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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림기행

면앙정 송순(免仰亭 宋純, 1493-1583)과 면앙정(免仰亭)

by 햇살과 뜨락 2023. 8. 31.

면앙정 송순(免仰亭 宋純, 1493-1583)

송순의 자(字)는 성지(誠之) 혹은 수초(守初), 호(號)는 면앙정 혹은 기촌(企村), 본관은 신평(新平)이며 시호는 숙정(肅定)이다. 박상의 문인으로 호남시가의 원조이며 김인후, 박순, 기대승, 고경명, 정철, 임제 등 많은 후진을 배출한 시가와 학문의 대가이다.

1493년 현 담양군 봉산면 기곡리 상덕마을에서 태어나 1513년 진사가 되고 1519년 별시문과에 급제, 승문원(承文院) 권지부정자(權知副正字)가 되었고, 세자시강원설서(世子侍講院說書),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 홍문관직제학(弘文館直提學), 대사간(大司諫) 등을 역임하였다. 그 후 1547년 진문사(秦聞使)로 북경을 다녀왔으며 대사헌(大司憲), 이조참판(吏曹參判) 등을 역임하였다. 1552년 면앙정이 세웠는데, 기대승이「면앙정기」를 쓰고 임제가 「면앙정부」를 짓고 임억령, 김인후, 박순, 고경명 등이 영시(詠詩)로써 면앙정삽십영을 지었다. 1562년에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으며 1568년 한성부좌윤이 되었고 이후 의정부우참찬 겸 춘추관사가 되었으나 병으로 귀향, 이후 14년간 향리에 묻혀 유유자적하면서 여생을 보냈다. 1582년 90세를 일기로 별세하였고 담양 구산서원(龜山書院)에 제향되었다.

면앙정은 1524년 세자시강원설서가 되었을 때 고향인 기촌에 면앙정 땅을 마련하였다가 1550년 이기·진창복의 탄핵으로 유배되고, 1552년 유배에서 풀려난 뒤 고향에 머물면서 면앙정을 세웠다고 한다.

 

면앙정(俛仰亭, 지방기념물)

전남 담양군 봉산면 제월리

 

 

  면앙정의 주인은 송순선생이다. 아름드리 참나무를 마주보고 있는 정자의 이름인 면앙은 하늘을 우러르고 땅에 구부려 한줌 부끄러움 없는 삶을 살고 싶다는 굳굳한 선비의 정신을 담고 있다. 선생은 일찍이 과거에 급제하여 급제 60주년에 열리는 '회방연'(回榜宴)을 가질 정도로 장수하신 분으로 중추원부사, 대사헌 등 중앙과 지방의 여러 관직을 두루 거친 후, 나이 들어 이곳에서 후진을 양성하고 마음을 수양하기 위해 이 정자를 세우고 기거하였다.

  회방연 때 박순, 이후백, 임제, 정철 등 제자이자 유학자로 명망이 높았던 분들이 직접 가마를 메고 선생을 모셨다고 하니 학문과 인품, 그리고 덕망이 대단한 분이었다는 짐작을 하게 한다. 이 이야기는 215년 후에 과거시험 문제로 출제되기도 했다. 정자의 오른편 마루에 정조 임금의 어제(御題)가 붙어 있다. 시제는 ‘하여면앙정(荷輿俛仰亭)’이다.

또한 송순은 이 지역의 국문학사에 큰 영향을 끼친 분으로 학문뿐 아니라 문학에도 조예가 깊었으며 백성들의 아픔을 함께 노래했던 현실참여 시인이기도 하였다. 국문가사인 「면앙정가」를 비롯한 많은 한시와 시조 20여 수를 남기고 있는 그는 주로 자연의 아름다움을 노래했지만 거기에 머물러 있지만은 않았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선생은 지식인으로서, 참으로 바른 자세를 갖추었던 분이라 생각된다.

 

날이면 날마다 밤이면 밤마다

포악한 정치와 몹쓸 부역 벌떼처럼 달려든다.

쌀독은 텅 비어 소리를 내고

베틀은 덩그러니 비어 있는데

부뚜막의 가마솥도 다 뺏어 갔다.

지아비는 칼 쓰고 아들은 착고 찬 채 감옥에 갇힌 몸

채찍질에 남은 살갗 썩은 내가 물씬 난다.

인생살이 이 같은데 어이 대체 견딜꼬

차라리 죽어 흙에나 묻히면 좋으련만

송 순 문린가곡(聞隣家哭)

 

  면앙정은 한 칸짜리 방을 드리고 앞면 3칸, 옆면 2칸에 팔작지붕을 얹은 소박한 건물이다. 멀리 담양의 추월산을 뒤로하고 제월봉을 바라보며 앉은 이 정자는 둥근기둥을 사용하였고 지붕 선을 살리기 위해 활주를 세워 놓았다. 소박하면서도 기품이 있는 정자로 들판을 바라다보지 않고 커다란 참나무를 향해 돌아앉아 있는 것이 특이하다. 면앙정 현판은 당대의 명필 성수침(成守琛, 1493-1564)쓴 것이라 하며 처음 있던 정자는 선조 30년(1597) 임진왜란으로 없어지고 효종 5년(1654)에 후손들이 다시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