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쇄원(瀟灑園, 사적 304호)
담양군 남면 지곡리
별뫼라고도 불리는 성산의 자그마한 계곡에 감춰놓은 듯 자리 잡은
소쇄원은 우리 조상의 자연에 대한 세심한 배려와 자연과 인간의 조화로운 만남이 어떻게 가능한가를 나직하게 속삭여 주는 곳이다. 이곳의 주인인 소쇄옹 양산보선생은 스승인 조광조가 화순군 능주면의 적려유허지(謫廬遺墟地)에서 사약을 받고 억울한 죽임을 당하자, 세상의 어지러움을 한탄하며 평생을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다. 그리고 이곳에서 심신을 수양하고 학문을 연마하며 후진을 양성하였고 그러는 동안 주위의 여러 친구들과 함께 뜻을 모아 소쇄원을 가꾸어 놓았다. 그래서 소쇄원의 곳곳에는 나름의 뜻을 담고 있으며 소박함과 함께 단정함, 인공과 자연과의 절묘한 조화가 함께 한다.
소쇄원이란 이름에는 '가슴에 품은 뜻의 맑고 맑음이 마치 비 갠 뒤의 볕에 부는 청량한 바람과 맑은 날의 달빛과 같다.'는 의미를 품고 있다고 하니 소쇄옹의 삶에 대한 생각이 어떠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지금 남아 있는 모습은 조성 당시에 비해 많이 축소되었고 최근 들어 더욱 사람들의 발길이 잦아지면서 그윽한 정취마저 사라져 가고 있다.
싱그러운 향기를 지닌 입구의 대밭을 지나면 계곡의 양쪽으로 원림이 펼쳐지는데, 맨 처음 찾는 사람의 발길을 반기는 곳이 대봉대(待鳳臺)라는 초당(草堂)이다. 봉황을 맞는다는 뜻이니 이곳에 오는 손님이 상당한 학식과 인격을 갖추어야 함을 은연중에 내포하고 있다. 대봉대 아래로는 크고 작은 네모난 못이 2개 있는데 나무 홈통을 타고 계곡의 물을 받아들이도록 설계되어 있다. 한 때 소쇄원 위쪽 계곡에 축산농가들이 들어서서 축산폐수를 방류하는 바람에 계곡 물이 더러워져 연못도 제 구실을 못했었으나 지금은 당국에서 철수시키고 여러 가지 조처를 취하고 있다. 문화재보호를 위해서는 문화재 자체만이 아니라 주변의 자연환경까지 잘 보존해야 하는데, 이곳의 원림과 정자들은 주변의 자연조건을 함께 생각하면서 조성된 것들이어서 더욱 그렇다.
대봉대를 지나면 소쇄원에서 가장 햇살이 따사로운 애양단(愛陽壇)에 이르고 여기서 외나무다리를 건너면 매대라는 정원에 다다르는데, 외나무다리의 위쪽으로 담장이 둘러쳐져 자연과의 경계를 이루고 있다. 이 담장은 밑을 뚫어 놓아 계곡 물이 원림으로 자연스럽게 흘러들게 해놓았다. 이는 자연 속으로 인공의 원림을 다가가게 하기 위한 세심한 배려이다. 문 위의 담에 오곡문(五谷問)이라 이름을 밝혀두고 있고, 매대 위의 담에는 '소쇄처사 양공지려(瀟灑處士 梁公之廬)'라는 글귀가 적혀있는데, 모두 우암 송시열의 글이라고 한다.
이런 글과 정자들의 천장에 붙어 있는 제영을 통해 조선중기 당대의 저명한 학자들이 두루 이곳을 찾았음을 알 수 있다. 매대에는 본래 우리나라에서 보기 힘든 많은 기화요초들이 심어져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지금은 거의 사라져 버려 안타깝다.
매대를 지나 양산보선생의 사랑방 역할을 하던 제월당(霽月堂)에 이르면 툇마루에 걸터앉아 소쇄원 전체를 굽어볼 수 있다. 단아함과 그윽한 품격이 함께 느껴진다. 제월당에서 쪽문을 열고 계곡 쪽으로 내려서면 서재의 역할을 하던 광풍각(光風閣)이 날렵한 모습을 드러내는데, 계곡에 살그머니 단을 쌓고 정자를 얹어 놓았다는 표현이 적절한 정자이다. 소쇄원의 가장 중심이 되는 건물이기도 한 광풍각에는 독특한 방법으로 그려진 소쇄원도를 방안에 걸어놓고 매일 이곳에 대한 설명을 해주는 사람이 있어 많은 사람에게 소쇄원에 대한 이해를 돕고 있다. 계곡은 작은 폭포와 한 두 사람 정도 앉아서 발을 물에 담그고 더위를 식힐 수 있는 공간이 있고 계곡 아래쪽으로는 나무다리가 놓여 있어 다시 입구로 나갈 수 있도록 해놓았다.
선생은 이 원림을 아무에게도 팔지 말고 상하지 않도록 하라는 유언을 남겼고 그 유언을 따르기 위해 후손들이 여러 어려움을 견디어야 했다고 한다. 그로 인해 민간정원으로는 가장 탁월한 문화유산을 우리 모두에게 남겨줄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고암정사 등의 여러 건축물과 나무와 화초 등이 과거에 비해 많이 훼손되었고 규모도 줄어들기는 하였지만 지금 남아 있는 것만으로도 조선선비의 정신과 품격을 함께 느낄 수 있는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창이 밝으니 책과 두루마기 축이 깨끗하구나
물 속 바위에 책과 그림이 비치네
자세히 생각함에 쫓아가고 엎어지고 우러러보니
땅에 인연 있음에도 솔개와 물고기가 드는구나
김인후 소쇄원 48 영 중 제2 영 침계문방(枕溪文房
소쇄공 양산보(瀟灑公 梁山甫, 1503-1557)
조선 중기의 유학자. 자는 언진(彦鎭), 호는 소쇄(瀟灑), 본관은 제주, 창암양사원(蒼巖 梁泗源)의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부친의 호가 창암이라 하여 소쇄원이 있는 마을을 창암촌이라 하였다. 어릴 때 조광조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는데, 성수침, 성수종 형제와 같이 입학하여, 이들과 친하게 지냈다.
17세인 1519년에 시행한 현량과(賢良科)에 응시하여 급제하였으나 합격자의 수가 많고 나이가 어린 때문에 대신들이 관직을 주지 말 것을 요청하여 벼슬은 받지 못했다. 이해 일어난 기묘사화로 인해 스승인 조광조가 능주로 유배되자 그를 따라 향리로 돌아왔다. 그해 12월 스승인 조광조가 유배지에서 사약을 받고 세상을 뜨자 큰 충격을 받고 고향으로 돌아와 자연에 숨어 살기를 결심하고 창암촌의 산기슭 계곡에 소쇄원을 꾸미게 되었다. 소쇄원의 소쇄(瀟灑)라는 말은 공덕장(孔德璋)이 쓴 『북산이문(北山移文)』에 나오는 말로 ‘상쾌하고 맑고 깨끗하다’는 뜻이다. 25세 때 부인 광산김 씨와 사별한 이후 소쇄원을 지키다 1557년 3월 55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나중에 우암 송시열이 둘째아들이자 하서의 사위인 고암의 행장(行狀)을 썼으며, 「소쇄원도」에는 광풍각 옆에 고암정사가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선생의 작품으로는 『효부(孝賻)』와 『애일가(愛日歌)』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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