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암집 목판각(思庵集 木版刻, 유형문화재)
『사암집』의 초간본은 박순의 사후 그의 외증손인 이문망(李文望) 형제에 의해 간행이 추진되어 1652년 경 완산 통판 서필원(徐必遠)의 도움으로 전주에서 판각되었으나, 그 판본은 가화(家禍)로 인해 소실되어 전하지 않는다. 그 후 다시 박순의 방계 후손인 박이휴가 초간본의 내용을 수정 보완하여 호남 관찰사 김병교(金炳喬)의 도움을 얻어 1857년 중간본을 간행하였다.
『사암집』은 전체 7권 3책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현존하는 목판각은 크기가 가로 35cm, 세로 22cm, 두께 4cm이며, 모두 180매이다. 광주시립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사암 박순(思庵 朴淳, 1523-1589)
본관은 충주(忠州), 자는 화숙(和叔), 시호는 문충(文忠), 호는 사암이다. 1523년 어머니 당악 김씨의 고향인 나주에서 박우(朴祐)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할머니 고향인 광산군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여덟 살 때에 한시를 지었고 18세에 진사시험에 합격한 후, 화담 서경덕(花潭 徐敬德)의 문하에 들어갔다.
1553년 정시(庭試)에 장원급제하여 성균관 전적, 공조좌랑, 홍문관 수찬, 교리, 이조좌랑 등을 지내다가 호당(湖堂)에서 공부 하였다. 윤원형(尹元衡)일파의 모략에 의해 벼슬에서 물러났다가 1565년 성균관 대사성, 사간원 대사간이 되어 이량(李梁), 이감(李勘), 윤백원(尹百源) 등의 죄를 물어줄 것을 상소하였다가 다시 사직했다.
바로 그 해 대사간에 취임, 을사사화(乙巳士禍)때 피해를 입은 사람들의 신원을 회복시켰다. 대사헌과 대제학을 겸직하기도 하였으며 1572년 우의정, 1573년 좌의정, 1579년 영의정이 되었다. 1586년 관직을 사임하고 영평의 백운산(白雲山)에 들어가 정자를 짓고 은거하였다. 1589년 생애를 마치었으며 화담서원, 월봉서원에 배향되었고 광주와 영평에 사우를 세워 제사지내고 있다.
'사림기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지지당 송흠과 관수정(知止堂 宋欽,1459-1547과 觀水亭) (1) | 2023.08.28 |
---|---|
사계 김장생: 논산 돈암서원(沙溪 金長生, 1548-1631) (1) | 2023.07.18 |
눌재 박상(訥齋 朴祥, 1474∼1530)과 송호영당 (0) | 2023.05.30 |
동암 이발(東巖 李潑, 1544-1589)과 동암기행 (2) | 2023.05.30 |
곤재 정개청(困齋 鄭介淸, 1529-1590)과 자산서원(紫山書院) (1) | 2023.05.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