쌍봉사는 강원도 영월군의 흥녕선원(興寧禪院:현 법흥사)에서 개창한 사자산문(師子山門)의 근본이 되는 절로 선종의 중요한 유물형태인 철감선사탑이 남아 있다.

철감선사는 이곳 쌍봉사에서 선법을 전하였고 그의 제자인 징효대사(澄曉大師)가 사자산문을 열었다. 신라 말인 800년대 초에 세워진 것으로 보이는 쌍봉사는 기록에 의하면 혜철스님이 839년에 하안거를 지냈으며 855년에는 철감선사가 이곳에 주석한 걸로 되어 있어 최소한 839년 이전에 세워졌을 것으로 보이나 누구에 의해 창건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고려시대에는 무신정권의 지배자였던 최충헌(崔忠獻 : 1149 - 1219)의 손자인 만전(萬全 : 속명 - 최항(崔沆) :?-1257)이 송광사의 2대 국사인 진각국사의 제자가 되어 이 절에 머물렀다고 한다. 그래서 고려시대까지는 절의 규모가 상당했으며 조선시대 말인 정조대왕 때의 보수기록에도 집 칸수가 400여 칸에 이른다는 기록이 있는 걸로 보아 아주 큰절이었음을 알 수 있다.

  지금은 목탑양식의 대웅전과 극락전, 명부전과 요사채 등만 남아 있어 옛적의 번창함을 찾을 수는 없다. 쌍봉사에 들렀을 때 절집만 휘돌아 보고 가는 경우가 많다. 절 뒤쪽의 대나무 숲을 돌아 약 200m쯤 올라가면 국보와 보물로 지정되어 있는 철감선사탑과 탑비가 나타난다. 이 사리탑과 탑비를 세심하게 살피지 않고는 쌍봉사에 가 본적이 있다는 말을 해서는 안 된다고 할 정도로 귀중한 작품이다. 우리 조상들의 돌 다루는 솜씨와 예술성, 미적인 안목과 승화된 피안의 세계를 함께 감상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게 되기 때문이다.

 

나. 불에 타버린 쌍봉사 목탑

  쌍봉사의 해탈문을 들어서면 곧바로 알맞게 솟은 아담한 규모의 3층 목조건물이 맞아준다. 지금은 이 목탑형식의 건물에 대웅전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지만, 뒤쪽에 규모가 작아진 듯한 극락전이 있는 것으로 보아 과거에는 탑의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여기에는 좌우에 제자들인 가섭존자와 아난존자가 협시한 목조 석가모니불이 모셔져 있다. 진경시대라 불리는 조선 영․정조 때의 목조작품으로 작지만 전체적인 균형 감각이 돋보이며 부드러운 모습을 하고 있다.

  이 건물은 안타깝게도 1984년 불에 타 버려 과거의 고증대로 새로 지어졌으며 불타기 전에는 팔작지붕이었는데, 지금은 사모지붕을 올려놓았다. 민흘림 둥근기둥의 한 칸짜리 건물로 밖에서 보기에는 3층이지만 안쪽은 통층으로 되어있으며, 불타기 전에는 법주사의 팔상전과 함께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중요한 가치를 지닌 목탑양식의 건물이었다.

  대웅전의 앞뜰에는 구멍 뚫린 작은 돌기둥이 두 개 놓여 있는데, 대부분의 절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으로 괘불지주라 부른다. 이것은 절집의 산문 밖에 있는 당간지주와는 달리 야외법회를 할 때 두루마리그림인 괘불탱화(卦佛幀畵)을 걸어 놓고 예불을 올리기 위해 만들어 놓은 나무기둥의 받침대 역할을 하는 것이다. 대웅전을 돌아 극락전을 향하면 큼직한 돌들을 정교하게 다듬어 쌓은 석축에 눈길이 머문다. 그리고 그 가운데로 작은 계단이 있어 극락전으로 조심스럽게 발길을 할 수 있도록 하여 놓았는데, 한참 번창하여 절의 위세를 떨치던 과거를 회상할 수 있는 유물이다. 그 돌과 돌의 연결선들이 서로 엇물려 몬드리안의 그림을 생각나게 하고 있어 현대 추상화에서 느껴지는 조형감각이 떠올려진다.

 

다. 옛 영화의 흔적이 엿보이는 극락전(極樂殿)

  극락전(문화재자료 제66호)은 어딘지 모르게 조화를 잃고 있는데, 그 까닭은 큰 건물을 작게 줄이다 보니 일어난 현상이라고 한다. 과거에는 최소 5칸 이상의 규모를 지닌 큰 건물이었으나 지금의 앞면 3칸, 옆면 3칸의 규모로 줄이면서 옛 건물의 부재들을 사용하였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극락전에 모시는 부처는 서방세계인 극락을 관장하는 아미타불(阿彌陀佛)이라고 하는데, 무량수불(無量壽佛)이라고도 부르며 협시보살로 관세음보살과 문수보살을 거느리고 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이라는 우리가 흔히 외는 염불이 바로 극락세계로 가게 해 달라는 바람을 담아 이 두 분을 부르는 것이다. 극락전의 지붕은 여러 개의 공포로 장식한 맞배지붕이고 배흘림기둥을 부분적으로 사용하고 있어 주심포형식에서 다포형식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건물이다.

 

라. 역동적인 목조금강역사상(木造金剛力士像)이 있는 명부전(冥府殿)

  명부전은 지장보살(地藏菩薩)을 모시는 곳으로 이 분은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극락왕생하고 난 후, 자신도 극락에 들겠다는 서원을 세우고 중생을 극락으로 인도하는 살신성인의 정신을 가진 보살이다. 지장전, 시왕전 등으로도 불리며 주로 불교식의 제사를 지내는 곳이기도 하다. 이곳의 목조 시왕상과 금강역사상은 그 새김솜씨와 균형 감각이 상당한 수준이어서 살펴볼만하다. 움직임이나 비례가 알맞고 역동적인 움직임을 잘 표현한 작품이다. 조선시대의 불교조각은 삼국과 남북국, 고려시대에 비해 수준이 떨어지는 편인데, 이곳의 시왕상은 빼어난 새김솜씨를 자랑하고 있다. 최근에는 극락전 왼편에 새로 지은 명부전으로 옮겨 모셔놓았다. 본래의 명부전은 맞배지붕에 기둥 위에만 포작을 올리고 민흘림 둥근기둥을 사용하고 있는 주심포형식의 목조건물이다.

 

마. 쌍봉사 철감선사탑(雙峰寺 澈鑒禪師塔, 국보 57호)

  쌍봉사의 대웅전 왼쪽으로 난 길을 따라 대나무 밭을 끼고 200m 정도 산길을 오르면 철감선사탑과 탑비가 모습을 드러낸다. 이 승탑은 우리나라 승탑들 중에서도 가장 섬세하고 아름다운 조각품이며 정교하면서 역동적이다. 단단한 화강암을 가지고 어떻게 저런 섬세한 조각을 할 수 있을까 싶은 작품일 뿐만 아니라 예술가로서의 풍부한 감성과 날카로운 감각까지를 엿보여 준다. 불교적 세계관에 의한 극락세계를 현실 속에 표현한 이 승탑은 그 당시 사람들의 이상세계에 대한 생각을 나타내주는 좋은 예이면서 현실적인 이상세계의 단면도 함께 나타내고 있다.

  철감선사의 속명은 박도윤(朴道允, 798~868)으로 신라 원성왕 4년 황해도 봉산에서 출생하여 전라북도 금산사 근처에 있는 귀신사에서 화엄경을 배우고 헌덕왕 17년(825)에 중국으로 건너간다. 당나라의 남전 보원에게 법을 받고 문성왕 9년(847)에 귀국하여 풍악산에 잠깐 머물렀다가 쌍봉사로 옮겨왔으며 이곳에서 크게 선풍을 일으켰다. 경문왕 8년(868)에 입적하자 철감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탑의 이름은 징소라 하였다. 기본적으로 팔각형으로 구성된 이 승탑은 기단부에서부터 연결되는 돌마다 안오금을 주어 기울거나 흔들림이 없도록 배려했고, 각부에 돋을새김한 여러 동물이나 신화 속의 인물들 또한 섬세한 새김 이외에도 각기 나름의 독특한 움직임을 취하도록 하여 변화를 준 것은 감탄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바닥돌 위의 아래받침돌은 두 겹의 팔각받침 위로 원형에 

가까운 구름모양을 하고 있으며 이 구름 사이로 세 마리의 용이 서로 다른 각도에서 바라본 모습으로 부분부분 몸체를 드러내고 있다. 그 위로 구름모양의 기둥을 세우고 여덟 마리의 힘찬 움직임을 가진 사자들을 수문장으로 돋을새김해 놓았다. 팔각이긴 하나 부드러운 흘림을 가진 3단의 괴임에 얹어진 가운데받침돌에는 안상을 두고 특이한 모습을 가진 새들을 새겨 놓았다. 이 가운데받침돌 위에서 사리를 모시는 몸돌을 받치고 있는 위받침돌의 앙련은 정말 잘 살펴보아야 한다. 정교한 좌우대칭 속에 파격이라고 불리는 극적인 변화를 추구하는 우리 조상의 미적 정서가 은연중에 드러나 있는데,

거의 완벽에 가까운 열여섯 개의 겹 연꽃잎 중 단 하나에만 살짝 비틀림을 주어 변화를 꾀하였다. 정교하고 치밀한 작업을 하던 장인이 갑작스럽게 끼를 이기지 못한 듯도 하고 너무 지루해서 살짝 꼬아버린 것일까? 섬세한 관찰력을 가진 사람에게만 살며시 ‘너무 정교하기만 해도 재미없는 것이야’라고 말하는 것 같다.

이 연꽃받침 위로 멋들어진 책상다리를 한 기둥과 안상을 새기고 그 안에 음악을 연주하는 가릉빈가(伽陵頻迦)라는 신화 속의 반인반조를 새겨놓았다. 몸돌에는 극락의 4대문을 지키는 사천왕과 음악을 연주하는 천녀 둘, 그리고 문고리 장식을 가진 문을 둘 돋을새김해 놓았다. 이 새김들은 천이백여 년의 세월 속에서도 힘차고 또는, 부드러운 움직임과 섬세함을 잃지 않고 있다. 날렵한 반전을 지닌 지붕돌에는 기와 하나하나에 이르기까지 무늬를 새기고 밑부분에는 서까래와 부연을 새겨 놓아 당시 목조건물의 기와지붕을 거의 그대로 옮겨놓은 듯하다. 더구나 기와의 막새에 연화문까지 일일이 새기는 정교함은 섬세함의 극치를 과시한다. 더군다나 지붕 밑의 공포 부분에는 비천을 아로새겨 놓아 천상세계를 표현하려는 의지를 마지막까지 보여준다. 다만 지붕 위를 수놓을 머리장식이 없어져 버려 안타깝다. 이 승탑의 꼭대기 부분에 연곡사 북부도의 가루라(迦樓羅)라고 하는 금시조(金翅鳥)가 새겨진 화려한 머리장식을 갖다 붙이면 완벽하고 절묘한 작품이 될 것이다.

 

바. 철감선사탑비의 귀부와 이수

  보물 제170호로 지정되어 있는 쌍봉사철감선사탑비(雙峰寺澈鑒禪師塔碑)는 비록 비문이 새겨진 비신(碑身)이 없어져 사료적인 가치가 적기는 하지만 철감선사탑에 못지않은 작품이다. 곧 살아 움직일 것만 같은 거북이를 새긴 귀부(龜趺)라는 이름의 받침돌과 용들이 꿈틀거리며 여의주를 탐내고 있는 지붕돌인 이수(螭首)만으로도 당시 우리나라 석공들의 예술성과 문화적 깊이를 느끼게 해준다. 받침돌의 거북이는 오른쪽 앞발 하나를 쳐들고 곧 걸어 나갈 듯 한 모습으로 입에는 여의주를 물고 있다. 또 각 부분의 비례가 알맞아 전체적으로 안정감이 있다. 이 거북이의 등위로 비신을 세우고 그 위에 지붕돌을 얹게 되어 있으나 불행하게도 지금은 찾을 수 없다. 비신 위에는 아직 용이 채 되지 못한 이무기들이 구름 속에서 서로 엉켜 있으며 상상의 동물인데도 극적인 동세와 사실적인 표현은 감탄을 자아낸다.

 

 

3. 태안사(泰安寺)

 

가. 동리산문(桐裏山門)이 열린 절집

  은빛 모래와 하늘이 비치는 맑은 물의 섬진강을 끼고 곡성읍에서 국도 17호선을 따라 16km 정도 가다보면 섬진강과 보성강이 합쳐지는 압록유원지가 나온다. 여기서 구례방향이 아닌 죽곡 쪽으로 6Km 정도 가면 죽곡면 원달리에 위치한 태안사에 다다를 수 있다. 또는, 남해고속도로의 석곡인터체인지에서 내려와 보성강을 따라가다 태안사로 접어들 수도 있는데 이 길은 차량통행도 적고 강가를 따라 난 길이어서 나름의 운치가 있다.

  태안사는 신라 경덕왕 1년(742)에 처음 세우고 산 이름을 동리, 절 이름을 대안(大安)이라 하였다. 산 이름을 동리라 한 까닭은 산의 형상이 봉황과 같음에서 연유한 것이며, 절 이름을 대안이라 한 이유는 절의 위치가 길에서 멀리 떨어져 속세의 사람이 드물 뿐만 아니라 계곡이 깊고 그윽하여 스님들이 편안하게 머무르며 수도에 전념할 수 있기 때문이라 한다. 훗날 태안이라고 바뀐 것은 대와 태가 통용될 뿐 아니라 편(便)하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 까닭이다.

  태안사는 동리산문을 개창한 혜철선사가 주석하면서부터 크게 이름을 떨치게 되었다. 혜철선사는 중국의 서당 지장(西堂 智藏)에게 법을 받고 귀국하게 되는데, 이때가 문성왕 2년(839)이니 이때부터 845년 사이에 동리산문을 개창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 후 고려 태조 때에는 광자대사(廣慈大師) 윤다(允多)가 132칸의 전각을 짓는 등 대규모의 중창불사를 하여 규모 있는 절집이 되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효령대군의 원당(願堂)이 되어 국가적인 보호를 받았는데, 효령대군은 태안사에 상당 기간 머물렀으며 현재도 대바라같은 관련유물이 남겨져 있다. 이것은 효령대군이 세종과 왕비, 왕세자 등의 수명과 복을 빌기 위하여 만든 것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바라이다. 이 절집은 그 이후에도 잘 보전되어 오다가 1950년 한국전쟁으로 대웅전을 비롯한 15채의 건물이 불에 타 버렸다. 일주문과 능파각만 남고 거의 폐허가 되다시피 한 절집은 1969년 이후 조금씩 다시 세워져 오늘의 모습을 갖추었다.

 

나. 수려한 계곡 속의 능파각과 일주문

  주차장에서 곧바로 계곡을 향하면 바위 사이로 휘돌아 내리는 맑은 물줄기와 바위들로 인해 계곡의 풍광이 수려해진다. 그곳에 능파(凌波)란 이름을 지닌 다리와 문의 역할을 겸하는 건물을 세워놓았다. 그전부터 있었다고는 하나 조선 영조 43년(1767)에 지금의 모습으로 지어진 것으로 보이는 이 건물은 그 후 여러 차례 보수하여 오늘에 이른다. 앞면 3칸, 옆면 1칸인 이 다리는 계곡의 양쪽에 석축을 쌓고 통나무로 연 결한 다음, 그 위에 둥근기둥을 세우고 맞배지붕을 올려놓았다. 지방유형문화재 82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주심포 양식이고 여러 가지 동물모양을 조각한 부재로 화려한 장식을 한 특이한 용도의 건물이다.

  일주문은 조선 숙종 9년(1683) 각현선사가 지금의 모습으로 다시 지은 후 1917년과 1980년에 보수하였다. 거의 다듬지 않은 굵은 둥근기둥을 세우고 그 기둥의 앞뒤로 보조기둥 역할의 팔각기둥을 다시 세워 놓았다. 다포계의 화려한 공포로 장식을 하고 맞배지붕을 올렸으며 천정에 용의 장식까지 곁들인 이 일주문에는 ‘동리산 태안사’라고 힘차게 쓰인 현판이 걸려 있으며 지방유형문화재 83호로 지정되어 있다.

 

3. 조촐한 부도전에 놓인 광자대사탑과 탑비

  일주문을 막 지나면 오른쪽에 조촐한 부도전이 있는데, 여기에 대안사광자대사탑(大安寺廣慈大師塔)이라 불리는 승탑이 있다. 고려 초의 고승이며 태안사의 2대조사인 광자대사는 신라 경문왕 4년(864)에 출생하여 고려 예종 2년(945) 82세로 입적하였는데, 태안사를 크게 중창한 분이기도 하다. 이곳에 승탑과 함께 있는 탑비를 세운 때가 고려 광종 원년(950)이므로 이 승탑도 그 무렵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보이며 보물 274호로 지정되어 있다.

  팔각원당형의 이 승탑은 바닥돌에 부드러운 몰딩을 준 2단의 괴임을 만들어 당초문을 새긴 팔각의 아래받침돌을 받치고 있다. 이 아래받침돌의 당초문을 새긴 윗부분에는 각 면마다 2개씩의 안상을 새겼고 점차 부드러운 곡선을 이루면서 기둥돌을 받치는데, 이 부분에 열여섯 개의 덮는 연꽃잎을 우아하게 새겨 놓았다. 안상이 새겨진 나직하지만 자연스러운 가운데받침돌 위에 놓인 위받침돌에는 꽃잎 안에 또 꽃무늬를 새긴 받치는 겹 연꽃잎으로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고 2단의 괴임을 두고 그 위에 사리를 모시는 몸돌을 올려놓았다. 몸돌 역시 팔각으로 전후 양면에는 향로 모양이 새겨져 있고 좌우로 사천왕상이 돋을새김 되어 있다. 지붕돌은 서까래와 부연이 새겨져 있는 아랫부분이 너무 치켜 올라간 듯한 느낌을 준다.

  지붕돌의 윗부분에는 여덟 개의 우동마루 사이로 기왓골이 새겨져 있고 추녀에 이르러 암막새 수막새까지 깔끔하게 새겨 놓았으나 반전이 너무 강하다. 꼭대기 부분은 거의 완전하게 보존되어 앙화, 복발, 보륜, 보주 등이 섬세한 새김솜씨를 자랑하며 차례로 놓여 있다. 이 승탑은 상하의 비례가 우아하고 조화가 있지만 섬세한 새김에 비하여 안정감과 힘찬 느낌은 덜하다.

  승탑 곁에 놓여 있는 탑비는 귀부와 이수만 남아 있는데 비신은 근세에 파괴되어 일부 파편만 남아 있으나 거의 판독이 불가능하다. 다행히 『조선금석총람 해동금석원』이란 책에 비문이 수록되어 있어 대강 그 내용을 파악할 수 있다. 이 금석문에는 주로 광자대사의 행적과 탑비를 세운 시기 등에 대해 밝혀놓았다. 거북이 모양의 귀부는 약간 고개를 비튼 듯한 짧은 목에 용의 얼굴을 하고 있으며 사실적인 표현이 두드러진다. 거북이 등위의 비신 받침돌에는 구름무늬가 새겨져 있고 바로 그 위에 머릿돌인 이수가 놓여 있는데, 사방에 구름 속을 노니는 용의 머리가 돌출되어 있는 머릿돌의 중앙에는 금시조가 날개를 활짝 편 모습으로 돋을새김 되어 있어 독특한 모습을 보여준다. 고려 초기의 작품으로 보물 275호 지정되어 있다.

 

라. 오래 묵은 동백과 적인선사조륜청정탑(寂忍禪師照輪淸淨塔)

  태안사의 대웅전 뒤쪽의 햇살 따사로운 언덕배기에 자리를 튼 적인선사조륜청정탑은 동리산문의 개창조인 적인선사 혜철의 사리를 모신 승탑이다. 높직하게 쌓은 돌계단을 올라 통나무를 원형으로 만든 배알문을 들어서면 토담에 둘러싸인 승탑이 편안하게 가슴에 안기어 온다.

  이 승탑 역시 팔각원당형으로 기단은 아래․가운데․위 받침돌로 나뉘는데, 아래받침돌은 위가 좁고 아래가 넓은 사다리꼴 모양을 하고 있으며 면마다 사자상을 새겨놓았다. 가운데받침돌은 그 높이가 매우 낮고, 면마다 가늘고 길게 안상을 새겼으며 위받침돌은 받치는 연꽃을 우아하게 새겨 놓았다. 몸돌은 낮은 편이지만 온화한 기품을 지니고 있으며 앞․뒷면에 문짝 모양을, 옆면에는 불법을 지키는 수호신인 사천왕상을 섬세하게 돋을새김 하였다. 지붕돌은 널찍하고 알맞게 반전되어 있으며 밑면에는 서까래와 부연을 새기고 윗면에는 기왓골과 막새기와까지 표현하여 목조건축의 지붕양식을 사실적으로 나타냈다.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으로 앙화, 복발, 보륜, 보주 등이 차례로 잘 남아있으며 전체적으로 섬세함보다는 유연한 균형감을 보여주는 승탑이다. 동백이 흐드러지게 피는 햇살 좋은 날이며 이 승탑이 지닌 본래의 너그러운 품위가 더욱 돋보인다.

 

 

4.  연곡사(燕谷寺)

 

가. 제비골짜기에 세워진 절집

  연곡사는 전남 구례군 토지면 지리산(智異山) 피아골에 자리한 절집으로 조계종 제19교구 본사 화엄사의 말사이다. 절은 현재 남아 있는 유물들로 보아 신라 말에서부터 고려 초에 걸쳐 가장 번성한 것으로 추측되지만, 창건에 대한 역사적 기록뿐만 아니라 조선 초기까지의 기록도 찾을 수 없다. 다만 1530년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등장하며 근대에 들어와서는 1895년 무렵에도 여전히 왕가의 신주목을 봉납하는 곳이었음을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다.

  정병덕(鄭秉德)의 『지리산화엄사사적』(1924)에 연곡사에 대한 기록이 보인다. 여기에 의하면 신라 진흥왕 때의 스님인 연기조사(緣起祖師, 혹은 烟起祖師)가 그의 만년에 세상을 피해 살기 위한 장소로 창건했다 한다.

또 조선 후기 연곡사의 중창 주였던 소요 태능도 그의 시에서 이 절이 연기조사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읊고 있다. 그러므로 화엄사를 창건했던 연기조사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보아야 하며 화엄종 계열의 절집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다가 신라 말쯤 선종의 참선 도량으로서 독자적 위치를 확보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현각선사탑비와 동부도, 북부도, 삼층석탑이 모두 신라 말에서 고려 초에 조성되어 선종계통의 불교문화가 꽃을 피운 흔적을 안고 있기 때문이다.

  『난중잡록』에 의하면 정유재란 때인 1598년 왜적에 의해 지리산의 쌍계사․칠불사․연곡사 등 절집을 불에 타버렸다는 기록이 있다. 이때 불타버린 연곡사를 소요 태능(逍遙太能, 1562~1649)이 중창했고, 영조 21년(1745)에는 밤나무로 만드는 왕가의 신주목(神主木, 위패목)을 봉납하는 곳으로 선정되었다. 그래서 연곡사 주지가 곧 도제조(都提調)로 임명되자 비로소 지방관과 향리들의 경제적 침탈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이후 신주목 봉납의 폐해로 스님들이 절을 버리고 떠나 폐사되었다. 그 후 1924년 심우암이란 이름으로 다시 세워졌다가 625때 피아골 전투로 인해 다시 폐사되었다. 그 뒤 1965년에 소규모의 대웅전이 요사를 겸해 세워지면서 점차 규모를 갖추게 되었고 1983년에 대적광전과 관음전을 새로 지었다. 이어 1994년 종지(宗知)스님이 주석하면서 요사를 늘려짓고 1995년1995 일주문을 세우는 등 옛 모습을 되찾아 가고 있다.

 

나. 연곡사 동부도(燕谷寺 東浮屠, 국보 53호)

  연곡사 동부도는 도선국사의 승탑라고 전해지기도 하나 확실하지 않으며 일제 강점기 때 일본으로 건너갈 위기에 처하기도 하였다. 하대신라 때의 작품으로 보이는 이 승탑은 아주 정교한 새김과 전체적으로 아담하고 안정된 느낌을 주는 작품으로 철감선사탑에 견줄 만하지만 힘차고 동적인 변화가 약간 못 미친다. 기단부의 아래받침돌은 아랫부분에 구름에 휩싸인 용을, 위에는 사자모양을 새겨 놓았다. 가운데받침돌에는 둥근 테두리를 두르고, 부처님의 설법을 들으러 몰려든다는 팔부중상을 새겼다. 위받침돌 역시 두 단으로 나뉘어 아래에는 받치는 겹 연꽃모양을 유연하게 새기고 위에는 화려한 기둥사이에 안상을 두고 그 안에 가릉빈가를 새겨두었다.

  몸돌의 각 면에는 테두리를 두르고 그 속에 향로와 사천왕상을 얕게 돋을새김해 놓았다. 지붕돌에는 서까래와 기와의 골을 새겼으며, 기와를 끝맺음할 때 두는 막새기와까지 표현할 정도로 수법이 정교하다. 꼭대기 부분에 화려한 머리장식이 거의 그대로 남아있어 머리장식이 없어져 버린 다른 팔각원당형 승탑들의 모습을 유추해 볼 수 있다.

꽃 모양을 아로새긴 앙화로 받침돌을 삼고 장식이 있는 띠를 두른 다음 다시 꽃 모양의 장식이 있는 보륜을 두 번 둘렀다. 그 위에 날개를 활짝 피고 하늘을 향해 막 비상하려는 금시조를 얹어놓았는데, 머리 부분이 파손되어 안타까움을 느낀다. 그 위에 다시 보개를 놓고 보주를 올려놓은 모습이다.

 

다. 연곡사 동부도비(燕谷寺 東浮屠碑, 보물 제153호)

  동부도 곁에 있는 이 비는 비신을 잃고 귀부와 이수만을 남기고 있다. 귀부와 이수의 조금 작은 편이며 용의 머리를 한 받침돌의 머리는 절단된 것을 복구한 것이어서 전체적으로 균형이 맞지 않다. 받침돌을 이루는 거북의 모습은 네 다리를 사방으로 쭉 뻗고 엎드린 모습을 하고 있으며 용의 모습으로 많이 변화된 느낌을 준다. 거북의 등에 날개 모양의 무늬를 돋을새김해 놓은 것이 특이하며 등 중앙에 비를 끼우도록 마련된 비 좌(碑座)에는 구름무늬와 연꽃무늬가 장식되어 있다. 머릿돌은 용무늬를 생략하고 구름무늬만을 새겼으며, 꼭대기에는 불꽃에 휩싸인 보주(寶珠)를 새겨놓았다.

 

라. 연곡사 북부도(燕谷寺 北浮屠, 국보 제54호)

  연곡사 동부도에서 동쪽 방향으로 약간 떨어진 곳에 있는 북부도는 기록이 전혀 없어 어떤 스님을 기리기 위한 것인지 알 수 없으며 고려 초기에 만들어진 것이 아닐까 추정하고 있을 뿐이다. 동부도를 모방하여 그대로 만든 듯해 보이며 보통 팔각원당형 승탑과 함께 세워지는 탑비가 없다.

  이 승탑은 네모난 바닥돌과 그 위에 구름무늬를 얕게 새긴 팔각의 아래받침돌을 놓았다. 그런데 아래받침돌의 아랫부분은 바닥돌과 한 돌로 윗부분과 돌의 재질이 다르다. 이 윗부분의 돌에는 덮는 연꽃모양이 새겨져 가운데받침돌을 받치고 있다. 가운데받침돌 각 면에는 안상 안에 새 모양의 장식이 새겨져 있다. 이 위로는 북부도과 거의 비슷한 모습을 보여주는데, 특히 위받침돌, 몸돌, 지붕돌, 꼭대기 부분의 머리장식까지도 거의 닮음 꼴이다.

 

마. 연곡사 삼층석탑(燕谷寺 三層石塔, 보물 제151호)

  연곡사 삼층석탑은 기단부가 3단으로 되어 있는 특이한 삼층석탑인데, 바닥돌에서 바로 낮은 1층 기단이 조성되어 있다. 기단의 각 층에는 갓기둥과 버팀기둥을 돋을새김해 두었으며 여러 개의 돌을 사용하였다.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하나의 돌로 되어 있으며 몸돌에도 갓기둥이 새겨져 있다. 지붕돌의 계단받침은 4단이며 가락국수마루의 흐름이 경쾌하고 반전도 그리 가볍지 않다.

  맨 위의 기단이 상당히 넓어 전체적으로 안정감을 주며 온화한 상승감을 느끼게 하는 탑이다. 신라 말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측되며 1967년 해체하여 수리할 때 이층 기단 안에서 동조여래입상 1구가 발견되었다.

 

바. 연곡사 서부도(燕谷寺 西浮屠, 보물 제 154호)

  연곡사의 승탑들 중 서쪽에 있어 서부도라 불리는 이 승탑은 소요대사의 사리를 모셔두고 있는 것으로 되어있다. 상대석에 ‘소요대사지 탑 순치육년경인(逍遙大師之塔 順治六年庚寅)’이라는 12자가 오목새김되어 있는 까닭이다. 조선시대 효종 원년(1650)에 해당하는 것으로 소요대사탑이라 불리지 않고 서부도라 불리는 이유는 고려시대 작품에 나중에 누군가가 추가했을 것이라는 설이 있기 때문이다. 소요대사탑이라면 조선시대의 팔각원당형 승탑으로는 보기 드문 수작이다.

  팔각원당의 기본형을 따르고 있는 이 승탑은 팔각의 바닥돌 위에 3단으로 나누어진 기단을 두고 역시 팔각의 몸돌을 올려놓았다. 아래받침돌은 구름무늬를 새겼고 거의 둥근 모양의 배가 부른 가운데받침돌에는 연꽃무늬를 새겨놓았다. 위받침돌에는 받치는 연꽃문양을 돋을새김 하였으며 그 위로 몸돌을 받치기 위한 두툼한 괴임을 둔 점이 독특하다. 몸돌에는 한 면에만 문짝 모양을 새기고, 다른 곳에는 팔부중상을 상당히 높게 돋을새김해 두었다. 지붕돌은 귀퉁이마다 큼지막하게 귀꽃장식을 얹어두었으며, 꼭대기의 머리장식으로 앙화, 보륜, 보개가 비교적 완전하게 남아 있다. 동․북부도에 비해 새김솜씨는 섬세하지 않으나 전체적인 흐름이 우아하고 세련된 작품이다.

 

사. 연곡사 현각선사탑비(燕谷寺玄覺禪師塔碑, 보물 제152호)

  임진왜란 때 비신이 없어졌다고 전하는 비로 지금은 거북받침돌과 머릿돌만 남아 있다. 상당한 크기와 힘찬 움직임을 보여주는 거북받침돌은 부리부리한 두 눈과 큼직한 입을 가지고 있으며 수염을 가진 용의 머리 모양이다. 육각의 새김을 한 등 중앙에는 비를 꽂아두는 부분에 안상(眼象)과 꽃무늬가 새겨져 있다. 머릿돌에는 여러 마리의 용이 서로 얽힌 모습이 새겨져 섬세하게 새겨져 있으며 앞면의 가운데에 현각선사탑비임을 밝혀 놓았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기록을 통해 고려 경종 4년(979)에 만들어진 고려시대 석비임을 알 수 있다.

 

참고 문헌과 사이트

 

한국문화유산답사회, “답사여행의 길잡이 5 전남”, 돌베개, 1995.

최완수, “명찰순례ⅠⅡⅢ”, 대원사, 1994.

정영호, “부도”, 대원사, 1998.

정영호, “한국의 미 15 석등 부도비”, 중앙일보사, 1981.

김진택, “절 그리고 절”, 도서출판 보림, 1997.

혜자스님, “절에서 배우는 불교”, 우리 출판사, 1998.

허균, “사찰장식 그 빛나는 상징의 세계”, 돌베개, 2000.

곽철한, “불교길라잡이”, 시공사, 1995.

이주형, “간다라미술”, 사계절, 2003.

정영호(한국교원대 박물관장, 문화재위원), “한‧중‧일의 부도”

고려대장경연구소 http://www.sutra.re.kr

한국의 석탑 http://doyong.netian.com

디지털한국학 http://www.koreandb.net/

문화재청 http://www.ocp.go.kr/

국립중앙박물관 http://www.museum.go.kr/

 

'한국의 승탑'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승탑의 기원  (1) 2023.05.07
승탑이란?  (3) 2023.05.06
돌에 새긴 하늘나라, 승탑  (1) 2023.05.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