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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의 문화재 (광산구)

양송천 묘(梁松川 墓, 기념물 제8호)

by 햇살과 뜨락 2023. 6. 1.

양송천 묘(梁松川 墓, 기념물 제8)

광주 광산구 동호동 산 32-932-9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문장가인 송천(松川) 양응정(梁應鼎, 15191581) 선생의 묘소이다. 그는 학포 양팽손(學圃 梁彭孫, 14881545)의 셋째 아들이다.. 중종 35(1540)에 생원시에 장원급제하고, 명종 7(1552)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아간 뒤 홍문관 부수찬, 예문관, 승정원 등을 거쳐 대사성에 이르렀다. 1540(중종 35)에 생원시에서 장원으로 합격하고, 1552(명종 7)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검열(檢閱)이 되고, 공조좌랑으로 1556년 중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호당(湖堂 : 독서당의 다른 이름으로 신하들에게 학문을 권장하기 위하여 독서할 수 있도록 만든 장소)에 들어갔다.

이듬해 공조좌랑으로 있을 때 당시 권신이었던 윤원형(尹元衡)에 의하여 김홍도(金弘度)와 함께 탄핵을 받고 파직당하였다가 1560년에 다시 복직되었다. 그 뒤 수찬(修撰진주목사를 거쳐 1574(선조 7) 경주부윤으로 재직 중, 진주목사로 있을 당시 청렴하지 못하였다는 대간의 탄핵으로 파직되었다. 1578년에 공조참판으로 기용, 성절사로 명나라에 갔으나 부정을 저질렀다는 이유로 다시 파직되었다가 대사성에 복직되었다. 시문에 능하여 선조 때 88 문장의 한 사람으로 뽑혔으며 효행으로 정문이 세워졌다. 저서로는 송천집·용성창수록(龍城唱酬錄)이 있다.

당시부터 싹트기 시작한 당쟁의 희생양이 되어 고향으로 돌아가 후진양성에 전념했던 선생은 제자 송강 정철에게 궁리의 뿌리 없이 먼저 문자에 능한 자는 있을 수 없다. 나 역시 늦게나마 그것을 깨닫고 후회하고 있으나 때는 이미 늦었다. ’고 말하여 글을 잘 쓴다고 깊은 사상 없이 함부로 붓을 날리는 일이 없도록 당부하였다.

현재 묘역에는 묘 앞에 상석과 향로석, 신도비(神道碑:왕이나 고관 등의 평생업적을 기리기 위해 무덤 근처 길가에 세운 비)가 있는데, 비문은 민병승이 지었다. 이곳에는 선생의 아들이며 진주성 전투에서 순절한 충민공 양산숙의 묘와 선생의 손자인 한림학사 양만용의 묘가 함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