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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의 문화재 (광산구)

풍영정(風詠亭, 문화재자료 제4호)

by 햇살과 뜨락 2023. 6. 1.

풍영정(風詠亭, 문화재자료 제4호)

광주 광산구 풍영정길 21(신창동)

  풍영정은 광산구 광신대교 아래로 흐르는 극락강변의 언덕에 위치하고 있다. 지금은 강물도 맑지 않고 유속도 느린 데다 난 개발로 인한 주변지역의 경치 훼손으로 당시의 운치를 만끽할 수는 없지만 지그시 눈을 감고 앉아있으면, 시수가 저절로 떠오를 만큼 풍광이 수려한 곳이다. 여름이면 강을 타고 불어온 바람이 시원하고 겨울이면 눈 덮인 주변 경치를 내려다볼 수 있어 마치 절해고도를 연상하게 하는 곳이다.

  풍영정은 조선조 명종 때 승문원 판교를 지낸 칠계 김언거가 벼슬에서 물러난 뒤 고향으로 돌아와 지은 정자이다. 칠계란 지금의 극락강의 옛 이름이다. 김언거는 고향의 강 이름을 따서 자신의 호를 칠계라 지은 것이다. 사람은 자연을 쫓고 자연은 인간세상을 따르니 풍영정 앞으로 흐르는 천의 이름은 풍영정의 이름을 빌어 풍영정천이라 부른다.

  풍영이란 뜻은 세상에서 모든 잡념을 버리고 오로지 자연의 경관을 벗삼아 스스로의 심신을 다스리는 하나의 수양을 의미한다. 세상의 온갖 복잡함에서 벗어나 자연의 바람을 마음껏 즐기며 시만 읊겠다는 그의 뜻이 '풍영'이라는 정자 이름에서 그대로 드러나 있는 것이다. 이러한 김언거의 속마음이 풍영정의 원운에 그대로 나타나 있다.

 

벼슬길에 있으면서 편히 쉬지 못했는데

높은 누정에 올라서니 모든 근심 사라지네

노를 젖는 사공 인영 달빛 아래 비쳐있고

물을 찾는 기러기 떼 바람소리 차갑도다

이름 있는 이 지역이 한이 없이 화려하니

지나가는 길손들이 찾아와서 머무르네.

난간 위에 기대앉아 제노시편 바라보니

칠수나산 경관이 천만추를 이어가리.

 

  풍영정을 내왕했던 당대의 명현들은 수없이 많았다. 이황•이덕형•송순•고경명•김인후 등이 지은 시문과 한석봉이 쓴 <제일호산>이라는 편액이 걸려있다. 이들 시문을 찬찬히 들여다보자면 옛 선비들의 단아한 모습과 학문을 숭상하는 정신을 그대로 느낄 수 있다. 풍영정은 자연의 풍취를 만끽할 수 있는 곳이자 학문과 예술을 교류하는 문화의 장이었다.

 

풍영정에 관한 재미난 일화 두 가지가 전해져 온다.

  명종이 정자에 걸 현판의 글씨를 당시 기인이었던 갈처사에게 받아다 걸라고 했다. 김언거는 기쁜 마음으로 갈처사를 찾아갔으나 여러 번 헛걸음을 했고 무려 열네 번을 찾아간 끝에 만날 수 있었다. 갈처사는 칡넝쿨로 붓을 만들어 글을 써주며 가는 길에 절대로 펴보지 말라고 당부했다. 하지만 궁금함을 참지 못한 김언거가 첫 장을 펼치자 '풍'자가 하늘로 날아가 버렸다. 놀란 김언거는 돌아가 갈처사에게 다시 써줄 것을 청했지만 거절당했고 그의 제자인 황처사에게 '풍'자를 받았다. 그래서 지금도 현판을 자세히 보면 '풍'자는 나머지 '영'과 '정'자보다 자획이 조금 가늠을 알 수 있다.

  또 다른 일화는 임진왜란과 관련이다. 정자를 지을 당시에는 지금의 풍영정을 주 정자로 하고 뒤로 이어진 봉우리들을 따라 마치 징검다리처럼 11채가 더 있었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왜인들이 다른 채에 다 불을 지르고 마지막으로 풍영정에 불을 던지려던 찰나 현판에 새겨진 <풍•영•정> 세 글자가 물오리로 변해 극락강 쪽으로 날아갔다고 한다. 이를 기이하게 여긴 왜인 대장이 서둘러 불을 끄라고 지시하자 불길이 잡혔고 물오리들이 다시 현판으로 날아와 <풍•영•정> 세 글자가 되었다고 한다.      

   극락강이 내려다 보이는 강변의 언덕위에 세워진 정자이며 지금은 강물과 강폭이 줄어들어 운치가 예같지 않으나 멀리 광주시가지 너머로 바라다 보이는 무등산의 위용은 여전히 장관이다. 또 남서쪽으로는 광주시내에서 하남공업단지로 뚫린 시원한 포장도로가 눈앞에 전개되어 시대의 변천상을 느끼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