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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재 정가신과 설재서원, 쌍계정 설재서원(雪齋書院,문화재자료) 전남 나주시 노안면 영평리 649 설재서원은 문정공 설재 정가신(雪齋 鄭可臣)을 배향하기 위하여 숙종14년(1688) 노안면 금안동에 최초로 창건되어 현재는 9위를 향사하고 있다. 숙종 19년(1693) 설재 선생의 5세 손으로 세종조에 효자정려를 받은 경무공 영모정 정식(鄭軾·1407~1467년)이 추배되었다. 숙종 38년(1712) 여름에는 향사우로 승격되어 설재서원이 되었다. 경종 3년(1723)에 노안면 금안동에서 영평리 영안마을로 이건하여 강당인 영모재를 건립하고, 암헌(岩軒) 신장(申檣·1381~1433)과 후손인 일헌(逸軒) 정심(鄭諶·1520~1602년)을 추배하여 4위가 배향되었다. 고종 5년(1868)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인하여 훼철되었다가 1900년 .. 2023. 9. 1.
필문 이선재부조묘(畢門 李先齊,1389~1454 不祧廟) 괘고정수(掛鼓亭樹) 남구 원산동 만산마을 입구에 서 있는 왕버들이다. 높이가 약 15m 정도이고, 가슴 높이의 직경은 약 1.7m 1.7m가량 된다. 나무갓(樹冠)의 너비는 13m 안팎이며, 수령은 어림잡아 600년쯤 되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나무는 필문 이선재(畢門 李先齊, 1389~1454)가 심었으며, 이 나무가 죽으면 가문도 쇠락하리라 예언하였다고 전한다. 뒤에 이선제의 후손이 과거에 급제하면 이 나무에 북을 걸어 놓고 축하연을 열곤 하였기 때문에, 掛鼓亭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1589년(선조 22) 이선제의 5대손 이발(李潑)이 기축옥사라 일컬어지는 정여립(鄭汝立) 모반사건에 연루되어, 본인은 물론 가족들까지 죽임을 당하면서 나무가 말라죽기 시작하였다. 뒷날 이발의 억울.. 2023. 9. 1.
눌재 박상(訥齋 朴祥,1474∼1530)과 월봉서원(月俸書院) 박상(朴祥) 박상(朴祥,1474∼1530)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충주(忠州). 자는 창세(昌世), 호는 눌재(訥齋). 진사 지흥(智興)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생원 서종하(徐宗夏)의 딸이다. 1496년(연산군 2)진사가 되고, 1501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 교서관정자(校書館正字)로 보임받고, 박사를 역임하였다. 승문원교검(承文院校檢)·시강원사서(侍講院司書)·병조좌랑을 지내고, 1505년 외직으로 전라도사(全羅都事)를 지냈다. 1506년 중종초 사간원헌납이 되어 종친들의 중용(重用)을 반대하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서 하옥되었으나, 태학생(太學生)과 재신(宰臣)들의 상소로 풀려나왔다. 그러나 1년 동안 논쟁이 그치지 않으므로 전관(銓官)에게 미움을 사서 한산군수로 좌천되었는데, 사헌부가 대간(臺諫)은.. 2023. 8. 31.
고봉 기대승(高峯 奇大升, 1527-1572)과 (月俸書院) 월봉서원 광주광역시 광산구 임곡동 1575년(선조 8) 광산군 비아면 산월리에 망천사(望川祠)를 창건하고 기대승(高峯 奇大升)의 위패를 모셨다. 1646년(인조 24)에 지금의 위치로 옮겼으며, 1654년(효종 5)에 사액서원이 되었다. 1671년(현종 12) 박상(朴祥)·박순(朴淳)의 위패를 옮겨 봉안했으며, 1673년 김장생(金長生)·김집(金集)을 추가 배향했다.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없어졌다가 1938년 이후 일부가 복원되었다. 호는 고봉(高峯), 아버지는 진(進)이다. 기묘명현(己卯名賢)의 한 사람인 증(贈) 이조판서 문민공(文愍公) 준(遵)의 조카이다. 이황(李滉)의 문인이며, 김인후(金麟厚)·정지운(鄭之雲)·이항(李恒) 등과 사귀었다. 광주 월봉서원과 오남재 호남의 .. 2023. 8.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