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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서원

함양 남계서원 (咸陽 灆溪書院, 사적)

by 햇살과 뜨락 2023. 5. 13.

함양 남계서원

경남 함양군 수동면 남계서원길 8-11, 일원 (원평리)

  정여창(鄭汝昌, 1450∼ 1504) 선생은 조선 전기의 문신이자 성리학자이며 작가이다. 본관은 하동(河東)이며, 자는 백욱(伯勗), 호는 일두(一蠹), 시호는 문헌(文獻)이다. > 문묘에 배향된 해동 18현 중의 한 사람이다. 세조 13년  이시애의 난으로 아버지 정육을(鄭六乙)이 전사하자 세조의 특명으로 의주판관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였다. 그 뒤 점필재(佔畢齋) 감종직(金宗直)의 문하에서 수학하며 1490년(성종 20년) 학행으로 관직에 나갔다. 그해 별시 병과에 급제하여 연산군의 스승 되었다. 갑자사화가 일어나자 부관참시되었다가 1517년(중종 12)에 복권되어 우의정에 추증되었다. >  그의 성리학 이론은 정몽주·김숙자·김종직으로 이어지는 조선 전기 사림파의 주자학적 학문을 계승한 것이어서 1610년(광해군 2) 문묘에 배향되었고 함양 남계서원(藍溪書院)에 모셔졌다.

학역재 정인지, 하성위 정현조, 정숭조, 선조의  생모가 가까운 일족이다. (金宗直)의 제자가 되어지리산에 들어가 3년간 오경과 성리학을 연구하여 경명수행(經明修行)으로 이름이 알려졌다. 선생은 젊었을 때부터 독특한 학문과 언행, 덕행 등으로 선비 사회에서 주목을 받았고 김굉필, 송석충, 김일손, 정광필 등과 교유하였다.    

22세 때부터는 성균관(成均館)에 입학하여 성균관 유생(儒生)이 되었다. 조정에서 여러 차례 벼슬을 내렸지만 매번 사양하고 학문 연구와 후학 교육에 전념하다가  1490년(성종 21) 학행으로 출사 하여 소격서 참봉(昭格署參奉)이 되었다.

그해 가을 문과 별시(文科別試)에 합격, 예문관 검열(檢閱)을 거쳐 세자시강원설서(世子侍講院設書)를 지냈다. 당시 세자사부의 한 사람으로 동궁이었던 연산군을 보필하였지만 곧고 강직한 성품으로 인하여 그의 주목을 받지 못하였다.

1498년(연산군 4년)무오사화 때 김일손 등의 사초가 문제 되어, 연산군의 스승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김종직의 문인이라는 이유로 연루되어 함경도로 유배되었다. 유배지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지역의 청년들과 학동들을 데려다가 성리학을 가르치고, 지역의 유지들을 만나 한성부와 시국담론, 시문을 주고받으며 변방 지역에도 학문과 문물을 전파하였다. 1594년 유배지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당시 그의 나이 향년 54세였다. 시호는 문헌(文獻)이다.

유배지에서 생을 마감하자 문인들과 유림 동료 친지들은  유배지로 가 두 달에 걸쳐 그의 시신을 고향 함양군까지 옮겨와 장사하였다. 장지는 남계서원 뒤 승안산 기슭에 안장하였다. 남계서원의 누문인 봉수루를 들어서면 강당인 명륜당이 있고, 그 앞쪽 양 옆으로 유생들의 생활공간인 양정재와 보인재가 있다. 재 앞에 각각 연못과 애련 헌·영매헌이 있다. 내삼문 안쪽으로 사당이 있어 위패가 모셔져 있다. 이 밖에 전사청과 고직사·묘정비각 등이 있으며, 서원 입구에는 홍살문과 하마비(下馬碑)가 있다. 명종 21년(1566)에 나라에서 ‘남계’라는 사액을 내려 공인과 경제적 지원을 받게 되었다.  따로 사당을 짓고 유호인과 정홍서를 모셨다가, 고종 5년(1868)에 훼철되었다. 앞쪽 낮은 곳에는 공부하는 강학공간을 두고 뒤쪽 높은 곳에는 사당을 두어 제향공간을 둔 전학 후묘의 배치를 하고 있다.
   지금은 교육적 기능은 없어지고 제사의 기능만 남아있으며, 『어정오경백편』·『고려사』 등의 책을 소장하고 있다. 정여창을 모신 서원은 전국적으로 9곳에 이르며, 그중 주된 곳이 남계서원이고 소수서원에 이어 두 번째로 세워진 오래된 서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