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머리글
우리에게는 자연을 그냥 그대로 가슴에 안아버려 바라다 보이는 풍경 모두를 피안의 세계로 끌어들인 절집이 있다.그런가 하면 석축과 돌계단과 건물들이 서로가 서로를 껴안아 단정하고 깔끔한 조화를 갖춘 절집도 있다. 또 널따란 대지 위에 비워두어야 할 곳은 비우고 채워야 할 곳에는 나름의 의미를 가지는 구조물들을 맞춤으로 채워 불국토의 모습을 소박하게 담은 절집도 있다. 간혹 산자락에 파묻혀 보일 듯 말 듯한 모습으로 소담스러움과 천진스러움이 묻어나는 아담한 절집도 있다.
우리네 절집은 이렇듯 다양하지만 불자들의 수행처이며 살림터이기도 하고 재가신자들을 위한 설법처와 예배처이기도 한 것은 모두 같다.
절집은 외출을 삼가고 지거수행(止居修行)하는 안거(安居)의 장소로부터 출발했다. 바위투성이의 영취산에서 무소유와 평등사상과 자력신앙의 깨달음과 자비로운 마음을 설법하던 석가모니가 제자들과 처음으로 집다운 곳에서 자리를 잡은 곳이 죽림정사(竹林精舍)라는 절집이다. 이어 급고독이라 불리는 수닷타장자가 지어 준 기수급고독원(祇樹給孤獨園), 즉 기원정사에서 머물게 된다.
그러므로 절집은 깨달음을 향한 수행처이면서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평등한 자리여야 마땅하다. 더불어 자비로움을 실천하는 보살행의 출발점이어야 하며 재가신도들이 마음을 가다듬어 예배를 올리는 곳이어야 하는 근본불교의 불교사상은 점차 깊이를 더해가고 폭을 넓히면서 나름의 세계관을 형성하였다. 이와 함께 절집은 불교적 세계관에 의해 불국토로서의 모습을 갖추어 가게 되었다. 즉 부처의 땅, 피안의 세계를 현실 속에 구현하려 한 것이다. 그리고 여러 나라와 여러 민족으로 퍼져나가는 과정에서 중심이 되는 불교사상과 그 지역의 기후나 풍토, 삶의 조건들에 의해 조금씩 다른 모습으로 변화되었다. 특히 중국과 우리나라를 중심으로 발전한 대승불교에 이르러서 절집은 수행처로서의 기능보다는 재가신자들을 위한 설법처와 예배처로서의 역할이 중요하게 되고, 그에 따라 절집의 구조도 많이 달라지게 된다.
우리 민족은 불교가 들어온 이후 거의 천년의 세월 동안 불교를 국교로 삼아왔다. 그런 탓으로 유교가 지배이념이었던 조선시대에도, 그리고 오늘날에도 불교사상은 민중들 속에 무의식처럼 뿌리 박혀 있다. 한편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절집이 여행의 주목적지거나 한 번쯤 들르는 곳이 되어 있다. 그러면서도 절집의 의미를 새겨 잔잔한 살핌을 가지려는 경우는 드물다. 그런 의미에서 절집 읽기는 절집이 가지는 낱낱의 의미를 찾아 절에 들렀을 때 도움을 주기 위한 기초적인 내용들을 담으려 한다.
2. 절이란?
절집은 불자들이 깨달음을 향한 구도를 위한 수행처이면서 그들의 삶을 유지하는 살림터이기도 하고 불법을 설하는 설법처로서의 역할도 한다. 물론 재가신도들이 마음을 맑게 가다듬어 예배를 올리고 소망을 바라는 예배처로서의 역할을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처음부터 지금의 모습을 갖추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가. 절의 어원
절은 가람(伽藍), 도량(道場), 정사(精舍), 사(寺), 사원(寺院), 사찰(寺刹), 절 등으로 다양하게 불리는데, 여기에는 모두 나름의 뜻이 깃들어 있다. 가람은 산스크리트어의 상가람마(Samgharama)로서, 교단을 구성하는 출가한 비구(比丘)와 비구니(比丘尼), 출가하지 않는 재가신도(在家信徒)들이 모여 사는 곳이라는 뜻을 갖는다. 이들 비구, 비구니, 우바이, 우바새를 사부대중(四部大衆)이라 일컬으며 상가람마를 한자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승가람마(僧伽藍摩)가 되었고 줄여서 가람이라 하였다.
도량은 산스크리트어로 비하라(vihara)라고도 하는데, 소리나는 데로 음역하여 비하라(毘訶羅)라 하며 도를 닦는 장소, 도가 있는 곳을 뜻한다. 그러므로 최초의 도량은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얻은 곳이며 부처가 계시는 모든 장소를 도량이라 할 수 있다.
정사는 부처가 살아 계시던 시절에 스님들이 함께 기거하면서 수행을 하던 곳이며 정련(淨練)이라고도 한다. 깨끗한 마음으로 수련할 수 있는 곳이라는 의미에서 붙인 이름이며 맑은 정신의 세계, 안락한 곳, 찾아가 깃들 수 있는 곳을 뜻한다.
‘사’는 본래 마을이나 관청을 가리키는 말로 중국에 불교가 전래되는 한나라 때 중국을 방문하는 인도의 승려들을 접대하던 관청인 홍로시(鴻盧寺)에서 유래 된 것으로 나중에 관청과 구별하기 위해 ‘시’를 ‘사’로 구별해서 부르게 되었다. 그러므로 불자가 수행하며 삶을 꾸려 가는 장소를 뜻한다. 사원과 사찰도 사와 거의 같은 뜻을 지니고 있지만 본래 사원이라 할 때의 ‘원(院)’은 회랑이나 담장을 둘러친 ‘원(園)’과 같은 의미였다가 당나라 때에는 사와 같은 의미로 쓰이고 나중에는 절집의 한 부분을 원이라 하게 되었다.
절은 순수한 우리말이며 왜 절이라고 하였는지는 확실하지는 않으나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 온다. 신라에 불교를 처음으로 전한 고구려의 스님인 묵호자(墨胡子)는 지금의 경북 선산군에 있었던 모례(毛禮)의 집에 머물면서 불법을 전했다고 한다. 그것이털레의 집이 되어 그 털이 덜절로 바뀌었다는 설이 있다. 또 속설에는 절을 많이 하는 곳이라고 해서 절이라 하게 되었다고도 한다. 일본에서는 절을 데라라고 하는데, 팔리어인 테라(Thera)에서 왔다는 설과 털레의 집에서 연유된 것이 일본으로 전해졌다고 보는 두 가지 설이 있다.
나. 절의 기원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얻고 불법을 설하기 시작한 초기에는 일정한 거주지를 가지지 않았다. 사람들의 주검을 버렸다는 돌투성이 산인 영취산에서 걸식으로 수도생활을 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주로 숲 속의 동굴이나 큰 나무 아래서의 좌선을 통해 불법을 깨닫고자 하였으며 유랑생활로 불법을 전파하였다고 한다.
최초의 절집이 생겨난 것은 인도의 기후에 영향을 받아 우기에 석 달 동안 한 곳에 모여 바깥출입을 삼가고 수행하는 안거(安居)라는 계율이 생겨나면서부터이다. 바로 공동으로 생활할 장소가 필요해진 것이다. 그러나 꼭 안거때문 만이라고 할 수는 없다. 석가모니의 설법에 의해 점차 많은 사람들이 불교에 귀의하여 출가하게 되고 재가 신도의 수도 늘어나 일정한 모임의 장소가 필요하게 된 것도 큰 요인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가란타장자가 기증한 대나무 숲에 지어진 죽림정사(竹林精舍)가 등장한다. 곧이어 수닷타장자가 정원을 온통 금으로 덮어서 마련하였다는 기원정사(祈園精舍)도 세워지며 이것이 곧 불교 최초의 절집이 되는 셈이다. 이들 정사는 늘어난 불교도와 출가자들이 안거를 지내기 위한 실제적인 목적에 사용되었다.
그러므로 최초의 절들은 단순한 수행처이면서 살림터였다. 그러다가 점차 계율과 나름의 의례가 늘어나면서 종교의례를 행하는 성스러운 장소로 변화해 갔으며 일정한 구조와 배치를 가지게 되었다. 더불어 불교교단의 근거지로서 포교를 위한 여러 행사와 사업도 하게 되는 등 역할이 다양해지면서 점차 규모도 커지고 수도 많아지게 된다.
절은 안거를 지내던 정사에서 출발하여 다양하게 발전한다. 대표적인 것이 석굴사원으로 아잔타석굴이나 둔황석굴 같은 규모가 큰 석굴사원 이외에도 자연 또는 인공의 크고 작은 석굴사원들이 등장하게 된다. 오늘날 석굴사원들은 그 특성상 불상과 벽화를 비롯한 귀중한 불교미술품을 많이 보존하고 있어 불교사와 불교미술 연구에 큰 도움을 주고 있다. 특히, 인도나 동남아시아에서는 첨탑(尖塔) 양식의(尖塔) 절도 등장한다. 넓고 큰 누각형태에서 절집에서 12세기 후반 이슬람교의 영향으로 변화된 것이다.
시대가 흐르고 불교를 국가적으로 장려하는 나라들이 등장하면서 엄청난 규모를 지닌 거대한 절집들이 등장한다. 인도의 나란다사원이나 세계의 불가사의라고 하는 캄푸치아의 앙코르와트 등이 바로 그것이다. 중국의 최초의 절은 뤄양(洛陽, 지금의 시안)에 있었다는 백마사(百馬寺)이며 후한의 명제(明帝) 때의 일이다. 인도에서 가섭마, 축법란 등의 스님이 불상과 경을 가지고 중국에 당도하자 그들이 머물 곳을 지어준 것이 시초라고 한다.
다. 우리나라 절의 기원
우리나라 최초의 절은 고구려에 불교가 들어온 이듬해인 소수림왕 3년(373년) 평양에 세워졌다는 이불란사(伊弗蘭寺)와 성문사(省門寺)이다. 백제의 경우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으며 신라의 경우에는 모례의 집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 그 흔적을 남기고 있는 절집 중 가장 오래된 절은 흥륜사(興輪寺)로 이차돈의 순교와 관련이 깊은 절이다. 불교도입 초기의 우리나라 절은 주로 도시의 중심지에 세워졌을 것으로 여겨진다. 삼국시대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절집 유적지가 대부분 평지에 세워진 평지가람형(平地伽藍型)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대상황과 사회적 여건, 중심이 되는 불교사상과 역할에 따라 점차 변화를 갖게 된다. 즉, 산수가 수려한 곳을 찾아 산속에 세우는 산지가람형(山地伽藍型)이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지금 남아 있는 대부분의 절집이 산수가 수려한 곳에 터를 잡고 있는 것은 신라 하대에 들어온 선종의 영향도 있었겠지만 풍수지리도 한몫 거들고 있다. 상당히 많은 절집이 창건설화에 풍수지리의 원조인 도선국사를 거론하고 있는 것이 바로 그런 이유일 것이다. 그 외에도 우리 민족 고유의 산악숭배사상도 영향을 주었으며 근본불교에서 나타나는 자연주의적 경향도 무시할 수 없는 조건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드문 예이기는 하지만 천연이나 인공의 굴로 절을 세우는 석굴가람형(石窟伽藍型) 절도 있다. 경주 토함산의 석굴사가 우리나라 인공석굴사원의 대표적인 예이다. 보통 천연의 굴이나 바위벽을 뚫어서 만드는데, 주로 수행처의 역할을 하며 절집의 부속암자이거나 당우인 경우가 많다.
4. 절집의 배치
절에는 여러 가지 시설물들이 자연조건과 조화를 이루며 조성되어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이들 시설물들은 단순한 공간적인 조화만을 지닌 것이 아니라 종교적인 부분, 즉 불교적 세계관의 함축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기능과 격이 다른 건조물들을 어떻게 합리적으로 조화를 이루게 배치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발생한다. 이런 계획을 가람배치라 하며 우리나라에서는 주로 평지가람형과 산지가람형의 배치로 나눌 수 있다.
우리나라의 가람배치는 탑이 있는 지역인 탑원과 금당이 있는 금당원, 그리고 스님들의 살림터인 승원이 복합적으로 형성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그런 까닭으로 가람배치를 이야기할 때 1 탑 1 금당식, 2 탑 1 금당식 등으로 분류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절에는 이외에도 금당을 제외한 전각들과 종루를 포함하는 부속건물들, 그리고 일주문을 비롯한 여러 문 등이 배치되어 있다.
가. 고구려
불교도입 초기의 고구려 절은 궁궐의 건축 양식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으로 짐작되며 절의 조성이 매우 활발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의 절집으로 가장 오래되었다고 알려진 평양의 청암리 절터(금강사터로 추정)의 경우 가람배치가 1 탑 3 금당형식이었음을 알 수 있다. 터의 가운데에 팔각 목탑터가 있고 이를 중심으로 남쪽을 제외한 나머지 방향에 각각 금당터가 있는 형태이다. 청암리 절터는 일본 최초의 절집이라는 비조사와 같은 가람배치를 가진 것으로 밝혀졌는데, 여기에는 천문오행사상이 깃들어 있고 좌우대칭의 폐쇄적인 배치를 이룬 것임을 알 수 있다.
정릉사터는 청오리 절터에 비해 규모가 훨씬 크고 짜임새도 있다. 가운데에 있는 팔각 목탑퍼를 중심으로 좌우에 다시 탑퍼를 두고 그 뒤에 금당을 3개 배치하였으며 그 뒤에 규모 있는 거대한 금당을 배치한 형태를 보여준다. 거기에 회랑을 두어 각각의 터를 구획하고 있으며 이 중심 부분의 좌우로도 건물을 배치하여 모두 18채의 건물이 들어서 있었던 절터이다.
나. 백제
백제도 초기부터 절집의 조성이 활발하였음을 기록을 통해 살필 수 있다. 그러나 475년 공주로 도읍을 옮긴 다음에 세워진 절집들과 부여로 옮긴 다음에 세워진 절집들만 알려져 있다. 군수리 절터, 동남리 절터, 정림사터, 금강사터, 미륵사터 등이 여러 곳이 조사되었는데, 주로 1 탑 1 금당식의 배치를 보여 준다. 간결하고 군더더기가 없는 명쾌한 가람배치를 특징으로 하고 있지만 미륵사의 경우는 좀 특이하다.
미륵사터는 1 탑 1 금당식을 세 개 합쳐놓은 것 같은 가람배치를 지니고 있는데, 각 구역은 회랑을 둘러 구획을 지어 놓았다. 3 탑 3 금당식이라고 할 수 있으며 다른 데서는 찾아볼 수 없는 특이한 구조이다. 백제 사람들은 1 탑 1 금당식의 간결함과 명쾌함을 잃지 않으면서도 규모 있는 가람을 형성해 낸 것이다. 그 결과로 석탑을 조성할 필요가 생기지 않았나 추측하는 경우도 있다. 즉, 중심이 되는 거대한 목탑을 지닌 본원과 좌우 별원에 차이를 주기 위한 방법으로 석탑을 고안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다. 신라
삼국 중 신라는 가장 늦게 불교가 도입되었으나, 불교가 공인된 후에는 절집의 조성이 매우 활발하였다. 맨 처음 세워진 흥륜사를 필두로 황룡사, 분황사 등은 그 규모가 매우 컸음을 알 수 있다. 황룡사터와 분황사를 살펴보면 모두 백제와 같은 1 탑 1 금당식의 가람배치를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라. 남국신라
남국신라 때는 불교건축뿐만 아니라 불교미술도 절정을 이루는 시기이다. 물론 절집의 조성도 활발하였으며 나름의 전형적인 건축양식이 형성되는 때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계속 유지되어 온 절집도 많고 터만 남아 있는 경우도 있지만 거의 대부분이 2 탑 1 금당식의 신라양식을 보여준다. 즉, 금당의 앞마당에 좌우로 대칭이 되게 2개의 탑을 세워놓는 형식이다. 사천왕사터, 감은사터 등에서 볼 수 있으며 불국사, 화엄사 등도 이를 기본 형식으로 삼고 있다.
남국신라 때는 절들이 평지에서 구릉지대로 옮겨갔다가 점차 산속으로 들어가는 흐름을 보여준다. 산지가람이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 산지가람들도 거의 대부분 석탑 2개에 금당이 하나 놓이는데, 다만 지형조건과 규모에 따라서 약간씩의 변화를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마. 고려
고려는 불교를 국교로 삼았던 만큼 절의 조성이 엄청났고 지역에 따라 나름의 특색을 보여주는 다양성을 갖는다. 고려 때의 절들은 삼국시대의 여러 가람형식들이 혼재되어 나타나는데, 고구려적인 요소가 보다 우세한 듯하다.. 불교의 대중화로 요사와 강당 등의 건물이 탑원의 좌우와 전면에 배치되고 금당은 뒤로 물러나 경건하고 엄숙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이러한 배치방법은 우리나라의 절집에서 많이 볼 수 있다. 한편으로 민족 고유의 토속신앙이 습합 되면서 주로 금당의 뒤편에 산신각, 칠성각 등으로 자리를 잡게 되는 시기도 바로 이 시기이다.
바. 조선
조선시대에는 불교를 억압하였던 관계로 새로 세워진 절은 그리 많지 않고 기존의 절들을 고쳐 짓거나 보수하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임진․병자의 양란으로 많은 절들이 파괴되어 영․정조시대를 전후하여 복구된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 탓으로 새로운 가람배치가 나타나지는 않고 고려 때의 가람배치를 그대로 이어받아 고쳐지어 진 경우가 많다.
산지가람의 경우 자연적인 조건과 지형에 따라 약간씩 모습을 달리 하기는 하지만, 거의 대부분 강당을 겸하는 누각이 세워지고 좌우에 요사와 승방이, 그리고 마당의 중앙에 탑을, 뒤쪽에 금당을 두며 금당 뒤로 여러 부속건물들을 배치하는 형식이었다.
'절집기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법보종찰 가야산 해인사 (1) | 2023.07.28 |
---|---|
승보종찰 조계총림 송광사(僧寶宗刹 曹溪叢林 松廣寺) (1) | 2023.07.28 |
절집 둘러보기 (1) | 2023.05.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