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암서원과 하서 김인후 선생
하서 김인후 선생은 전라도 장성사람으로 유학자 최고의 명예인 문묘에 배향된 동국 18현 중 유일한 호남사람이다. 정조대왕이 ‘도학과 절의, 문장을 모두 갖추고 있는 사람은 오직 하서 한 사람뿐’이라고 칭송할 정도로 끊임없이 학문을 정진하고 군신의 절의를 지킨 조선중기의 문신이자 의로운 선비였다.
전남 장성군 황룡면과 전북 순창군 쌍치면에 있는 선생의 유적지들을 찾아보며 그분의 삶을 돌이켜 본다. 선생은 1510년 장성군 황룡면 맥호리의 맥동마을에서 태어났다. 맥동마을 입구에는 필암이라 새겨진 자그마한 바위가 있어 이곳이 선생의 유허지 임을 알려준다. 마을에는 선생의 유허비와 함께 임란 때 희생되신 손자며느리의 순절비가 세워져 있다. 선생은 이곳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는데, 옛집은 없어지고 터만 남아있다. 그 탯자리에 선생이 공부하고 수양하며 가꾸었다는 백화정이란 이름의 아담한 건물이 남겨져 있다. 근래에 후손들이 세워 놓은 것이다.
어릴 때부터 매우 총명했던 선생은 10세 때 전라감사였던 김안국에게 소학을 배웠고 사서오경을 독학하다 최산두, 박상 같은 대 유학자들에게 수학하였다. 22세 때에 사마시에 합격, 성균관에서 공부하면서 퇴계 이황 등과 교유하였다. 벼슬길에 오른 것은 31세 되던 중종 때인 1540년으로 별시문과에 급제한 후였다.
맥동마을 앞에는 남쪽으로 들을 지나 난산이라 불리는 조그만 동산이 하나 있다. 선생이 세자시강원에 있을 때 가르치고 이끌던 인종이 재위 8개월 만에 돌아가신 것을 애도한 곳이다. 선생은 매년 인종의 기일이 되면 하루 종일 이곳에서 통곡을 멈추지 않았다고 한다. 인종과는 군신관계 이상의 돈독한 정을 나누었던 데다, 석연치 않은 죽음이 못내 안타까워 더욱 그러지 않았나 싶다. 1843년 세워진 난산비와 한 사람이 앉을만한 화강암 대좌인 망곡단이 쓸쓸하다.
선생의 학문적 경향은 성경의 실천을 학문의 목표로 하고, 물재 이항의 태극음양일물설에 반대하여, 이기는 혼합해 있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퇴계와의 ‘사단칠정논변’으로 유명한 고봉 기대승의 문헌자료를 참고하면 이항과의 서신교환을 통해 성리학에 대한 토론을 했던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천문, 지리, 의약, 산수, 율력에도 정통하였으며 한시에도 능해 많은 한시를 남기기도 했다. 한편으로 정원을 꾸미는데도 솜씨가 있어 우리나라 민간정원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소쇄원을 조성하는데 힘을 보태기도 했다. 더불어 소쇄원 48 영이란 아름다운 서경시도 남겨놓았다.
을사사화 이후인 1548년 벼슬을 그만둔 선생은 처가인 순창 점암촌의 백방산 자락에 훈몽재라는 강학당을 짓고 조희문, 기효간, 변성온, 정철 등의 제자를 길러냈다. 지금의 순창군 쌍치면 둔전리에 훈몽재유적지 복원공사가 마무리되어 있고 백방산 자락에 유허비와 길가에 어암서 원유허비도 조성되어 있다.
평생 강직하게 절의를 지키고 학문에 정진하다 51세 되던 해인 1560년 돌아가신 선생의 묘소는 맥동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잘 꾸며져 있다. 묘소 입구에 있는 노론의 영수였던 우암 송시열이 쓴 신도비에는 ‘도학과 절의와 문장을 겸유한 인물로서 하늘이 도와 우리나라에 내려 주신 분’이라고 새겨져 있다.
하서 선생을 모시는 필암서원은 1590년 맨 처음 세워졌다. 1597년 정유재란 때 불에 타 없어지고 1624년에 다시 지어졌으며, 1662년에 현종이 ‘필암서원’이라고 쓴 현판을 내려 보내면서 사액서원이 되었다. 1672년 현 위치인 황룡면 필암리로 옮겨 지금에 이르며 최근에 주변을 공원화하고 기념관도 세웠다. 공부하는 곳을 앞쪽에, 제사 지내는 곳을 뒤쪽에 배치한 전학 후묘의 형태로 구성되어 있는 이 서원은 앞면 3칸, 옆면 3칸, 2층 누각으로 된 확연루가 출입문 역할을 한다.
여기에도 역시 우암이 쓴 판액이 걸려 있다. 루 아래의 출입문을 들어서면 널찍한 마당을 두고 강당인 앞면 5칸, 옆면 3칸, 총 15칸의 청절당이 나온다.
소박한 느낌의 청절당에는 병계 윤봉구가 단정하게 쓴 ‘필암서원’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그 뒤편에 좌우로 학생들이 생활하는 공간인 숭의재와 진덕재가 있으며, 숭의재 옆에는 인종의 어필묵죽을 소장하고 있는 3칸의 경장각이 있다.
동북쪽 담장 밖에 있는 장판각에는 『하서집』의 목판을 보관하고 있고 노비보, 원장선생안, 집강안, 문계안 등의 서책이 보관되어 있는데, 보물로 일괄 지정되어 있다. 이 밖에도 하서유묵 등 60여 건의 중요한 서책이 함께 보관되어 있다.
장판각 옆, 경장각 뒤로 담으로 둘러쳐진 사당인 우동사에는 하서선생과 사위인 고암 양자징선생을 배향하고 있다. 하서 김인후선생의 삶이 담겨 있는 유적지와 문화유산들을 둘러보았다.
조선중기 도학정치의 실현과 사림파의 중흥, 그리고 조선성리학의 성립과정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 선생의 삶을 되돌아보며 참으로 가치 있는 삶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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