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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의 문화재 (남구)

필문 이선제 부조묘(畢門 李先齊 不祧廟, 민속자료 제7호)

by 햇살과 뜨락 2023. 6. 11.

필문 이선제 부조묘(畢門 李先齊 不祧廟, 민속자료 제7호)

광주 남구 구만산길 34(원산동)

  필문 이선제 부조묘는 남구 원산동 만산마을에 있다. 부조묘란 나라에 큰 공을 세운 사람을 기리어 신주를 영원히 제사 지내도록 건립한 사당이다. 필문 이선제 선생의 업적을 기리고 공훈을 후세에 알리기 위해 필문 이선제 부조묘는 지금의 포충사 뒤쪽 산기슭에 있으나 원래 위치에서 50 여 미터 왼쪽으로 옮겨온 것이다. 무등산자락의 아름다운 풍광을 끼고 있어 고즈넉해 보이면서도 넉넉해 보이는 필문 이선제 부조묘는 지나치는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한 지리적 위치에 있다.

  필문 이선제 부조묘의 뒷산 언덕에 필문의 묘와 묘비가 있으며, 이곳에서 500 여 미터 떨어진 도로변에 그의 신도비가 있다. 마을 앞에는 필문이 심은 괘고정수라 불리는 수령 600여 년의 왕버들 노거수가 있어 유서 깊은 이곳의 역사를 상상케 하고 있다. 시 기념물 24호로 지정된 괘고정수는 이선제 선생이 심었다고 전해진다. 선생의 후손들이 과거에 급제하면 이 나무에 북을 걸어놓고 잔치를 벌였다고 하여 괘고정수라 이름 지었다 한다.

  광주광역시 민속자료 제7호인 필문 이선제 부조묘는 정면 3칸 측면 1칸에 앞마루를 둔 맞배집이다 막돌 초석 위에 정면만 민흘림기둥을 세우고 나머지는 네모기둥을 세웠다. 마루 밑은 호박돌 위에 동바리기둥으로 처리하여 바람이 잘 통하도록 밑벽막이 없이 개방하였다. 문은 쌍여닫이문으로 띠살문이며, 겹처마이다.

고설삼문과 양측으로 맞담 위에 기와를 얹은 담을 돌렸다. 단아하고 정갈해 보이는 그 모습은 이선제 선생의 업적을 기리는 사당으로써의 본모습을 잘 드러내고 있다. 필문은 1390년 광주광역시 남구 이장동에서 태어났다.

  필문의 휘(諱)는 선제 자는 가부이며 필문은 그의 호이다. 어려서부터 매우 총명하여 양촌 권근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1411년 사마시에 합격했던 당시를 생각하자면 30년이나 관직에 머무를 수 있다는 것은 이선제 선생의 학식과 인품이 어떠했는가를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광주에 필문로라는 거리가 있다. 김덕령 장군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충장로나, 정충신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금남로와 마찬가지로, 이선제 선생을 기리기 위해 1988년 필문로가 제정되었다. 그만큼 이선제 선생의 업적은 후세까지 이어질 고귀한 것이었다. 필문은 조정에서 많은 일을 했지만 특히 이곳 광주를 위해서도 노고를 아끼지 않으셨다.

  당시 광주가 무진군으로 강등된 것을 광주목으로 승격시키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으며 지금의 광주일고 자리에 희경루를 짓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또한 인재 발굴을 위해 젊은 선비 30인을 뽑아 강학의 학풍을 일으켰으며 '광주향약'이라고 불리는 광주 최초의 실질적인 향약도 실시했던 분이다. 또한 필문은 학문에는 깊은 조예(造詣)가 있어 <태종실록> 편찬과 <고려사> 개찬에 네 번이나 참여했으며, 각종 경찬소문을 짓기도 했다.

  필문은 1453년 겨울에 서울에서 돌아가신 후 이듬해 봄 상여로 광주 만산동으로 옮겨 할아버지 무덤 옆에 안치했다. 30 여 년 동안 주요 관직에서 활동했음에도 불구하고 실록에 그의 졸기마저 남아 있지 않음은 당시의 정치적 상황으로 필문이 박해를 받았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묘지명이 도굴범에 의해 일본으로 반출되려다 김포공항에 문화재검사에 발각되어 생졸연대가 밝혀졌다. 필문은 판사를 지낸 선윤지의 여식을 아내로 삼아 5남 1녀를 두었다. 장남 이시원과 5남 이형원이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이후 필문 가문은 5대손인 이발, 이길에 이르기까지 계속해서 과거 급제자를 내어 명문 가문으로 이름을 떨쳤다. 필문의 저술은 매우 많았다고 전해지지만 기축옥사로 모두 소실되고 남아 전하는 것은 없다. 후대에 만들어진 <수암지>와 <왕조실록>에 산견되는 자료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