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계산 송광사(曹溪山 松廣寺)
부처는 진리에 눈뜬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 2600년 전 인도에서 태어나 깨달음을 얻은 석가모니를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가르침은 부처님께서 깨친 다음 우리를 위해 설하는데, 그 내용이 오늘날 팔만대장경이란 이름으로 전해지고 있다. 승가는 스님들과 신도들로 구성된 신앙공동체를 가리킨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승가를 통해 오늘날까지 면면히 전승되어 오고있다. 이렇게 보면 부처님은 진리의 길을 먼저 걸어 깨치셨던분으로 그 길을 우리들에게 친절히 가리켜 주시는 길잡이(導師)요, 가르침은 그 길을 표시하고 있는 지도나 이정표와 같고, 승가는 진리의 길을 함께 걷는 길동무들의 모임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세 가지 보배인 삼보는 거기에서 그치지않고 더욱 내면화되어 바로 우리들이 본래부터 갖추고잇는 참마음을 가리킨다. 원효스님께서도 "돌아가는 바 그 하나인 마음(一心)이 바로 삼보인 것이다"라고 확언하고 계신다. 곧 우리들 본래의 마음이 다름아닌 부처요 진리며 승가라는 것이다.
부처님, 가르침, 승가를 가장 귀한 보배라고 한 까닭은 무엇일가? 그것을 통해서 우리는 영원한 세계, 진리의 세계에 다다를 수 있으며 우리들 존재의 원천인 본래의 나, 참 나에게 돌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값이 없는 보배요 천하와도 바꿀 수 없는 귀한 것이다. 불교의 신앙은 바로 그 보배를 향해 가는 것이다.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가르침에 귀의합니다, 승가에 귀의합니다 하는 이른바 삼귀의(三歸依)가 바로 그것이다. 이 세상 어떤 것 보다도 보배롭고 소중한 세가지 보배를 향해 내 모든 것을 다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 삼귀의인 것이다. 따라서 삼보에 귀의하겠습니다하는 말은 나는 "이렇게 살겠습니다" 하는 삶의 방향과 목표를 고백하는 서원이요 다짐이다.
이처럼 부처님, 가르침, 승가야말로 불교를 받치는 세 기둥이요 불교를 불교이게 하는 세가지 요소이다. 그래서 한국불교에는 일찍부터 세 가지 보배를 가리키는 삼대 사찰이 있고 이를 삼보사찰(三寶寺刹)이라고 한다. 곧 경남 양산의 통도사, 경남 합천의 해인사 그리고 전남 순천의 송광사이다.
통도사에는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모셔져있기 때문에 불보사찰(佛寶寺刹), 해인사에는 부처님의 가르침인 팔만대장경의 경판이 모셔져있기 때문에 법보사찰(法寶寺刹), 그리고 송광사는 한국불교의 승맥(僧脈)을 잇고 있기 때문에 승보사찰(僧寶寺刹)이라고 한다.
그것은 두 가지 사실에 연유한다. 첫제는 지금으로부터 800여 년전 고려 때 보조 국사(普照國師 知訥)스님께서 정혜결사를 통해 당시 타락한 고려 불교를 바로잡아 한국 불교의 새로운 전통을 확립하였는데 그 근본도량(根本道場)이 바로 송광사였다.
다른 하나는 지눌 스님의 뒤를 이어 송광사에서 열다섯명의 국사들이 출현하여 지눌과 함께 모두 열여섯명의 국사(十六國師)가 나와 한국 불교의 전통을 면면히 계승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기 때문이다.송광사야말로 한국 불교 전통의 산실이요 또 그 전통을 잇고 있는 중요한 사찰이다
승보종찰 조계총림 송광사
총림법에 의하면 “총림이란 선원, 승가대학(승가대학원), 율원, 염불원을 갖추고 방장의 지도하에 대중이 여법하게 정진하는 종합수행도량”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한국불교 최대 종단인 대한불교조계종에는 2020년 현재 총 7개의 총림 해인사·송광사·통도사·수덕사·동화사·쌍계사·범어사 등 7대 총림은 「총림법」에 의하여 별도 운영되고 있다.
현대 한국불교의 총림 개념은 성철스님과 청담스님에 의해 새롭게 정립되었다. 두 분 스님은 일제강점기 말기 대승사(大乘寺)에서 공동 수행을 하면서 종합수행도량인 총림 건설에 대해 본격적으로 논의했다. 이 무렵 청담스님이 그렸다고 하는 영산도(靈山圖)는 현대의 총림 개념을 도상화한 것이다. 이후 1946년 10월경 공식적으로 설립된 해인사 가야총림은 종합수행도량을 의미하는 새로운 개념의 총림으로 탄생한 첫 번째 총림이다.
2020년 현재 한국불교 조계종에는 해인사, 송광사, 통도사, 수덕사에 이어 2012년 동화사, 쌍계사, 범어사의 세 사찰을 추가 지정해 7대총림이 있게 되었다.
조계산의 서쪽 기슭에 자리잡은 송광사는 명실공히 조계총림으로 승보종찰의 위상을 지닌 대가람이다. 승보사찰이라 함은 불교교단을 이루는 세 가지 요소 불(佛) 법(法) 승(僧) 가운데 나라가 인정하는 국사 스님을 많이 배출한 사찰을 이르는 말이다. 이처럼 송광사는 사격이나 규모 면에서 한국 불교 역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김으로써 오랫동안 대중으로부터 신뢰와 명성을 이어오고 있다.
송광사의 역사
송광사는 전라남도 순천시 송광면에 있는 조계산 자락에 새둥지처럼 아늑하게 자리잡고 있다. 송광(松廣)이라는 이름에는 몇가지 전설이 있다. 그 첫째는 18명의 큰스님들이 나셔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널리 펼 절이라는 뜻이다. 곧 '송(松)'은 '十八(木)+公'을 가리키는 글자로 18명의 큰스님을 뜻하고, '광(廣)'은 불법을 널리 펴는 것을 가리켜서 18명의 큰스님들이 나서 불법을 크게 펼 절이라는 것이다.
둘째로 보조 국사 지눌스님과 연관된 전설이다. 곧 스님께서 정혜결사를 옮기기 위해 터를 잡으실 때 모후산에서 나무로 깍은 솔개를 날렸더니 지금의 국사전 뒷등에 떨어져 앉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 뒷등의 이름을 치락대 (솔개가 내려앉은 대)라 불렀다한다. 이 전설을 토대로 육당 최남선은 송광의 뜻을 솔갱이(솔개의 사투리)라 하여 송광사를 솔갱이 절이라 풀었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일찍부터 산에 소나무(솔갱이)가 많아 '솔메'라 불렀고 그에 유래해서 송광산이라 했으며 산 이름이 절 이름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지금 남아 있는 기록에 의하면 송광사는 신라말 혜린(慧璘)선사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한다. 창건 당시의 이름은 송광산 길상사(吉祥寺)였으며 100여 칸쯤 되는 절로 30, 40명의 스님들이 살 수 있는 그리 크지않은 규모의 절이었다고 한다. 그 뒤 고려 인종때 석조(釋照)대사께서 절을 크게 확장하려는 원을 세우고 준비하던 중 타계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후 50여년 동안 버려지고 페허화된 길상사가 중창되고 한국불교의 중심으로 각광받게 된 것은 불일 보조국사 지눌스님의 정혜결사가 이곳으로 옮겨지면서 부터이다. 지눌스님은 9년 동안의(명종 27년1197년 ~ 희종 원년) 중창불사로 절의 면모를 일신하고 정혜결사운동에 동참하는 수많은 대중을 지도하여 한국불교의 새로운 전통을 확립하였다. 이 때부터 송광사가 한국불교의 중심으로 각광받기 시작하였다. 그 동안 정유재란, 6.25사변 등 숱한 재난을 겪었으나 지속적인 중창불사로 지금의 위용을 갖출 수 있게 되었다.
율학승가 대학원
총림이 있는 곳에는 율원이 있다. 율원은 율주(律主)스님이 있어 율장을 강의하고 대중 생활의 율행에 대해 자문에 응한다. 율원생들은 강원을 졸업했거나, 선원에서 오래 정진한 고참 납자 가운데 율문(律文)을 해독할 수 있는 이들로 구성되어 있다. 따라서 특별한 교재에 대한 강의말고는 거의 다 자습과 토론에 의해 교육된다. 때문에 무엇보다 그 자격에 엄격한 제한을 둔다.
율원은 율사가 머무르는 사원(寺院)이며, 율사(律寺)라고도 합니다. 선원(禪院)과 강원(講院)에 대한 말로 율장(律藏)의 계율(戒律)을 전문적으로 학습하는 사원을 말하는 것입니다. 육조스님께서는 "심지무비자성계(心地無非自性戒)이어서 양심에 잘못이 없으면 그것이 바로 자성의 계다."하였으니, 마음에 미안함이 없도록 하면 부처님의 뜻에 크게 어긋나는 것이 아님을 말씀하신 것이며, 또한 "선은 부처님의 마음이요, 교는 부처님의 말씀이며, 율은 부처님의 행실이라."하고, "승(僧)이 중(重)하면 법도 중하고, 승이 경망(輕妄)하면 부처님도 경하다." 하였으니 선과 교와 율이 없다면, 승가는 존재할 수 없음을 말하며, 그러기에 계율(戒律)은 수명(壽命)임을 강조한 것이다.
지계(持戒) 생활이 없는 곳에는 승가도 성립될 수 없으며, 따라서 율원은 부처님의 지고지순(至高至純)한 행(行), 곧 계율을 전문적으로 익히고 연구하며, 계율을 스승으로 삼아(以戒爲師) 부처님과 조사님들의 혜명(慧命)을 이어가는 곳이다. 우리나라에는 조계총림이 있는 송광사와 가야총림이 있는 해인사의 두 곳에 율원이 있어 율장의 연구와 계율의 호지(護持)에 이바지하는 인재를 길러내고 있다.
선원
선원(禪院)은 선종(禪宗)의 사원이며, 선을 닦는 기관이다. 승가에서는 한 곳에 머물러 수행하는 기간인 안거(安居)라는 제도가 있다. 이 안거는 하안거(夏安居)와 동안거(冬安居)로 나뉘는데, 하안거는 음력 4월 15일부터 7월 15일에 이르는 90일 동안이고, 동안거는 음력 10월 15일부터 다음해 1월 15일까지의 90일이다.
안거(安居)는 범어로 varsa, varsika의 번역으로 우기(雨期)의 뜻입니다. 안거가 생겨나게 된 것은 부처님 당시 인도의 환경에 기인한 것으로 인도의 강우기(降雨期) 3개월간에 실시되는 불교 승단의 특수한 연중행사를 말한다. 여름 장마철인 4월15일부터 7월 15일에 이르는 90일 동안은 돌아다니는데 불편한 것과, 벌레를 밟아 죽이는 것을 피하기 위해 일정한 장소에서 머무르며 오로지 연구, 정진, 수행에만 힘쓰는 기간을 뜻하지만 지방에 따라서 우기가 같지 않은 수가 있기 때문에, 전 , 중 , 후 3종의 안거기간이 인정되고 있다.
이 안거기간 동안 비구(比丘)는 승원, 소옥(小屋), 암굴안 같은 데서 한사람이나 두사람 이상이라도 이것을 행하고, 공양(供養: 식사)은 재가신자가 나르고 비구에게 설법을 듣는 것을 일과로 했습니다. 안거의 첫날을 하안거의 제도를 맺는다는 뜻으로 결제(結制)라고 하고, 7월 15일 이후 안거의 제(制)를 푸는 것을 해제(解制)라고 하며, 결제와 해제의 사이를 반하(半夏)라고 한다. 안거를 마친 뒤, 안거 중에 스스로 죄를 범한 일이 없는 것을 서로 묻는 행사, 곧 자자(自恣)가 엄숙히 행해지는데, 이 날을 자자일(自恣日)이라 한다.
이 안거는 부처님 성도 다음해부터 열반때까지 계속되었고, 그 뒤에도 불교가 여러나라로 전파되면서 불교가 전파된 모든 지역에서 행해지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 있어서도 참선, 불교연구, 정진, 수행의 행사로 여름철과 겨울철 매해 2회 행해지고 있으며 겨울안거는 음력 10월 15일에 결제하여 다음 해 1월 15일에 해제하고 있다. 송광사 선원에서는 이 여름과 겨울 안거외에도 해제기간 90일 가운데 45일간 다시 산철결제를 맺어 정진하고 있다.
송광사의 주요 문화재
순천 송광사(順天 松廣寺, 사적)
우리나라 삼보사찰(불보, 법보, 승보) 중 하나인 승보사찰로서 유명한 송광사는 신라말 ‘혜린선사’가 길상사라는 소규모 절을 지은 것에서 비롯되어, 보조국사 지눌에 의해 대찰로 중건된 후 고려부터 조선 초까지 16명의 국사가 배출된 곳이다.
경내에는 16국사의 진영을 봉안한 국보 ‘송광사국사전’ 등 4점, 보물 27점 등 다수의 중요문화재와 국사의 부도를 모신 암자가 위치하여 역사적·학술적으로 그 가치가 크다.
목조문화재가 많은 사찰로 경내에는 약 80여 동의 건물과 부도·비석 등이 있다. 16국사의 영정을 봉안하는 국사전 등의 국보 4점을 비롯하여 하사당, 약사전, 영산전 등 보물 13점, 천연기념물인 쌍향수 등 국가문화재 17점과 정혜국사사리합 등 지방문화재 10점을 포함, 모두 27점의 문화재가 보존되어 있다. 대웅전을 중심으로 좌우에 승보전과 지장전이 자리하고 있어 장엄한 기상을 나타내며, 전마다 피어오르는 향과 은은한 목탁 소리, 낭랑한 독경, 찬란한 고찰의 승맥을 이어가고 있는 스님들의 모습에서 경건함을 느끼게 한다.
순천 송광사 목조삼존불감(順天 松廣寺 木造三尊佛龕, 국보)
불상을 모시기 위해 나무나 돌, 쇠 등을 깎아 일반적인 건축물보다 작은 규모로 만든 것을 불감(佛龕)이라 한다. 불감은 그 안에 모신 불상의 양식뿐만 아니라, 당시의 건축 양식을 함께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이 목조삼존불감은 보조국사 지눌이 중국에서 돌아오는 길에 가져온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정확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불감은 모두 3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가운데의 방을 중심으로 양쪽에 작은 방이 문짝처럼 달려 있다. 문을 닫으면 윗부분이 둥근 팔각기둥 모양이 되는데, 전체 높이는 13㎝이고, 문을 열었을 때 너비 17㎝가 되는 작은 크기이다. 가운데 큰 방에는 연꽃무늬가 새겨진 대좌(臺座) 위에 앉아 있는 본존불이 조각되어 있고, 양쪽의 작은 방에는 각각 보살상이 모셔져 있다. 본존불은 양 어깨를 감싼 옷을 입고 있으며, 옷주름은 2줄로 표현되어 있다. 오른손은 어깨 높이로 들었고, 무릎 위에 올리고 있는 왼손에는 물건을 들고 있다. 오른쪽 방에는 실천을 통해 자비를 나타낸다는 보현보살을 배치하였는데, 코끼리가 새겨진 대좌 위에 앉아 있다. 보살의 왼쪽에는 동자상이, 오른쪽에는 사자상이 서 있다. 왼쪽 방에는 지혜를 상징하는 문수보살이 연꽃가지를 들고 서 있다. 문수보살은 사자가 새겨져 있는 대좌 위에 서 있으며, 보살의 좌우에는 동자상이 1구씩 서 있다.
이 목조삼존불감은 매우 작으면서도 세부묘사가 정확하고 정교하여 우수한 조각 기술을 보여주고 있다. 세부의 장식과 얼굴 표현 등에서는 인도의 영향을 받은 듯 이국적인 면이 보이며, 불감의 양식이나 구조에서는 중국 당나라의 요소를 발견할 수 있다. 국내에 남아 있는 불감류 가운데 매우 희귀한 예라고 할 수 있다.
순천 송광사 목조관음보살좌상 복장전적(順天松廣寺木造觀音菩薩坐像腹藏典籍, 국보)
순천 송광사 목조관음보살좌상 복장전적(順天松廣寺木造觀音菩薩坐像腹藏典籍)”은 위 순천 송광사 목조관음보살좌상에 복장되어 있던 복장유물 중 중요 불교경전 8점이다. 이 경전 중 대방광불화엄경합론(大方廣佛華嚴經合論)은 이권생(李權生), 박문손(朴文孫), 유약(柳約)등이 판하본을 쓰고, 전라도 광주목(全羅道光州牧)으로 하여금 판각, 간행하게 한 간경도감본 교장(敎藏)이다. 재조대장경은 해인사대장경(팔만대장경)의 15세기경의 인본(印本)으로 희귀한 자료이므로 복장유물 전체에서 독립하여 복장전적으로 별도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 보존 관리하여야 한다고 평가되었다.순천 송광사 목조관음보살좌상 복장전적(順天松廣寺木造觀音菩薩坐像腹藏典籍)”은 위 순천 송광사 목조관음보살좌상에 복장되어 있던 복장유물 중 중요 불교경전 8점이다.
순천 송광사 십육조사진영 (順天 松廣寺 十六祖師眞影, 보물)
보조국사 지눌을 비롯해 송광사를 중심으로 고려 후기에 활약한 16명의 고승들의 초상화이다. 원래 16폭이 지정되었으나 13폭의 소재가 파악되지 않고 있으며, 현재 송광사에 3점만 소장되어 있다. 보조국사의 초상화는 가로 77.4㎝, 세로 134.8㎝로 16점 모두 규모나 제작수법이 동일한 것으로 같은 화가에 의해 그려진 것으로 보인다.
오른쪽을 바라보며 앉아있는 보조국사를 중심으로 왼쪽에는 7명이 중앙을 바라보며 있고 오른쪽에 8명이 중앙을 바라보며 있다. 보조국사는 녹색 장삼에 붉은 가사를 입고 오른손에 지팡이를 쥔 모습이다. 옷자락은 선으로 윤곽을 그리고 색의 농담으로 부드럽고 안정된 느낌을 보여준다. 정조 4년(1780)에 그려진 것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혜심 고신제서 (惠諶 告身制書, 국보)
이 문서는 고려 고종 3년(1216)에 조계산 송광사 제2세 진각국사 혜심에게 대선사의 호를 내릴 것을 제가(制可)한 것이다. 이것은 능형화문의 무늬가 있는 홍, 황, 백색 등의 비단 7장을 이어서 만든 두루마리에 묵서한 것으로, 크기는 가로 3.6m, 세로 33㎝이다. 이것은 고려시대 승려에게 하사한 제서 중 몇 점 되지 않는 귀중한 자료이다.
순천 송광사 국사전 (順天 松廣寺 國師殿, 국보)
송광사 국사전은 나라를 빛낸 큰 스님 16분의 영정을 모시고 그 덕을 기리기 위해 세운 건물로, 옛날에는 참선을 하던 곳이었다. 고려 공민왕 18년(1369)에 처음 지었고, 그 뒤 두 차례에 걸쳐 보수하였다.
앞면 4칸·옆면 3칸 크기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으로,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이다. 건물 안의 천장은 우물 정(井)자 모양의 천장으로 꾸미고 연꽃무늬로 장식하였는데, 천장의 연꽃무늬와 대들보의 용무늬는 건물을 지을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건축 구조상 조선 초기 양식을 지니고 있는 이 건물은 순천 송광사 하사당(보물)과 같은 시대에 지은 것으로 짐작되며, 소박하고 아담한 형태와 그 기법에서도 주심포 중기 형식의 표준이라고 할 만한 중요한 건축물이다.
순천 송광사 화엄경변상도 (順天 松廣寺 華嚴經變相圖, 국보)
『화엄경』의 7처9회(七處九會)의 설법내용을 그린 변상도로, 비단 바탕에 채색하여 그린 그림이다. 이 화엄탱은 기본구성을 잘 보여주는 작품으로 구도상 상·하단 모두 법회장면이 거의 대칭을 이루며 펼쳐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아랫부분에는 제1회 ‘보리도량회’를 중심으로 왼쪽에는 보광명전에서 열린 제7회·제2회·제8회가 자리하였으며, 오른쪽에는 제9회 ‘서다림회’가 위치해 있다. 그리고 윗부분에는 아래로부터 위로 진행되면서 오른쪽에 제3회 ‘도리천궁회’와 제4회 ‘야마천궁회’를, 왼쪽에 제5회 ‘도솔천궁회’와 제6회 ‘타화자재천궁회’를 배치시켜 대칭구조를 이루고 있다.
계획적이고 짜임새있는 구도와 더불어 황토색 바탕에 홍색과 녹색 및 금색을 사용하고, 각 회주인 보살형 노사나불의 영락에 고분법을 활용하여 장식함으로써 화면이 밝고 화려해지는 18세기 불화의 경향을 살필 수 있다. 한편 그림 아랫부분에는 보현보살이 대중들에게 비로자나불의 정토인 연화장세계의 모습을 설명하고 있는 『화엄경』39품 중의「화장세계품」내용을 도해한 ‘연화장세계도’가 그려져 있어 주목된다. 그림에 대한 내력을 적어 놓은 기록에 의하면, 조선 영조 46년(1770)에 화련을 비롯한 12명의 승려화가들이 무등산 안심사에서 조성하여 송광사로 옮겨졌음을 알 수 있다.
이 불화는 현존하는 조선시대 화엄경변상도 중 조성시기가 가장 빠름은 물론, 『화엄경』의 7처9회 설법내용을 매우 충실하게 효과적으로 그려내고 있는 기준작이라는데 사료적 가치가 있다.
순천 송광사 경질 (順天 松廣寺 經帙, 보물)
두루마리 형태의 경전을 보관하기 위해 만든 불교 공예품이다. 가느다란 대나무 조각을 색실로 엮어서 직사각형 모양으로 만들고, 끝단에는 삼각형의 비단을 붙여 끈을 달아 경전을 말 수 있도록 하였다. 대나무는 색실로 엮어 꽃무늬를 넣었고, 사방에는 금강저문양이 표현된 비단을 두르고 뒷면에는 종이를 발랐다. 전체적으로 손상이 심한 편이지만 여러 가지 색실로 나타낸 문양은 아직도 정교하며 잘 남아 있다. 국내에서 유일하게 전하는 유물로 그 가치가 높다.
순천 송광사 경패 (順天 松廣寺 經牌, 보물)
경패는 원래 불경을 넣은 나무상자에 경전의 이름을 기록하여 달아서 사용하던 것이다. 송광사에 전해 내려오는 경패는 총 43개로 상아패 10점과 목제패 33점이다. 표면에 액(額)을 만들어 불경의 명칭과 번호를 새겼다. 가장자리에는 덩굴무늬, 학무늬 등 여러가지 문양으로 장식하였다. 뒷면에는 방형의 구획 안에 보살, 나한, 신장상 등을 돋음새김하였는데, 상의 위쪽에는 장막,격자창 등을 조각하기도 하였으며, 아래에는 연화대좌, 난간 등을 표현하였다.
여러 상들의 표현된 방형 구획 아래에는 정(貞), 주(周), 진(晉), 하(何) 등의 함호(函號)가 연꽃, 집 등의 모양 안에 새겨져있다. 측면(약 1㎝두께)에는 둥근 모양의 무늬가 새겨져 있는데, 그 중 세 개는 뚫어새긴 것이다. 조각수법으로 보아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짐작되며, 조각의 정교함이나 그 수법이 매우 뛰어난 작품이다.
순천 송광사 금동요령 (順天 松廣寺 金銅搖鈴, 보물)
요령(搖鈴)은 절에서 승려들이 의식을 행할때 흔들어 소리내는 도구로서 높이 20.6㎝, 지름 6.6㎝의 청동제이지만 도금한 흔적이 남아 있다. 몸은 4각형이고 각 면이 팽창되어 둥근 형태를 하고 있다. 몸 위에는 마디가 하나있는 긴 손잡이가 있으며 몸과 접하는 곳은 후세에 보수한 흔적이 있고 손잡이 윗부분도 손상을 입었다. 손잡이 아랫부분은 둥글며, 큼지막한 꽃이 한 송이씩 아래를 향하고 있다.
몸 전체 각 면을 구분하는 모서리와 입구 주위에 굵은 돌출선을 돌리고 그 테두리 안에 몸을 꼬며 위로 치솟는 용 한 마리와 그 사이 공간에 구름무늬를 도드라지게 새겼다. 각각의 면에 있는 무늬는 하나의 틀에서 찍어낸 듯 하다. 입구 부분은 중앙에 반원형을 만들어 단조로움에 변화를 주었다.
이 요령은 예로부터 송광사에 전해 내려온 귀중한 금속공예품으로서 우아한 형태와 아름다운 조각이 돋보이는, 우리 나라에 현존하는 요령 중에도 걸작에 속하는 동시에 가장 오랜 예로 평가된다.
순천 송광사 화엄경변상도 (順天 松廣寺 華嚴經變相圖, 국보)
묘법연화경은 줄여서 ‘법화경’이라고 부르기도 하며, 부처가 되는 길이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는 것을 기본사상으로 하고 있다. 묘법연화경은 천태종의 근본경전으로 화엄종과 함께 우리나라 불교사상 확립에 크게 영향을 끼쳤다.
이 책은 법화경 28품 중에서 제25품인 관세음보살보문품을 송나라 사효(思孝)가 알기 쉽게 풀이하여 쓴 것으로 크기는 세로 26㎝, 가로 35㎝이다. 보문품이란 법화경의 한 부분으로 관세음보살이 중생의 구제에 관하여 이야기 한 내용을 담고 있다.
조선 세조 7년(1461)에 불경을 한글로 풀이하여 간행하기 위해 설치한 간경도감(刊經都監)에서 판을 새겨 찍어낸 것으로, 고려 대각국사 의천이 만든 교장(敎藏)을 원본으로 삼았다. 다른 책과는 달리 내용을 도표식으로 요약하여 정리하고 있는 것이 특징적인데, 각 행의 글자수가 일정하지 않고 문장간에 경계선이 없다. 책 끝에는 고려 숙종 4년(1099)에 만들어졌다는 기록이 있으나, 세조 7년(1461)묘법연화경은 줄여서 ‘법화경’이라고 부르기도 하며, 부처가 되는 길이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는 것을 기본사상으로 하고 있다. 묘법연화경은 천태종의 근본경전으로 화엄종과 함께 우리나라 불교사상 확립에 크게 영향을 끼쳤다.
이 책은 법화경 28품 중에서 제25품인 관세음보살보문품을 송나라 사효(思孝)가 알기 쉽게 풀이하여 쓴 것으로 크기는 세로 26㎝, 가로 35㎝이다. 보문품이란 법화경의 한 부분으로 관세음보살이 중생의 구제에 관하여 이야기 한 내용을 담고 있다.
조선 세조 7년(1461)에 불경을 한글로 풀이하여 간행하기 위해 설치한 간경도감(刊經都監)에서 판을 새겨 찍어낸 것으로, 고려 대각국사 의천이 만든 교장(敎藏)을 원본으로 삼았다. 다른 책과는 달리 내용을 도표식으로 요약하여 정리하고 있는 것이 특징적인데, 각 행의 글자수가 일정하지 않고 문장간에 경계선이 없다. 책 끝에는 고려 숙종 4년(1099)에 만들어졌다는 기록이 있으나, 세조 7년(1461)에 간행된『송광사금강반야경소개현초』(보물)와 새긴 솜씨, 종이질 등이 같아 세조 때 다시 펴낸 것으로 보인다.
묘법연화경찬술 권1~2 (妙法蓮華經纘述 卷一~二, 보물)
교장(敎藏)을 원본으로 다시 찍은 것 가운데 하나로,『법화경』에 대한 당나라 혜정(慧淨)의 주석서 10권 가운데 권 제1, 2를 하나의 책으로 묶은 것이다. 나무에 새겨서 닥종이에 찍었으며, 크기는 세로 36㎝, 가로 35㎝이다.
각 권의 끝에 있는 간행기록을 통해, 고려 헌종 1년(1095)에 남궁예가 글을 써서 처음 간행한 것을, 조선 세조 때 간경도감<刊經都監:세조 7년(1461) 불경을 한글로 풀이하여 간행하기 위해 설치한 기구>에서 다시 새겨 찍은 것 가운데 일부가 전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대승아비달마잡집론소 권13~14 (大乘阿毗達磨雜集論疏 卷十三~十四, 보물)
불경은 크게 경(經), 율(律), 론(論)의 삼장(三藏)으로 나눌 수 있는데, 이중 ‘론(論)’이란 부처님의 설법을 조직적으로 설명한 것을 가리킨다. 아비달마집론은 부처님의 열반에 관해 설명한 것으로, 여기에 안혜(安慧)가 해설을 붙이고 현장(玄장)이 한문으로 번역한 것을 아비달마잡집론이라 한다.
이 책은 아비달마잡집론에 신라의 현범(玄範)이 다시 해설을 붙인 것으로, 전체 16권 중 권13과 권14를 각기 1책으로 묶은 것이다. 책의 끝에 고려 선종 10년(1093)에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어 원래 교장(敎藏)의 하나로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
이 책은 조선 세조 때 간경도감<刊經都監:세조 7년(1461) 불경을 한글로 풀이하여 간행하기 위해 설치한 기구>에서 교장(敎藏)을 원본으로 하여 다시 목판에 새긴 후 찍어낸 것이다.
금강반야경소개현초 권4~5 (金剛般若經疏開玄抄 卷四~五, 보물)
금강반야경은 줄여서 ‘금강경’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조계종의 근본 경전으로 우리나라에서는 반야심경 다음으로 많이 읽히는 경전이다. 이 책은 금강경에 대해 공철(公哲)이 쉽게 풀이한 것을 나중에 지온(志온)이 보충한 것으로 ‘개현초(開玄褻)’에 관한 7권 중 권4-6이 하나의 책으로 만들어져 전해진 것이다. 닥종이에 찍은 목판본으로 크기는 세로 36㎝, 가로 35㎝이다.
고려 대각국사 의천이 중국, 요, 일본 등에서 구해온 불경을 토대로 만든 교장(敎藏)을 보고 조선 세조 7년(1461)에 간경도감<刊經都監:세조 7년(1461) 불경을 한글로 풀이하여 간행하기 위해 설치한 기구>에서 다시 새겨 펴낸 것이다.
각 권의 끝 부분에 글씨를 쓴 사람들과 교정을 본 사람들의 이름이 나열되어 있고, 세조 때 간경도감에서 다시 펴냈다는 기록이 있다. 따라서 이 책은 송광사에 보존된 여러 교장(敎藏)들이 고려시대의 원본이 아니고 간경도감에서 교장(敎藏)을 보고 다시 새겨 펴낸 것임을 알 수 있게 해주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금강반야경은 줄여서 ‘금강경’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조계종의 근본 경전으로 우리나라에서는 반야심경 다음으로 많이 읽히는 경전이다.
이 책은 금강경에 대해 공철(公哲)이 쉽게 풀이한 것을 나중에 지온(志온)이 보충한 것으로 ‘개현초(開玄褻)’에 관한 7권 중 권4-6이 하나의 책으로 만들어져 전해진 것이다. 닥종이에 찍은 목판본으로 크기는 세로 36㎝, 가로 35㎝이다.
고려 대각국사 의천이 중국, 요, 일본 등에서 구해온 불경을 토대로 만든 교장(敎藏)을 보고 조선 세조 7년(1461)에 간경도감<刊經都監:세조 7년(1461) 불경을 한글로 풀이하여 간행하기 위해 설치한 기구>에서 다시 새겨 펴낸 것이다.
각 권의 끝 부분에 글씨를 쓴 사람들과 교정을 본 사람들의 이름이 나열되어 있고, 세조 때 간경도감에서 다시 펴냈다는 기록이 있다. 따라서 이 책은 송광사에 보존된 여러 교장(敎藏)들이 고려시대의 원본이 아니고 간경도감에서 교장(敎藏)을 보고 다시 새겨 펴낸 것임을 알 수 있게 해주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순천 송광사 하사당 (順天 松廣寺 下舍堂, 보물)
송광사는 통일신라 경문왕 7년(867)에 도의선사가 처음 세웠지만 대부분의 건물이 허물어져 고려 중기 보조국사가 제자들에게 당부하여 다시 지었다. 지금의 절은 조선 광해군 14년(1622)에 다시 고쳐 세운 것이다.
그 중 스님들이 생활하던 하사당은 대웅전 뒤 한층 높은 곳에 있다.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로, 왼쪽 2칸이 툇마루를 갖춘 온돌방이고 오른쪽 1칸은 부엌이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이며, 기둥 위에서 지붕 처마를 받치고 장식을 겸하는 간결한 구조가 기둥 위에만 있다. 부엌 지붕 위로 네모 구멍을 내고 조그만 환기구를 만들었는데 다른 건물에서는 볼 수 없는 시설이다.
이 건물은 조선 전기 스님들이 생활하는 승방(僧房) 건축으로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순천 송광사 약사전 (順天 松廣寺 藥師殿, 보물)
조계산에 있는 송광사는 우리나라 3대 사찰 중 하나로 매우 유서 깊은 절이다. ‘송광’이라는 절 이름은 조계산의 옛 이름인 송광산에서 따 왔다고 하는데 절을 언제 세웠는지는 정확한 자료가 없어 알 수 없다.
약사전은 모든 질병을 고쳐 주는 부처인 약사여래를 모신 불전으로서, 규모가 송광사에서 가장 작은 법당이다. 앞면·옆면이 모두 1칸으로 간결하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현재 있는 우리나라 법당 중 가장 작은 이 약사전은 조각 수법으로 보아 조선 중기인 17세기 무렵의 건물로 추정한다.
순천 송광사 영산전 (順天 松廣寺 靈山殿, 보물)
조계산에 있는 송광사는 우리나라 3대 사찰 중 하나로 매우 유서 깊은 절이다. ‘송광’이라는 절 이름은 조계산의 옛 이름인 송광산에서 따 왔다고 하는데 절을 언제 세웠는지는 정확한 자료가 없어 알 수 없다. 절의 기록에 이 건물은 조선 인조 17년(1639)에 세웠고 영조 12년(1736)에 수리하였다고 한다. 지금 있는 건물은 1973년에 보수한 것이다.
영산전에는 석가모니불상을 모시고 석가의 생애를 8단계로 나누어 그린 팔상도가 있으며, 이외에도 석가가 설법하는 장면을 담은 영산대회 그림도 볼 수 있다. 규모는 앞면 3칸·옆면 2칸이고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이다. 건물에 사용한 부재의 세부 기법이 힘차고 간결하여 조선 전기 건물의 기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좁은 자리에 아담한 규모로 세운 소박한 건물이다.조계산에 있는 송광사는 우리나라 3대 사찰 중 하나로 매우 유서 깊은 절이다. ‘송광’이라는 절 이름은 조계산의 옛 이름인 송광산에서 따 왔다고 하는데 절을 언제 세웠는지는 정확한 자료가 없어 알 수 없다. 절의 기록에 이 건물은 조선 인조 17년(1639)에 세웠고 영조 12년(1736)에 수리하였다고 한다. 지금 있는 건물은 1973년에 보수한 것이다.
영산전에는 석가모니불상을 모시고 석가의 생애를 8단계로 나누어 그린 팔상도가 있으며, 이외에도 석가가 설법하는 장면을 담은 영산대회 그림도 볼 수 있다.
송광사의 주요 산내암자
송광사 산내 암자는 현재 8곳으로 광원암, 불일암(자정암지), 감로암, 부도암, 천자암, 인월암(판와암지), 탑전, 오도암이다. 지금은 터만 남아 있는 암자로는 보조암지, 청진암지, 묘적암지, 은적암지, 상암지, 하암지, 북암지, 상선암지, 상염불암지, 하염불암지, 실상암지, 조계암지, 목우암지, 인월정사, 신평리의 암자 터 등이 있다.
광원암
제2세 진각국사(眞覺國師) 혜심(慧諶)[1178~1234]이 머물렀던 곳으로, 광원암은 백제의 가규대사(可規大師)가 514년(무령왕 14)에 창건했다는 설과 제2세 진각국사 혜심이 창건했다는 설이 있다. 1578년(선조 11)과 1893년(고종 30)에 중수했으며, 일제강점기 이후 쇠퇴하다가 1958년에 폐사되었다. 1993년 송광사 주지였던 승려 현봉(玄鋒)이 중창하기 시작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현재 법당과 요사채가 있으며, 법당 뒤편에 진각국사 혜심의 승탑이 있다.
감로암 제6세 원감국사 충지, 제8세 자각국사(慈覺國師) 도영(道英), 제16세 고봉국사(高峰國師) 법장(法藏)(1350~1428)이 머물렀던 곳,
자정암
제7세 자정국사(慈靜國師) 일인(一印)이 창건한 곳,
은적암은 제13세 각진국사(覺眞國師) 복구(復丘)[1270~1355]가 창건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불임암
불일암(자정암지)은 13세기 말 제7세 자정국사 일인이 창건하였다. 1765년(영조 41) 공루(空樓)를 지었고, 1866년(고종 3) 칠성각을 지었으며, 1891년 정문을 중수하였다. 1921년 서익실(西翼室)을 중건했고, 1929년 공루를 헐어내었다.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까지는 만일염불회(萬日念佛會)의 도량으로 널리 알려졌다. 해방 이후에도 승려들이 거주하며 수행했으나 여수 순천10.19사건, 6.25전쟁으로 인해 폐허가 되었다. 1975년 이후 승려 법정(法頂)이 중창하여 ‘불일암(佛日庵)’으로 개칭하고 머물렀다. 법당 동쪽에 자정국사 일인의 부도가 놓여 있다. 현재 법당과 요사채가 있다. 3) 감로암 감로암은 13세기 말 제6세 원감국사 충지가 창건했으며, ‘감람’ 혹은 ‘자인암(慈忍庵)’이라고도 부른다. 1842년 공루를 지었고, 1879년과 1893년에 중수하였으며, 1891년 정문을 중수하였다. 1920년 동별당을 지었다가 1935년 파옥(破屋)해서 현 송광사 법성료 별당으로 이건하였다. 1936년 공루를 훼철하여 현 송광사 문수전을 증축하였다. 한국전쟁으로 폐사되었으나 1971년과 1976년 2차에 걸쳐 진일(陳一) 심화(心華) 보살이 재건하였다. 2014년 승려 일화가 목조 건축으로 중창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순천 송광사 감로암 목조아미타여래좌상과 복장유물이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334호로 지정되어 있다. 암자 앞쪽에는 제6세 원감국사 충지의 탑비가 있으며, 뒤쪽에는 제8세 자각국사 도영의 승탑이 있다. 현재 감로암에는 송광사의 염불원(念佛院)이 있다. 4) 부도암 부도암은 조선시대 송광사 고승의 부도[승탑]가 모여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1616년(광해군 8) 부휴(浮休) 선수(善修)의 승탑을 이곳에 세운 것이 시초이다. 그 이후 1650년(효종 원년) 송계(松溪) 영각(靈覺), 1660년(현종 원년) 벽암(碧巖) 원조(圓照), 1669년(현종 10) 취미(翠微) 수초(守初)의 승탑이 세워졌다. 1678년(숙종 4) 부휴 선수의 승탑 위쪽 좌우에 송광사 사적비와 보조국사비를 세웠으며, 1766년 백암대사비, 1895년 용윤대사비, 1897년 묵암대사비를 세웠다. 그리고 1689년(숙종 15) 설명(雪明)이 그 옆에 암자를 짓고 ‘부도암’이라 이름 붙였다. 현재 부도암은 법당과 요사채로 구성되어 있으며, 1969년 송광사가 조계총림이 되면서 부도암에 율원(律院)을 설치하였다.
부도전
부도암 옆에 있는 부도전에는 17세기 뇌정, 1700년(숙종 26) 유영과 백암, 1719년(숙종 45) 혜공과 휴암과 무용, 1754년(영조 30) 우계와 벽오와 영해, 1766년 완화, 1767년(영조 43) 풍암, 1790년(정조 14) 일주와 묵암, 1799년 벽담, 1806년(순조 6) 회계, 1820년(순조 20) 환해, 1895년 자암, 1897년 묵암, 1902년 제운과 화운, 1916년 두월의 승탑이 차례로 들어섰다. 1917년 설월이 부도전의 담장을 둘러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1980년대에 취봉(翠峰), 금당(金堂), 광훈(廣薰), 인암(忍庵), 계룡(溪龍), 성공(性空) 등의 부도가 세워지면서 부도전은 모두 5기의 탑비와 30기의 승탑으로 구성되었다. 부도전의 모양과 담장의 규모는 가로 18m, 세로 39m인 직사각형이며, 흙돌담의 높이는 1.5m 정도이다. 내부는 4단으로 나누어 제일 위쪽 중앙에 송광사보조국사비[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91호]가 있고, 그 오른쪽으로 송광사사적비가 있다. 승탑의 주인공은 모두 부휴계의 고승이므로 처음부터 부휴계의 부도전으로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천자암
천자암은 14세기 초 제9세 담당국사가 창건하였다. 순천 송광사에서 순천 선암사로 넘어가는 등산로를 따라 약 3.4km 정도 떨어진 산등성이에 있다. 정유재란 때 소실되었다가 1604년(선조 37) 응선(應禪)과 청운(靑雲)이 제2창, 1633년(인조 11) 영묵(靈黙)과 태운(太雲)이 제3창, 1730년(영조 6) 자원(自願)이 제4창, 1797년(정조 21) 제운(霽雲)과 두월(斗月)이 제5창하였다. 현대에는 1995년 승려 활안이 중창하였다. 천자암은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무로 손꼽히기도 했던 곱향나무인 쌍향수[순천 송광사 천자암 쌍향수(곱향나무), 천연기념물 제88호]가 유명하다. 수령이 800년으로 추정되며 용트림하듯 감아 올라가는 모양으로 신비스러움을 자아내고 있다.
인월암(판와암지)
인월암[판와암지]은 순천 송광사 건너편 조계봉 동북쪽으로 형성된 골짜기 아래에 있다. ‘판자암(板子庵)’이라고도 부르는데 창건 시기에 대해서는 알려지지 않았다. 1924년에 “판와암은 송광사 17암자 중의 하나이지만 그 명칭과 터만 남아 있다.”고 한 기록이 전부이다. 옛 스님들의 증언에 의하면 순천 송광사의 기와를 굽는 가마가 있던 암자였다고 한다. 1920년 경 불사에 필요한 기와를 외부에서 구입해 왔다는 기록이 처음 등장하는 것으로 볼 때 19세기 후반까지는 가마가 운영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985년 송광사 [구]명부전을 헐고 지장전을 새로 짓게 되자 그 해체한 명부전 목재로 판와암 자리에 암자를 짓고, ‘인월암’이라 이름 붙였다고 한다.
탑전
탑전은 적광전(寂光殿)을 의미하는데, 1991년 송광사 초대 방장이었던 구산(九山) 수련(秀蓮)[1909~1983]을 다비했던 곳에 구산 수련의 제자인 승려 현호(玄虎)가 송광사 제8차 중창불사를 마치면서 건립하였다. 암자로 들어가는 입구의 문각에 중앙을 ‘U’자 형으로 파낸 통나무를 세워 사람이 통과할 수 있도록 하였다. 건물로는 적광전과 요사채가 ‘ㄴ’자로 배치되어 있으며, 요사채 맞은편에 구산 수련의 승탑과 탑비가 세워져 있다. 그 뒤쪽 언덕은 ‘서부도’라고 하며, 19세기에 세운 계월·동월·오주·이주·보월·화담의 승탑과 현대에 추가한 향봉·화봉·계봉·구암 등의 승탑이 있다.
오도암
오도암은 순천 송광사 북쪽 산 넘어 있는 자그만 암자이다. 현대에 건립된 암자로서 1980년대에는 외국 비구니가 거처하며 수행하기도 했다.
송광사 산내 암자는 대부분 16국사와 관련이 있다. 16국사의 승탑으로서 조계산에 현존하는 것은 7기인데, 모두 순천 송광사 혹은 암자[터]에 있다. 제1세 보조국사 감로탑(甘露塔)은 순천 송광사 관음전 뒤편 언덕, 제2세 진각국사 원조지탑(圓照之塔)은 광원암에, 제3세 청진적조탑(淸眞寂照塔)은 청진암지에, 제6세 원감보명탑(圓鑑寶明塔)은 묘적암지 주변에, 제7세 자정묘광탑(慈靜妙光塔)은 자정암지[현재 불일암]에, 제8세 자각징영탑(慈覺澄靈塔)은 감로암 뒤편 능선에, 제16세 고봉지탑(高峰之塔)은 감로암 뒤편 왼쪽 능선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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