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머리글
조선중기 사림파(士林派)의 등장
조선은 성리학을 체제 이데올로기로 삼아 성립한 왕조이다. 신유학, 또는 주자학이라 불리기도 하는 성리학은 남송 때 사람인 주희(朱熹, 1130-1200)에 의해 이론체계가 확립된 학문으로 ‘인간의 본성 속에 하늘의 이치가 들어 있다’는 성즉리설(性卽理說)을 명제로 하고 있다. 성리학은 우주 만물이 본연지성인 이와 기질지성인 기로 구성되어 있다고 보는 이기론(理氣論)을 중심으로 하여 인간 존재의 내면적 구조와 본질을 살피는 심성론(心性論), 도덕적 실천 원리와 수양 방법에 관한 수양론(修養論), 정치․사회적 질서의 원리와 방법에 관한 경세론(經世論) 등을 갖추고 있는 학문이다.
조선 중기 등장한 사림파(士林派)는 본래 지방에 근거지를 가지고 있는 중소지주 출신의 유학자들로 중앙정계에 진출하여 본격적으로 성리학 이념을 통해 나라를 다스리려 했던 세력을 가리킨다. 길재(吉再)의 학통을 이은 김종직(金宗直, 1431-1492)이 김굉필(金宏弼), 정여창(鄭汝昌), 김일손(金馹孫) 등의 제자를 배출하면서 그 세력이 커졌으며 15세기 주로 언론, 문필기관의 관직을 통해 정계로 진출하였다. 이들을 사림파라 부르며 훈구세력의 비리를 비판하는 언론활동을 활발히 전개하였지만, 연산군 대에 일어난 두 차례의 사화로 세력이 약화되었다.
이후 16세기 초반 중종(재위 1506-1544) 대에 기묘사림이라고도 하는 조광조(趙光祖, 1482-1519)를 중심으로 하는 사림세력이 재등장한다. 이들은 급진적인 개혁을 추진하다가 훈구세력이 주도한 기묘사화로 인해 크게 어려움을 겪는다. 이후 지방에서 서원과 향약을 토대로 기반을 강화하는데 주력하다가, 16세기 후반 선조(재위 1567-1608)의 즉위를 계기로 중앙정계에 대거 진출하여 정권을 잡는다. 이후 조선은 사림들의 나라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 호남사림의 진출과 활약
16세기 중반 사림정치의 막이 열리면서 호남사림이 대거 중앙정계에 진출한다. 이들은 훈구세력의 비리척결과 서정개혁을 단행하는데 앞장서고 성리학의 학문적 연구에 일조하며 걸출한 문인들도 많이 배출한다. 사림정치는 어느 한 기간, 몇몇 인물에 의하여 이룩된 것이 아니고 오랜 세월에 걸쳐 언론과 학문, 교육, 향촌활동 등에서 추구한 제 나름의 몫과 구실이 세대와 세대, 학파와 학파, 재조와 재야를 넘어서 진행되었던 결과였다. 당시의 사림들은 가문이나 스승과 제자의 관계는 물론, 지역의 경계에 갇히지 않고 교류하였다. 그런 까닭으로 지방에서 먼저 진취적인 학풍의 힘이 발휘되고 그것이 중앙으로 이어졌다. 그 과정에서 호남사림은 진취적이고 다양한 역할을 해냈다.
이때 활약한 인물들로는 송흠(宋欽, 1459-1547), 박상(朴祥, 1474-1530), 이항(李恒, 1499-1576), 송순(宋純, 1493-1583), 임억령(林億齡, 1496-1568), 김윤제(金允悌, 1501-1572), 김인후(金麟厚, 1510-1560), 양산보(梁山甫, 1503-1557), 유희춘(柳希春, 1513-1577), 박순(朴淳, 1523-1589), 기대승(奇大升, 1527-1572), 정개청(鄭介淸, 1529-1590), 고경명(高敬命, 1533-1592), 정철(鄭澈, 1536-1593), 백광훈(白光勳, 1537-1582), 이발(李潑, 1544-1589), 임제(林悌, 1549-1587) 등이 있다.
호남성리학은 야은 길재(冶隱 吉再, 1353-1419)로 부터 비롯되어 김숙자, 김종직,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등으로 이어지는 학맥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다. 또한 김굉필의 제자인 김안국(金安國)의 『소학(小學)』 보급활동이 상당한 영향을 끼치면서 이 지역 사림들에 의해 받아들여져 활발하게 발전하였다. 이를 토대로 16세기에 들어서면서부터 이항(李恒, 1499-1576), 김인후(金麟厚, 1510-1560), 기대승(奇大升, 1527-1572) 등의 성리학자에 의해 나름의 학문적 특색을 보이게 된다. 즉 소학을 기반으로 하여 도덕정치를 주장하는 도학적 정치사상과 주기론적인 경향성을 강하게 드러낸다.
이항은 전라북도 태인출신으로 서경덕(徐敬德)과 함께 주기론적인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다. 이에 반해 장성출신인 김인후는 주리론적인 입장에 섰으며 서경덕의 학문이 사색에 빠져 있음을 비판하였다. 또 이황과 조식과는 달리 『중용(中庸)』의 성(誠)을 중요시하였다. 광주출신인 기대승은 퇴계와 8년간에 걸친 그 유명한 '사단칠정논쟁(四端七情論爭)'을 벌이게 된다. 이에 따르면 기대승은 퇴계의 이기이원론과 달리 이와 기는 떨어질 수 없다는 점에 중점을 두고 기만이 운동성을 갖는다고 하여 이황이 주장한 이의 작용성과 운동성을 부정하였다. 또 '칠정 속에 사단이 있는 것(七情包四端)'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기대승의 학설은 김인후와의 많은 토론 끝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이며 퇴계로 하여금 자신의 학설에 수정을 가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호남성리학의 이런 전통은 불행하게도 나름의 학파로 발전하지 못하고, 율곡 이이(栗谷 李珥, 1536-1584)에 의해 기호학파로 계승하였다.
이때 시가문학도 큰 발전을 보인다. 많은 가사와 시조들이 탄생하고, 그에 따라 뛰어난 문장가들도 함께 등장하는 것이다. 박순, 백광훈, 최경창(崔慶昌, 1539-1583) 등이 당시 호남지역 출신의 문장가들이었으며, 이들과 함께 송순, 임억령, 양산보, 김인후, 고경명, 임제, 김인후, 임억령, 정철 등도 이곳을 시가문학의 산실로 만든 주인공들이다. 가사로는 송순의 면앙정가(俛仰亭歌)를 시작으로 정철의 성산별곡(星山別曲), 사미인곡(思美人曲), 속미인곡(續美人曲) 등이 이곳에서 탄생하였으니 우리나라 가사문학의 중심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흐름은 윤선도(尹善道, 1587- 1671)의 산중신곡(山中新曲),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로 이어지고 미미하기는 하지만 조선후기까지도 꾸준히 그 전통을 이어가게 된다.
이렇게 활발하던 호남사림은 정여립 모역사건이라 불리는 기축옥사(己丑獄死, 1589)로 크게 위축당하고 만다. 정여립과 개인적 친분을 가졌던 사람들과 동인계 호남사림은 혹독한 피해를 당했고 정철과의 악연으로 억울하게 희생된 사람들도 많았다. 역모인가, 조작인가로 말도 많은 이 사건은 붕당정치의 미숙성이 빚어낸 참사였으며 왕권을 견제하려는 호남사림의 사상적 배경이 선조의 비위를 건드린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호남지역에 꽃피워졌던 문학의 향기와 깊이 있는 학문 연구의 전통은 거의 명맥을 잃고 말았다.
3. 이기론(理氣論)과 사단칠정(四端七情)
성리학은 자연·인간·사회의 존재와 운동을 이와 기의 개념으로 설명한다. 기가 모이고 흩어지는 것에 의해 우주 만물이 생성·소멸하며, 그런 점에서 기는 만물을 구성하는 요소이다. 모든 사물은 기에 따른 현상적 차별에도 불구하고 이라는 보편적 원리·법칙에 따라 존재하고 운동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이기론은 '성즉리'라는 명제에서 단적으로 드러나듯이 성리학의 심성론과 긴밀하게 결합되어 있으며 이기론에 바탕을 둔 인간 이해는 '본연지성'(本然之性)과 '기질지성'(氣質之性)의 개념을 중심으로 하는 심성론으로 체계화되었다.
4단은 측은지심(惻隱之心), 수오지심(羞惡之心), 사양지심(辭讓之心), 시비지심(是非之心)으로 각각 인·의·예·지의 실마리가 된다. 맹자(孟子)의 성선설에서 기인한다. 칠정은 『예기(禮記)』예운(禮運)편에 나오는 희(喜)·노(怒)·애(哀)·구(懼)·애(愛)·오(惡)·욕(欲)을 가리키는 것으로 사람이 가진 감정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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