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축총림 통도사(靈鷲叢林 通度寺)
통도사 창건의 기본정신
통도사 창건의 기본정신은 부처님 사리(舍利)를 봉안한 금강계단(金剛戒壇)에 있다. 이 계단은 통도사의 정신적인 근거가 되기도 하며 창사 후 가장 중요한 기록을 마련하고 있다. 그래서 통도사 역사에 관해 언급하고 있는 자료들은 어느 것이나 통도사의 변화에 대해 기술하기보다는 바로 금강계단의 변천과 그 역사를 강조하기 때문에 통도사 창건은 금강계단의 역사와 함께 시작된다고 하겠다.
통도사의 창건
『삼국유사』제3권 탑상(塔像) 제4 전후소장사리조(前後所將舍利條)에 의하면 “선덕왕 때인 정관(貞觀) 12년 계묘년(癸卯 643)에 자장율사스님께서 당에서 모시고 온 부처님의 두골(佛頭骨), 부처님의 치아(佛齒)등 사리(佛舍利) 100 립과 부처님이 입으시던 비라 금점가사(緋羅金點袈裟) 한 벌이 있었는데 그 사리를 3 분하여 일부분은 황룡사탑(皇龍寺塔)에 두고 일부분은 태화사탑(太和寺塔)에, 일부분은 가사(袈裟)와 함께 통도사 계단에 두었으며”라고 하였다. 계단은 2층으로 상층(上層) 가운데에 범종 모양을 하고 있는 석개(石蓋)를 안치하였다. 이 내용은 곧 통도사의 불사리 금강계단과 함께 부처님의 친착가사(親着袈裟) 봉안 사실을 전해주는 중요한 기록이다. 본래 금강계단이 축조되기 이전 통도사는 큰 못이었다. 창건주 자장스님께서는 못을 메워 금강계단을 설치하고 통도사를 창건하였다.
자장스님
자장스님께서 당나라 오대산 문수보살상 앞에서 기도를 드리고 있을 때의 일이다. 문수보살이 승려로 화현 하여 가사 한 벌과 진신사리 1백과, 불두골(佛頭骨), 손가락뼈(指節), 염주, 경전 등등을 주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이것들은 내 스승 석가여래께서 친히 입으셨던 가사이고 또 이 사리들은 부처님의 진신사리이며, 이 뼈는 부처님의 머리와 손가락 뼈이다. 그대는 말세(末世)에 계율을 지키는 사문(沙門)이므로 내가 이것을 그대에게 주노라. 그대의 나라 남쪽 축서산(鷲栖山 : 영축산의 옛 이름) 기슭에 독룡(毒龍)이 거처하는 신지(神池)가 있는데, 거기에 사는 용들이 독해(毒害)를 품어서 비바람을 일으켜 곡식을 상하게 하고 백성들을 괴롭히고 있다. 그러니 그대가 그 용이 사는 연못에 금강계단을 설치하고 이 불사리와 가사를 봉안하면 삼재(三災 : 물, 바람, 불의 재앙)를 면하게 되어 만대에 이르도록 멸하지 않고 불법이 오랫동안 머물러 천룡(天龍)이 그곳을 옹호하게 되리라’ 그 후 스님은 귀국하여 나쁜 용들이 산다는 못에 이르러 용들을 위해 설법을 하여 제도하고 못을 메워 그 위에 금강계단을 쌓았다.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사찰에서 스님들에게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스님에게 항복한 독룡은 모두 아홉 마리였는데, 그 가운데서 다섯 마리는 오룡동(五龍洞)으로, 세 마리는 삼동곡(三洞谷)으로 갔으나 오직 한 마리의 눈먼 용만은 굳이 그곳에 남아 터를 지키겠다고 굳게 맹세하였으므로 스님은 그 용의 청을 들어 연못 한 귀퉁이를 메우지 않고 남겨 머물도록 했다고 한다. 그곳이 지금의 구룡지인데 불과 네댓 평의 넓이에 지나지 않으며 깊이 또한 한 길도 채 안 되는 조그마한 타원형의 연못이지만 아무리 심한 가뭄이 와도 전혀 수량이 줄어들지 않는다.’고 한다.
총림이란?
총림(叢林)의 뜻은 범어 vindhyavana의 번역으로 빈타바나(貧陀婆那)라 음역하며 단림(壇林)이라고도 번하는데, 많은 승려와 속인들이 화합하여 함께 배우기 위해 모인 것 을 나무가 우거진 수풀에 비유한 것이다. 지금은 승려들의 참선수행 전문도량인 선원(禪院)과 경전 교육기관인 강원(講院), 계율 전문교육기관인 율원(律院)을 모두 갖춘 사찰을 지칭하는 말이다.
우리나라의 7대 총림
우리나라에는 총림이 7군데 있는데, 통도사, 해인사, 송광사, 수덕사, 동화사, 범어사, 쌍계사를 7대 총림이라고 한다. 통도사는 1984년 총림으로 승격되었으며, 총림의 수장은 방장(方丈)이라고 한다. 모든 승려들은 행자교육을 마치고 사미계를 받으면 강원에서 4년 과정을 이수 후에 구족계(비구계)를 받고 선원이나 율원(律院)을 모두 갖춘 사찰을 지칭하는 말이다.
통도사의 가람 배치
상로전 구역
산문을 들어서서 계곡을 따라 겹겹이 우거진 소나무 숲을 지나, 숲길이 끝나는 지점에서 조금 걷다 보면 두 갈래 길이 나온다. 직진을 하면 주차장과 산내암자로 들어가는 길이고, 산모퉁이를 따라 오른쪽으로 돌면 경내로 들어가는 길이다. 산모퉁이를 돌아서면 오른쪽에 부도전이 자리하고 있다. 부도전에는 역대 통도사에 머물렀던 스님들의 부도와 탑비가 봉안되어 있다. 이곳에서는 매년 개산대제일(음, 9월 9일)에 이곳 부도전에 모셔진 스님들께 부도헌다를 올리고 있다. 부도전을 지나면 바로 정면 3칸 규모의 새로 세운 일주문을 만나게 된다. 이곳 현판에는 ‘靈鷲叢林(영축총림)’이란 적혀있다. 보통 총림문이라 불린다. 이 총림문을 지나 조금 더 가면 오른쪽으로 웅장한 청기와 건물이 위용을 드러내는데, 이곳은 통도사에 전래되는 유물들을 전시하고 연구하는 성보박물관이다. 곧이어 ‘영축산통도사’라는 편액이 걸려있는 일주문을 만나게 되는데, 여기서부터 본격적인 통도사 경내가 시작된다.
동쪽에서 진입하는 형식인 통도사는 큰 사찰답게 건물이 많은데, 전체적으로 남향을 했으면서도 지형 때문인 듯 가람배치가 동서로 길게 이루어져 있다. 또한 가람의 배치는 법당을 중심으로 세 지역으로 나누어 상로 전ㆍ중로 전ㆍ하로 전이라 부르고 있는데, 노전이 3개라는 것은 통도사가 3개의 가람이 합해진 복합사찰이라는 의미로 볼 수 있다. 상로전 구역에는 금강계단을 중심으로 응진전ㆍ명부전ㆍ삼성각ㆍ산령각을 배치하고, 중로전 구역에는 자장스님의 진영을 모신 해장보각을 위시하여 대광명전ㆍ용화전ㆍ관음전이 자리 잡고 있다. 하로전 구역은 극락보전ㆍ영산전ㆍ약사전ㆍ가람각ㆍ범종루 등이 있는 영역이다.
개산조당 앞쪽의 1920년에 세워진 석탑을 지나 낮은 석축 기단을 오르면 상로전 구역이다. 상로전 구역의 중심인 대웅전은 평면은 정방형이지만 지붕은 丁자형을 하고 있다. 진입로인 동쪽에서 보거나 주 방향인 남쪽에서 보더라도 모두 정면처럼 보이도록 한 것이다. 뒤로는 통도사의 상징인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봉안한 금강계단이 자리하고 있다. 대웅전의 정면에는 대중법회와 행사를 하는 건물인 설법전이 웅장한 자태를 드러내고 있으며, 좌우로는 명부전과 응진전을 배치하였다. 응진전의 남쪽에는 노전인 일로향각(一爐香閣)[지금은 중로전에 현판만 남겨져 있다]이 있고, 서쪽으로는 삼성각과 산신각이 배치된 작은 공간이 나오며, 그 가운데 구룡지(九龍池)가 있다.
구룡지는 자장스님이 구룡소(九龍沼)에 사는 용들을 승천시키고 못을 메워 절을 창건했다고 하는 유적이다. 상로전의 가장 서쪽은 일반인들이 들어갈 수 없는 선원구역이다. 이곳에는 주지스님의 처소인 탑광실 그 옆에 보광전과 부속건물 그리고 그 뒤에 방장스님의 거처인 정변전이 자리하고 있다.
중로전 구역
하로전 구역을 지나 불이문을 들어서면 석탑을 지나 멀리 대웅전 건물과 중로전 구역의 일부인 관음전이 눈에 들어온다. 불이문에서 보면 관음전은 중로전 구역에서 불쑥 튀어나온 듯하다. 관음전 뒤로는 세존비각ㆍ개산조당ㆍ해장보각ㆍ용화전ㆍ장경각ㆍ전향각이 남향하여 배치되어 있는데, 맨 뒤의 대광명전만 서쪽으로 약간 틀어 앉았음을 눈치챌 수 있다.
그리고 용화전 앞에는 장차 용화수 아래서 성불하여 중생을 제도하게 될 미륵불의 출현을 기다린다는 의미로 세운 봉발탑이 특이한 모습으로 서 있다. 또한 스님들이 경을 공부하는 강원건물인 황화각과 3동의 요사가 있고, 황화각 뒤로 통도사의 역대 고승들의 진영을 봉안한 영각이 있다. 그리고 관음전 앞에는 경을 공부하는 감로당과 원통방이 배치되어 있으며, 이 두 건물 지하에 대중들이 식사를 할 수 있는 공양간이 있다. 이외에도 작은 객실과 원주실, 후원 등이 있다.
하로전 구역
천왕문을 들어서면 나무로 조각한 사천왕상이 두 눈을 부라리며 서 있고, 이 문을 들어서면서부터는 바로 통도사의 하로전 구역이 시작된다. 먼저 천왕문의 왼쪽으로는 통도사 도량을 수호하는 가람신을 모신 가람각이 자리한다. 그 앞으로는 아침저녁 예불의식에 사용하는 사물(범종, 법고, 목어, 운 판)을 걸어 둔 2층의 범종각과 연이어 만세루가 자리해 있다
범종각의 오른편에는 서향으로 돌아앉은 극락보전과 이를 마주 보고 있는 약사전, 그 사이에 남향한 영산전이 있다. 영산전 앞에는 통일신라 말기에 세워진 삼층석탑이 있으며, 이외에 영산전 뒤로 응향각과 명월당이, 통도사 종무소와 금당ㆍ은당 그리고 육화당 등의 요사가 자리해 있다.
가람 배치도
통도사의 주요 문화재
통도사 대웅전 및 금강계단 (通度寺 大雄殿 및 金剛戒壇)
통도사는 우리나라 3대 사찰 중 하나로 손꼽히는 큰 절로, 신라 선덕여왕 15년(646)에 자장율사가 세웠다.
대웅전은 원래 석가모니를 모시는 법당을 가리키지만, 이곳 통도사의 대웅전에는 불상을 따로 모시지 않고 건물 뒷면에 금강계단(金剛戒壇)을 설치하여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시고 있다. 그 때문에 통도사라는 절 이름도 금강계단을 통하여 도를 얻는다는 의미와 진리를 깨달아 중생을 극락으로 이끈다는 의미에서 통도(通度)라고 하였다 한다. 지금 건물은 신라 선덕여왕 때 처음 지었고, 임진왜란 때 불에 탄 것을 조선 인조 23년(1645)에 다시 지은 것이다.
규모는 앞면 3칸·옆면 5칸이고, 지붕은 앞면을 향해 T자형을 이룬 특이한 구성을 갖추고 있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짠 공포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계 양식으로 꾸몄다. 건물 바깥쪽 기단 부분과 돌계단 층계석, 계단 양쪽(소맷돌) 부분에서는 통일신라시대의 양식을 이어받은 뛰어난 연꽃조각을 볼 수 있다.
불가에서 금강계단은 승려가 되는 과정 중 가장 중요한 수계의식이 이루어지는 곳이다. 부처님이 항상 그곳에 있다는 상징성을 띠고 있으며, 지금 있는 금강계단은 고려·조선시대를 거쳐 여러 차례 수리한 것이다. 양식은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금강계단 형태를 띠고 있는데, 가운데에 종 모양의 석조물을 설치하여 사리를 보관하고 있다. 1층 기단 안쪽 면에는 천인상을 조각하고 바깥쪽 면은 불법을 지키는 수호신인 제석의 모습을 조각하였다.
창건 연대를 확실하게 알 수 있는 조선 중기의 대표적 건축인 대웅전과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담고 있는 금강계단은 각각 건축 구조와 건축사 연구, 계단(戒壇)이 가지고 있는 그 의미에서 중요한 문화재로 평가받고 있다. 통도사는 우리나라 3대 사찰 중 하나로 손꼽히는 큰 절로, 신라 선덕여왕 15년(646)에 자장율사가 세웠다.
대웅전은 원래 석가모니를 모시는 법당을 가리키지만, 이곳 통도사의 대웅전에는 불상을 따로 모시지 않고 건물 뒷면에 금강계단(金剛戒壇)을 설치하여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시고 있다. 그 때문에 통도사라는 절 이름도 금강계단을 통하여 도를 얻는다는 의미와 진리를 깨달아 중생을 극락으로 이끈다는 의미에서 통도(通度)라고 하였다 한다. 지금 건물은 신라 선덕여왕 때 처음 지었고, 임진왜란 때 불에 탄 것을 조선 인조 23년(1645)에 다시 지은 것이다.
규모는 앞면 3칸·옆면 5칸이고, 지붕은 앞면을 향해 T자형을 이룬 특이한 구성을 갖추고 있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짠 공포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계 양식으로 꾸몄다. 건물 바깥쪽 기단 부분과 돌계단 층계석, 계단 양쪽(소맷돌) 부분에서는 통일신라시대의 양식을 이어받은 뛰어난 연꽃조각을 볼 수 있다.
불가에서 금강계단은 승려가 되는 과정 중 가장 중요한 수계의식이 이루어지는 곳이다. 부처님이 항상 그곳에 있다는 상징성을 띠고 있으며, 지금 있는 금강계단은 고려·조선시대를 거쳐 여러 차례 수리한 것이다. 양식은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금강계단 형태를 띠고 있는데, 가운데에 종 모양의 석조물을 설치하여 사리를 보관하고 있다. 1층 기단 안쪽 면에는 천인상을 조각하고 바깥쪽 면은 불법을 지키는 수호신인 제석의 모습을 조각하였다.
지은 연대를 확실하게 알 수 있는 조선 중기의 대표적 건축인 대웅전과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담고 있는 금강계단은 각각 건축 구조와 건축사 연구, 계단(戒壇)이 가지고 있는 그 의미에서 중요한 문화재로 국보로 지정하고 있다.
통도사 영산전 (通度寺 靈山殿)
영산전은 통도사 하로 전(下爐殿)의 중심 건물로 남향하여 자리 잡고 있으며 그 전면의 좌우에는 극락전과 약사전이 놓여 있다. 영산전의 창건시기는 확실치 않으나 통도사성보박물관에 남아있는 “靈山殿天王門兩重創丹雘記文”(1716년)의 기문에는 1713년(숙종 39) 봄 어느 날 밤 화재로 영산전과 천왕문이 소실되었고, 1714년 任間淸印, 松谷正眼, 楓岩朗日, 禪岩致源등 4인의 대선사가 모연(募捐)하고 33명의 목수와 天悟, 最熏, 寂照, 智淳등 15명의 화승이 참여하여 중건하였음을 전하고 있다. 암막새 명문에 강희 53년 甲年(1714년)이라는 기록은 기문의 내용을 뒷받침하고 있다.
영산전은 전면 3칸, 측면 3칸의 다포계 맞배지붕 건물이다. 정면과 동측면의 기단은 지대석 위에 면석을 놓고 갑석을 덮어 마감한 형태이나 서측면과 배면의 기단은 근년에 수리하여 그 모습에 차이가 있으며 기단의 정면 중앙과 양 측면 앞쪽에는 계단이 놓여 있다. 창호는 정면과 배면에만 두고, 양 측면은 창호 없이 벽으로 폐쇄했다. 정면에는 매칸 사 분합 정자살문이, 배면에는 두 짝의 띠살문이 달려 있다.
공포는 공간포의 수에 있어 전면과 배면이 차이를 보이는데, 정면 은 각 칸마다 3구가 배치되어 있으나 배면에는 2구가 놓여 있어 특징적이며, 이처럼 정면 각 칸에 3구씩의 공간포를 두는 것은 매우 드문 사례로 정면성을 강조하면서 불전의 장엄을 표현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앙서형(仰舌形) 살미에는 연봉과 연화를 조각하는 수법으로 장식성을 표현했고 쇠서는 강직한 조선전기 쇠서에서 약화되는 과도기의 형태로 18세기 초 중건 당시 다포건축의 경향을 잘 보여준다.
영산전은 벽화가 매우 주목되는데 내부벽화로는 다보탑을 회화작품으로 표현한 <견보탑벽화>가 있으며, 이 벽화는『법화경』「견보탑품」을 도해한 변상도로는 국내에서 유일한 것으로 예술적 가치도 뛰어난 귀중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더불어 대들보에 매우 화려하게 자리한 황룡, 청룡그림 그리고 양류관음과 나한, 산수를 표현한 벽화들 그리고 이러한 화려한 장엄 속에 석가모니불, 영산회상도가 봉안되어 있으며, 그 주변으로 부처님의 일생을 여덟 장면으로 나누어 그린 팔상탱이 자리하고 있다.
영산전은 건축물 용도에 따른 불단 배치 및 벽화를 구성하기 위한 벽면구성, 반자의 구성 등에서 특징적이며, 상부가구와 공포형식 또한 18세기 초 불전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어 불교 건축사와 회화사 연구에 귀중한 학술적․역사적 가치를 지니고 있으므로 국가지정문화재인 보물로 지정가치가 충분하다. 영산전은 통도사 하로 전(下爐殿)의 중심 건물로 남향하여 자리 잡고 있으며 그 전면의 좌우에는 극락전과 약사전이 놓여 있다.
영산전의 창건시기는 확실치 않으나 통도사성보박물관에 남아있는 “靈山殿天王門兩重創丹雘記文”(1716년)의 기문에는 1713년(숙종 39) 봄 어느 날 밤 화재로 영산전과 천왕문이 소실되었고, 1714년 任間淸印, 松谷正眼, 楓岩朗日, 禪岩致源등 4인의 대선사가 모연(募捐)하고 33명의 목수와 天悟, 最熏, 寂照, 智淳등 15명의 화승이 참여하여 중건하였음을 전하고 있다. 암막새 명문에 강희 53년 甲年(1714년)이라는 기록은 기문의 내용을 뒷받침하고 있다.
영산전은 전면 3칸, 측면 3칸의 다포계 맞배지붕 건물이다. 정면과 동측면의 기단은 지대석 위에 면석을 놓고 갑석을 덮어 마감한 형태이나 서측면과 배면의 기단은 근년에 수리하여 그 모습에 차이가 있으며 기단의 정면 중앙과 양 측면 앞쪽에는 계단이 놓여 있다. 창호는 정면과 배면에만 두고, 양 측면은 창호 없이 벽으로 폐쇄했다. 정면에는 매칸 사 분합 정자살문이, 배면에는 두 짝의 띠살문이 달려 있다. 공포는 공간포의 수에 있어 전면과 배면이 차이를 보이는데,
정면은 각 칸마다 3구가 배치되어 있으나 배면에는 2구가 놓여 있어 특징적이며, 이처럼 정면 각 칸에 3구씩의 공간포를 두는 것은 매우 드문 사례로 정면성을 강조하면서 불전의 장엄을 표현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앙서형(仰舌形) 살미에는 연봉과 연화를 조각하는 수법으로 장식성을 표현했고 쇠서는 강직한 조선전기 쇠서에서 약화되는 과도기의 형태로 18세기 초 중건 당시 다포건축의 경향을 잘 보여준다.
영산전은 벽화가 매우 주목되는데 내부벽화로는 다보탑을 회화작품으로 표현한 <견보탑벽화>가 있으며, 이 벽화는『법화경』「견보탑품」을 도해한 변상도로는 국내에서 유일한 것으로 예술적 가치도 뛰어난 귀중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더불어 대들보에 매우 화려하게 자리한 황룡, 청룡그림 그리고 양류관음과 나한, 산수를 표현한 벽화들 그리고 이러한 화려한 장엄 속에 석가모니불, 영산회상도가 봉안되어 있으며, 그 주변으로 부처님의 일생을 여덟 장면으로 나누어 그린 팔상탱이 자리하고 있다.
영산전은 건축물 용도에 따른 불단 배치 및 벽화를 구성하기 위한 벽면구성, 반자의 구성 등에서 특징적이며, 상부가구와 공포형식 또한 18세기 초 불전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어 불교 건축사와 회화사 연구에 귀중한 학술적․역사적 가치를 지니고 있으므로 국가지정문화재인 보물로 지정가치가 충분하다. 영산전은 통도사 하로 전(下爐殿)의 중심 건물로 남향하여 자리 잡고 있으며 그 전면의 좌우에는 극락전과 약사전이 놓여 있다.
영산전의 창건시기는 확실치 않으나 통도사성보박물관에 남아있는 “靈山殿天王門兩重創丹雘記文”(1716년)의 기문에는 1713년(숙종 39) 봄 어느 날 밤 화재로 영산전과 천왕문이 소실되었고, 1714년 任間淸印, 松谷正眼, 楓岩朗日, 禪岩致源등 4인의 대선사가 모연(募捐)하고 33명의 목수와 天悟, 最熏, 寂照, 智淳등 15명의 화승이 참여하여 중건하였음을 전하고 있다. 암막새 명문에 강희 53년 甲年(1714년)이라는 기록은 기문의 내용을 뒷받침하고 있다.
영산전은 전면 3칸, 측면 3칸의 다포계 맞배지붕 건물이다. 정면과 동측면의 기단은 지대석 위에 면석을 놓고 갑석을 덮어 마감한 형태이나 서측면과 배면의 기단은 근년에 수리하여 그 모습에 차이가 있으며 기단의 정면 중앙과 양 측면 앞쪽에는 계단이 놓여 있다. 창호는 정면과 배면에만 두고, 양 측면은 창호 없이 벽으로 폐쇄했다. 정면에는 매칸 사 분합 정자살문이, 배면에는 두 짝의 띠살문이 달려 있다. 공포는 공간포의 수에 있어 전면과 배면이 차이를 보이는데, 정면 은 각 칸마다 3구가 배치되어 있으나 배면에는 2구가 놓여 있어 특징적이며, 이처럼 정면 각 칸에 3구씩의 공간포를 두는 것은 매우 드문 사례로 정면성을 강조하면서 불전의 장엄을 표현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앙서형(仰舌形) 살미에는 연봉과 연화를 조각하는 수법으로 장식성을 표현했고 쇠서는 강직한 조선전기 쇠서에서 약화되는 과도기의 형태로 18세기 초 중건 당시 다포건축의 경향을 잘 보여준다.
통도사 대광명전 (通度寺 大光明殿)
대광명전은 통도사내 중로전(中爐殿)의 중심 불전으로 대웅전의 서북쪽에 자리 잡고 있다. 사전(寺傳)에는 1725년(영조 원년)에 축환대 사가 대광명전을 중수하였다고 전하며, 1759년에 만든「大光明殿三成功畢後懸板」에는 1756년(丙子) 10월 21일 밤 자시에 화재가 발생하여 법당 4위, 승려 4, 고사 10칸이 회진(灰塵)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어 1758년(戊寅) 1월 초 7일 공사를 시작하여 3 법당을 9월 26일 중건하고 내외 장식까지 마쳤으며, 이듬해 1759년(己卯) 4월 초에 시작하여 6월 26일까지 대광명전 단청을 마치고, 비로불상, 영산전불상 도금, 후불탱을 동시에 완성했다”라고 적고 있다. 이에 따라 현재 대광명전은 1756년에 화재로 불탄 후 1758년에 중건되었음을 알 수 있으며, 이는 건륭 23년(1758년)이라는 암막새 명문으로 보아 확실한 것으로 판단된다.
대광명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다포식 팔작지붕 건물이다. 건물의 기단은 막돌 바른 층으로 쌓은 위에 장대석으로 갑석을 만들어 조성했으며 정면 어칸 앞쪽에는 폭이 넓은 석계가 설치되어 있다.
기단 위에는 막돌 초석을 놓고 약한 배흘림의 원주를 세워 상부가구를 받고 있다. 창호의 정면은 소슬 꽃살창으로 어칸은 삼분합문이고, 나머지는 이 분합문이다. 측면 퇴칸에는 정자살창 또는 빗살창이, 배면 3칸에는 띠살창이 각각 달려 있다. 공포는 정면과 측면의 경우 앙서형(仰舌形) 살미로 처리한 반면, 배면은 교두형 살미로 간결하게 처리하고 있다. 또한 정면 어칸의 기둥 상부에는 섬세하게 조각한 용두(龍頭)가 돌출되어 있고, 불전의 내측에는 용미(龍尾)가 돌출되어 있어 당시의 장식적 경향과 세련된 조각기법을 잘 보여주고 있다. 단청은 외부는 대부분 퇴락하여 흔적만 남은 상태이나 내부는 문양은 물론 색까지도 선명하게 잘 남아 있다.
대광명전은 부재의 치목 및 조각 수법이 우수한 불전으로 평면구성과 공포형식, 창호 등에서도 18세기 중반 시기의 다포계 불전의 건축적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조선후기 불전 단청의 특색을 연구하는 자료로서의 가치도 있어 역사적 ․학술적으로 국가지정문화재인 보물로 지정가치가 충분하다.
「강희 13년」 명 청동은입사 향완(「康熙十三年」銘 靑銅銀入絲 香垸)
향완의 동체부는 당초문이 시문 된 원권문(圓圈文) 중앙에 범자가 은입사되었다. 그 둘레에는 연화당초문과 모란당초문을 새기고 아래에는 여의두문을 시문하였다. 받침대의 위아래에는 펼쳐진 연꽃잎과 당초문, 봉황과 운문, 여의두문 등이 배치되었고, 구연부의 전에도 연화당초문이 입사(入絲)되었다. 전의 뒷면에는「강희십삼년갑인삼월일통도사은입사향완 중 사십오 근(康熙十三年甲寅三月日通度寺銀絲香垸重四十伍斤)」이란 명문으로 강희 13년(1674)에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고「입사장 장후생(入絲匠 張厚生)」이라는 명문이 선각되어 있다.
이 향완은 고려시대 고배형 청동은입사향완의 전형을 따르는 많지 않은 조선시대 고배형 향완 중 하나로 조성시기와 주성장인·봉안사찰이 명확하게 밝혀진 명문이 남아있을 뿐 아니라 유교가 득세했던 조선시대 후기의 조성임에도 불구하고 대형이라는 점, 은입사기법이 빼어나고 문양이 섬세하며, 몸체와 다리부분을 별도로 주조하여 결합한 새로운 결구방식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미술사적 의의가 크다.
「강희 25년」 명 통도사 동종(「康熙二十五年」銘 通度寺 銅鍾)
조선 숙종 12년(1686) 경기도와 경상도 지역에서 활동한 승려인 사 인비구에 의해서 만들어진 조선시대 종이다. 사인 비고는 18세기 뛰어난 승려이자 장인으로 전통적인 신라 종의 제조기법에 독창성을 합친 종을 만들었다. 현재 그의 작품 8구가 서로 다른 특징을 보이며 전해지고 있다.
이 종은 사인비구의 종 중 유일하게 8괘(八卦) 문양을 새긴 것이 특징이다. 큰 종으로 형태미가 뛰어날 뿐 아니라, 종 몸통에 있는 사각형의 유곽 안에 9개의 돌기를 새기는 것이 일반적이나, 이 종은 중앙에 단 한 개의 돌기만 새겨 둔 것으로 그의 독창성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통도사(通度寺) 동종(銅鍾)은 대종으로 형태미가 뛰어날 뿐만 아니라, 회화성이 넘쳐나는 하대 문양대(文樣帶)를 갖추고 있다.
통도사 은제도금아미타여래삼존상 및 복장유물(通度寺 銀製鍍金阿彌陀如來三尊像 및 腹藏遺物)
아미타불(阿彌陀佛)을 중심으로 좌우에 관음·세지보살을 배치한 은제도금아미타삼존상이다. 육각의 연화대좌 위에 결가부좌를 한 아미타불과 대좌에서 좌우로 솟아오른 연꽃 위에 협시보살을 배치하였다. 중앙의 여래상은 둥근 얼굴에 이목구비도 부드럽고 양감 있게 표현되었고 표정은 단엄하다. 나발의 머리에는 높이 솟은 연봉형의 정상계주(頂上髻珠)가 표현되었다.
여래상의 정상 계주·편단우견의 착의법·항마촉지인의 수인 등 티베트 양식 요소와 밋밋한 육계, 여래상의 삼단 연화대좌 등 고려의 전통을 이은 요소가 함께 나타난다. 이런 특징은 조선초기 금강산 일대에서 유행한 소형 금동불의 양식적인 특징으로 조선전기에 금강산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던 왕실불사와도 관련 있는 불상이라고 할 수 있다. 불상의 대좌 속에서 복장기(腹藏記)가 발견되었는데 400여 명에 이르는 발원자와 함께 경태원년(1450)에 개금 되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은제도금아미타여래삼존상이 모셔져 있던 불감은 조선후기에 따로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불감 내벽에는 광배를 대신하여 경전의 표지에 부착되었던 극락국토아미타불경(極樂國土阿彌陀佛經)이라는 자수(刺繡)를 부착하였다.
통도사 괘불탱화(通度寺 掛佛幀畵)
삼베바탕에 그려진 괘불탱화로 좌우 성중들을 생략하고 독존을 화면 중심에 크게 배치한 간략한 구도를 취하였다. 옷에 다양한 문양을 그리고 신광은 화려한 화문으로 장엄 하였으며, 신광의 양 가장자리를 화면 밖으로 배치시킴으로써 독존이면서도 전혀 허전함 없이 화면을 꽉 채우는 효과를 주었다. 원형두광(圓形頭光)을 따라 화사한 운문(雲文)이 둥글게 감싸고 있으며, 두광은 녹색 바탕에 육 색, 주홍, 군청, 삼청 네 겹의 굵은 테두리를 두른 원형두광을 취하였다. 신광(身光)은 백색, 주홍, 군청, 녹색의 꽃무늬로 매우 화려하게 장식하였다. 주존은 영락이 장식된 화려한 보관을 쓰고 있는 보살형으로 상체가 넓고 둥근 편이며 하체가 상체에 비해 다소 빈약한 느낌을 준다. 상호는 매우 둥글고 원만한 느낌을 주며, 머리에 쓰고 있는 보관에는 7구의 입상으로 표현된 화불(化佛)이 등장하고 있다.
본존의 양손은 가슴 위로 들어올려 각각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설법인(說法印)을 취한 가운데 큼지막한 연화가지를 들고 있다. 천의자락은 매우 강하게 휘감겼으며, 불의(佛衣)는 주로 붉은색을 사용하였지만, 부분적으로 백색과 군청을 사용함으로써 매우 화려하고 경쾌한 느낌을 준다.
1792년 통도사 괘불탱화의 조성에는 수화사인 지연(指演)을 비롯하여 치심(致心), 돈활(頓活), 포선(抱善), 쾌능(快能) 등 총 22인의 화사가 동참하였다.
통도사 보광전 화엄탱화(通度寺 普光殿 華嚴幀畵)
부처님의 깨달음과 대승불교의 장엄한 세계관을 설한 화엄경의 내용을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 화엄탱화(華嚴幀畵)이다. 보통 화엄변상탱화는 연화장세계와 지상과 천상을 오가며 중생을 위해 9회의 법회를 여는 화엄경칠처구회(華嚴經七處九會)의 장면을 함축적으로 표현하며, 각 장면에는 화엄종의 종주(宗主)인 비로자나불을 비롯하여 설법을 청하는 보살과 법을 듣는 대중 그리고 설법장소인 궁전누각 등이 세밀하게 그려진다.
이 작품은 일반 채색화와 달리 검은 비단바탕 위에 금니(金泥)를 사용하여 정교하고 화려하게 그렸다. 칠처구회 장면을 갖추어 표현하고 있으며, 설법회의 이름을 간단하게 적었다. 화면의 하단에는 일반적으로 53선 지식을 찾는 선재동자가 등장하는 것과 달리 특이하게 밀교적 도상인 천수관음(千手觀音)이 그려져 있다.
이 작품은 가경 16년(1811)에 통도사에서 활동한 화승인 계성(戒成), 천수(天守), 관보(官甫)등에 의해서 제작되었다.
「통도사」 명 청동은입사향완(「通度寺」銘 靑銅銀入絲香垸)
향로의 동체부는 4개의 원형 동판에 은으로 범자(梵字)를 부착하였고, 그 주위에는 여의두문(如意頭文)과 보상화 당초문(寶相華唐草文)을 은입사 하고 주위는 은으로 마감을 하였는데 일부만 남아 있다. 받침대의 윗부분에는 펼쳐진 연꽃잎을 두고 아래에는 두 마리의 봉황과 운문, 여의두문, 당초문 등이 아름답게 배치되었다. 구연부의 전(搌)에도 당초문이 입사(入絲)되었고, 전의 뒷면에는 「통사사상(通度寺上)」이란 명문이 점각되어있다. 정교한 입사 기법과 화려한 문양 등 고려시대 금속공예의 특징을 잘 반영하고 있다.
「통도사」 명 청동은입사향완(「通度寺」銘 靑銅銀入絲香垸)
양완의 동체부 4곳에는 여의두문을 시문한 원권문(圓圈文) 안에 범자를 배치하였다. 받침대의 상부에는 펼쳐진 연꽃잎이 표현되었고, 하부에는 연화당초문이 은입사 되었다. 구연부의 전에도 보상초화문이 배치되었으며, 전의 뒷면에는 「시주 가선대부 호조 정인언 자□□정광후 정방사 시납 통도사(施主 嘉善大夫 戶曹鄭仁彦 子□□ 鄭光厚 淨房寺 施納 通度寺)」란 명문이 점각되어 있다.
이 향로는 전체적인 균형성이 뛰어나고 범자를 은으로 새겨 넣은 점 등에서 당시 금속공예의 정수를 엿볼 수 있고 또한 보존상태도 양호하여 그 가치가 뛰어나다.
감지금니대방광불화엄경 주본 권 46(紺紙金泥大方廣佛華嚴經 周本 卷四十六)
대방광불화엄경 주본 80권 가운데 제46권으로 금색으로 사경한 종이를 길게 이어 붙인 두루마리 형식이다. 첫머리에 금니 사경한 변상(變相)이 그려져 있는데 정확한 기록이 없어 제작연대는 알 수 없으나 종이의 질과 변상도 및 글씨의 형태로 보아 14세기경 작품으로 추정된다.
변상도(變相圖)는 불부사의법품(佛不思議法品)의 내용을 표현하였는데,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 주변 정면관(正面觀)을 한 보살은 청련화장보살(青蓮華藏菩薩)로 보이며, 노사나불(盧舍那佛)의 주위에는 무수한 타방세계 불보살의 출현을 구름 속에 나타내었다. 또한 천우보화(天雨寶花)가 화려하게 휘날리는 모습을 나타내는 등 화면을 가득 채우는 고려시대 목판의 변상도와 유사한 구도이다.
묘법연화경 권제 3·4(妙法蓮華經 卷三·四)
묘법연화경은 줄여서 ‘법화경’이라고 부르기도 하며, 부처가 되는 길이 누구에게나 열려있다는 것을 중심사상으로 하고 있다. 천태종의 근본경전으로 화엄경 와 함께 한국 불교사상 확립에 중요한 영향을 끼친 경전이다. 닥종이에 찍은 목판본으로 전 7권 중 남아있는 권 3·4의 2권을 하나의 책으로 엮은 다음 표지를 겉에 두른 포배장(包背裝) 형태이다.
조선 성종 1년(1470)에 세조비인 자성대왕대비 윤 씨가 둘째 아들 예종이 죽자 그의 명복을 빌고 세조와 첫째 아들 덕종의 명복도 함께 빌기 위해 펴낸 것이다. 같은 판본으로 여겨지는 보물 제936, 950호와 비교해 볼 때 인쇄 상태가 양호하여 처음 인쇄한 판본으로 보인다. 책의 보존 상태가 양호할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 많지 않은 포배장으로 만들어진 묘법연화경으로,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선원과 율원
선원
선(禪)의 기원은 세존께서 영축산(靈鷲山)에서 말없이 꽃을 들어 보였을 때 대중 가운 데서 상수제자 마하가섭(摩訶迦葉)만이 그 뜻을 이심전심으로 이해하고 미소 지었다 는 염화미소(拈花微笑)나 염화시중(拈花示衆)에서 유래를 찾는다.
서천 28대 달마스님에 이르러 중국에 선법이 전하여진 이후로 당(唐)의 서당 지장(西堂 知藏)에게서 법을 받아 돌아온 도의(道義) 선사가 신라 선덕왕 5년(784) 가지산문(迦智山門)을 개창하면서 한국의 선종이 시작되었으며 매년 하안거(음력 4월 15일~7월 15일)와 동안거(음력 10월 15일~이듬해 1월 15일) 두 차례 안거를 실시하며 현재 통도사 보광선원에서는 25~30명의 운수납자들이 모여서 방장스님의 지도하에 열심히 정진하고 있다.
율원
율원은 종단 기본 교육과정을 이수한 비구, 비구니에게 율장을 전문적으로 연구하게 하며 청정 지계의 가풍을 확립하게 하는 교육기관을 말한다. 율원 2년(석사) 과정과 연구원(박사) 3년 과정으로 교육기간이 설정되어 있으며, 율장의 전문적 연구습의 와 예참의 올바른 전승과 율학을 전수할 율사의 양성을 교육 목표로 삼고 있다.
통도사는 창건주이신 대국통 자장율사께서 부처님의 정골 사리와 부처님의 친착가사와 대장경 400여함을 모시고 당나라로부터 귀국해서 계단을 쌓고 전국의 모든 승려들을 통도사 금강계단을 통해서 득도시키고, 전국에 모든 스님들이 여법하게 정진하는지를 지도하게 해서 신라불교의 기틀을 세우신 계율 근본 도량이다. 이러한 통도사에 설립된 영축총림 율원은 석가세존의 유훈을 이어받아 자장율사의 남산율맥을 계승하며, 수행자의 청정지계 가풍을 확립하고자 발원해서 1950년대 조계종단 최초의 율원인 천화(千華) 율원이 자운율사 등에 의해 이곳 통도사에서 시작되었으며, 근대 통도사의 대율사이셨던 만 하승림율사, 해담(海曇) 율사, 회당(晦堂) 율사, 월하(月下) 율사, 청하율사, 현산율사, 그리고 현재 영축율원 율주이신 중산혜남율사에게로 율맥이 이어져오고 있으며, 불기 2025년 4월 29일 종단 전문교육기관으로 개원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통도사의 주요 산내암자
관음암
통도사 울타리 밖에 있는 조용하고 아늑한 관음기도 도량으로 30여 년 전 태응스님이 창건하였다. 원래 대처승의 가족들이 모여 살던 사하촌이었으나 신도들과 함께 집과 주변의 논밭을 매입하여 현재의 암자를 조성하였다고 전한다. 대웅전인 자광전 앞에는 석등과 돌난간을 두른 5층 사리석탑이 세워져 있는데, 석탑에는 미얀마에서 모셔온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안치되어 있다.
극락암
통도사에서 서북쪽으로 1.5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극락암은 근현대의 고승인 경봉스님이 주석하셨던 곳으로 유명하다. 고려 충혜왕 복위 5년(1344)에 창건되었다고 전하며 창건주는 알 수 없다. 그 뒤 영조 34년 (1758) 지홍대사가 중건하였고 1968년 이후 가람 전체를 경봉스님이 중건 중수하였다. 극락암은 한암, 월하, 벽안, 보안, 혜암스님 비롯하여 수덕사 전 방장 원담스님, 은해사 전 조실 일타스님, 해인사 원로 도견스님, 화엄사 전 주지 도광스님 등 제방의 조 실 스님들이 모두 이곳에서 정진하는 등 한강 이남의 제일가는 호국선원이라 할 수 있다.
선방인 호국선원 앞에는 영월루가 있고 연수당 수세 전 독성각과 함께 33 조사의 영정을 봉안한 조사당이 있다. 경봉스님의 거처였던 아담한 삼소굴과 함께 암자로서 매우 큰 규모이다. 암자 입구에 있는 극락영지는 영축산의 봉우리가 비치는 연못으로 유명하며, 연못을 가로질러 놓여있는 홍교와의 조화가 아름답다.
금수암
세심교를 지나 자장암으로 가는 길에 있다. 수행도량으로써 보통 때는 철문으로 닫혀 있으며 인적이 없어 조용하다. 철문을 지나 다리를 건너면 사찰 입구가 나온다. 정갈한 경내에는 법당과 팔각정자. 석탑, 석등이 자리하였고 마당은 아름다운 조경수들과 잔디로 장식되어 있다. 법당은 5칸 규모의 건물로서 내부에는 비로자나부처님이 봉안되어 있으며, 법당 앞에는 다양한 석물이 세워져 있다. 팔각정자는 유리문으로 둘러져 있어 안에 있으면 금수암 경내 전체를 살펴볼 수 있다.
반야암
극락암으로 오르는 길 오른쪽으로 난 골짜기 끝에 자리 잡고 있다. 20여 년 간 통도사 강주를 지내셨고, 현재 조계종 고시위원장을 맡고 계신 요산 지안스님이 1999년에 창건하였다. 영축산 동쪽 능선 울창한 소나무 숲에 둘러싸여 있어 경관이 수려하며 도량으로부터 산의 정상부가 올려다 보인다.
경내에는 법당인 반야보전과 서재 청향당, 누각 세진정, 그리고 요사채 지월당 등이 들어서 있으며 활암거사가 기도를 하며 신심으로 쌓아 놓은 돌탑은 소나무 아래에서 더욱 장엄하고 숭고하다.
또한 지안스님이 손수 심으신 갖가지 꽃과 나무가 계절을 이어가며 다양한 정취를 자아낸다. 반야보전은 네 귀퉁이에 흰 코끼리가 지붕을 떠받치고 있는 것이 특색이며 내부에는 석가모니 부처님과 관세음보살, 지장보살이 봉안되어 있다. 늘 푸른 소나무 숲 아래에는 칠 층 석탑과 오 층 석탑이 자리하고 있으며, 밤마다 달의 숨소리가 물소리와 어우러지는 고즈넉한 도량이다.
백련암
사명암에서 남쪽 숲 속으로 약 500m 떨어진 곳에 위치한 암자로 주위에는 울창한 수림과 은행나무로 인해 더욱 운치가 있다. 백련암은 공민왕 23년(1374) 월화대사에 의해 창건되었고, 인조 12년(1634) 현암대사에 의해 중건되었다. 법당의 현판은 백련사라고 하였으며 대한제국 말기에는 남방의 선찰로 써 유명하였던 곳이다. 법당과 광명전, 영월루, 장경각 안심당 등이 자리하고 있다. 또한 1863년 조성된 백련암 석가모니후불탱, 1864년 백련암 신중탱, 1889년 백련암 지장시왕탱 등이 문화재로 지정되었으며, 성보박물관으로 이운 보관 중이다.
백운암
사명암에서 남쪽 숲 속으로 약 500m 떨어진 곳에 위치한 암자로 주위에는 울창한 수림과 은행나무로 인해 더욱 운치 있다. 백련암은 공민왕 23년(1374) 월화대사에 의해 창건되었고, 인조 12년(1634) 현암대사에 의해 중건되었다. 법당의 현판은 백련사라고 하였으며 대한제국 말기에는 남방의 선찰로 써 유명하였던 곳이다. 법당과 광명전, 영월루, 장경각 안심당 등이 자리하고 있다. 또한 1863년 조성된 백련암 석가모니후불탱, 1864년 백련암 신중탱, 1889년 백련암 지장시왕탱 등이 문화재로 지정되었으며, 성보박물관으로 이운 보관 중이다.
보타암
통도사의 암자 중 유일하게 비구니스님들의 처소로 통도사 해장보각을 지나 왼쪽으로 300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비로암
극락암에서 북쪽으로 약 500m 떨어진 곳에 자리한 암자로 고려 충목왕 원년(1345) 영숙대사가 창건하였다고 전한다. 그 후 선조 11년(1578) 태흠대사가 중건하였고 다시 근래 원명화상이 중수를 하였다. 비로암에는 1899년과 1904년에 조성된 아미타구품탱 곡성탱 산신탱 조왕탱 들이 경남유형문화재 제354호로 지정되어 있어 당시 많은 불사가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법당과 더불어 북두칠성 신앙을 반영한 북극전이 있으며, 현재 성보박물관으로 이운 되었으나 북극전에 봉안되었다.
사명암
서운암에서 서쪽으로 약 400m 떨어진 곳에 위치한 암자로 사명대사가 이곳에 토굴을 짓고 수도하면서 통도사의 금강계단을 수호한 곳으로 전해진다. 선조 6년(1573)에 사명대사를 존경한 이기신백 두 스님이 암자를 지었다고 전한다.
사명암은 아미타부처님을 모신 극락보전과 칠성전, 해탈문 등과 함께 연못이 어우러진 일승대가 한껏 운치를 더하고 있다. 사명암 감로탱을 비롯하여 1917년 조성된 석가모니후불탱과 1918년 조성된 신중탱이 성보박물관에 이운되어 보관 중이다. 또한 사명암은 통도사. 수덕사. 화엄사, 안압지, 분황사, 불국사 등 전국 주요 사찰과 경복궁 향원정, 우정국 진열실, 남한산성등 우리나라 주요 건물의 단청을 담당하였던 중요무형문화재 제48호 혜각스님이 주석하던 곳으로 현재 성보박물관에는 혜각스님이 소장하고 있던 많은 서화류들이 기증 보관 중이다.
자장암
자장암은 통도사의 창건주 자장율사가 수도 하던 곳이다. 창건연대는 미상이나 회봉대사에 의하여 중창되었다고 하며, 1963년 용복화상이 중수하였다. 법당은 암벽을 의지하여 서향 하였고 그 옆에는 1896년에 조각된 약 4m의 거대한 마애불이 있다. 법당 뒤쪽 암벽에는 석간수가 나오는데 자장율사가 손가락으로 바위에 구멍을 뚫어 금개구리를 살게 하였다는 소위 금와공이 있어 유명하다.
이능화의 ‘조선불교통사’ 하권 승유어급현화금와조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축서산 통도사의 자장암 곁의 커다란 암벽에 손가락 하나가 들어갈 만한 구명이 있는데 그 속에 작은 개구리가 있다. 몸은 청색이고 입은 금색인데 어떤 때는 벌이 되기도 하여 그 변화하는 것을 헤아릴 수 없다. 여름철에 바위가 과열되면 뜨겁기가 솥과 같으나 그 위를 자유로이 뛰어다닌다. 사승이 이를 일러 금개구리라 하더라.
그런데 이 금개구리는 도무지 산문 밖을 나가지 아니한다고 하므로 한때 어떤 관리가 그 말을 믿지 아니하고 그 개구리를 잡아함 속게 넣어 단단히 닫고서 손으로 움켜쥐고 돌아가다가 도중에 열어보니 없어졌다. 세간에 전하기를 그 개구리는 자장율사의 신통으로 자라게 한 것이라 말한다.” 현재 자장암에는 관음전과 수세 전, 자장전이 위치하며, 관음전에는 관세음보살과 영산회상도, 신중탱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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