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문 이선제 부조묘와 괘고정수(畢門 李先齊 不祧廟와 掛鼓亭樹, 지방민속자료 제7호, 기념물 제24호)
광주광역시 남구 원산동
조선 초의 문신인 필문 이선제(畢門 李先齊, 1389-1454) 선생의 신위를 모신 사당이다. 부조묘란 나라에 특별한 공훈을 세운 사람을 기리어 그 신주를 영원히 모시도록 하는 사당을 말하는데 여기 모신 분을 불천지위(不遷之位)라 한다. 보통 4대가 지나면 위패를 땅에 묻고 제를 지내지 않게 되어 있는데, 이 경우는 4대 봉사가 끝난 후에도 신주를 땅에 묻지 않으며 계속적으로 후손들에게 기제사를 받을 수 있도록 한 것이다. 건물은 앞면 3칸, 옆면 1칸이며 앞마루를 둔 소박한 맞배집으로 본래 있던 자리에서 50여 m 가량 왼쪽으로 옮겨왔다.
이선제는 광주 대촌에서 부제학 일영(日英)의 아들로 태어났다. 양촌 권근(陽村 權近)의 문인으로 문과에 급제하여 집현전 부교리ㆍ예문관제학ㆍ세자빈객 등을 역임하였으며, 『태종실록(太宗實錄)』과 『고려사(高麗史)』편찬에 참여하였다. 벼슬을 그만두고 향리에 돌아와서는 후진 양성에 힘썼다. 특히 향약을 시행하여 향촌의 기풍을 순화시키려 애썼던 것은 기릴 만한 일이다. 강진의 수암서원(秀巖書院)과 화순의 죽산사(竹山祠)에 배향되었다.
부조묘의 뒷산 언덕에 필문의 묘와 묘비가 있고 500여m 떨어진 도로변에 그의 신도비가 있으며, 마을 앞에는 필문이 심었다고 하는 수령 600년가량의 왕버들나무인 괘고정수가 있다.
괘고정수(掛鼓亭樹)
남구 원산동 만산마을 입구에 서 있는 나무로 높이 약 15m, 둘레 약 1.7m 가량이며 600년 정도 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왕버들나무이다. 이 나무는 필문 이선제가 심었으며, 이 나무가 죽으면 가문도 쇠락하리라 예언하였다고 한다. 뒤에 후손이 과거에 급제하면 이 나무에 북을 걸어 놓고 축하연을 열곤 하였기 때문에 괘고정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1589년 이선제의 5대손 동암 이발이 기축옥사라 일컬어지는 정여립(鄭汝立) 모반사건에 연루되어, 본인은 물론 가족들까지 죽임을 당하면서 나무가 말라죽기 시작하였다. 뒷날 이발의 억울한 죽음이 밝혀지게 되었고, 나무도 죽은 지 300여 년이 흐른 뒤에 다시 새 잎을 피우며 살아나, 가문의 중흥을 예고하였다는 전설이 전한다.
동암 이발(東巖 李潑, 1544-1589)
자는 경함(景涵), 호는 동암, 본관은 광산, 전라관찰사를 지낸 이중호(李仲虎)의 아들로 1544년에 대촌면 유등곡에서 출생하였다. 1568년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1573년 알성문과에 급제하여 호당에 들어갔다. 그 뒤 대사간 대사성, 도승지, 부제학 등을 역임하였고 경학과 문장에 모두 뛰어났다.
사론을 세워 조광조의 지치주의(至治主義)를 이념으로 삼고 경연에 출입하면서 왕도정치를 제창, 기강을 확립하고 사정(邪正)의 구분에 노력하였다. 1589년 일어난 기축옥사 때 옥사하였으나 인조 때 이원익, 이항복, 이산해, 한응연 등의 건의로 신원복관(伸寃復官) 되었다. 1694년 판서 이현일의 진달로 이조참판을 증하고 정려를 특명하였다. 또한 태학의 상소로 인하여 입후의 명을 내리고 특명으로 진사 온(溫)의 자 종백에게 별제를 제수하였으며 강진 수암서원에 제향 되었다.
정여립모반사건이라 하기도 하는 기축옥사는 정여립이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을 모아 대동계(大同契)를 조직하여 역모를 하였다고 해서 일어난 참혹한 옥사이다. 1589년 10월 황해도 관찰사 한준(韓準) 등의 밀계(密啓)로 음모가 탄로 나자, 여립은 아들 옥남(玉男)과 함께 전북 진안의 죽도(竹島)로 도망하였다가, 여립은 자살하고 옥남은 잡혀 왔다.
이 옥사는 서인인 정철이 맡아 처리했는데, 이것을 기회로 동인의 명사(名士)인 이발, 이호, 백유양, 유몽정, 최영경 등을 처형하고, 정언신, 정언지, 정개청 등을 유배하였으며 노수신을 파직하였다. 이 옥사는 2년에 걸쳐 진행되었으며 동인계열 문인 1,000여 명이 죽거나 유배당했고 한때는 전라도를 반역지향(叛逆之鄕)이라 하여 인재의 등용에 제한이 가하여졌다.
하지만 이 옥사는 서인에 의해 조작되었다는 설이 당시의 기록 등을 통해 나타나고 있고 오늘날 정여립의 대동계에 대해서도 새로운 시각으로 접근하는 경향이 있어 주목된다. 어시대화기운운(於是大禍起云云)」의 『해동야언』과 『조야기문』, 『괘일록(掛一錄)』, 『안 씨 수록』 등의 기록과 『선조실록』,『선조수정실록』의 내용 비교 등을 통해 정여립모반사건이 송익필의 모략과 정철을 위시로 하는 서인의 권력쟁취를 위한 도구였음을 주장하는 내용도 힘을 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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