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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산사

태고총림 조계산 선암사 (太古叢林 曹溪山 仙巖寺)

by 햇살과 뜨락 2023. 7. 13.

태고총림 조계산 선암사 (太古叢林 曹溪山 仙巖寺)

 

선암사의 역사

 

  임제선풍의 대쪽 같은 승풍을 고고하게 지켜온 청정도량, 선암사는 전라남도 순천시에 있는 고찰로 신라시대에 창건되었다. 542년(진흥왕 3) 아도가 비로암으로 창건하였다고도 하고, 875년(헌강왕 5)도선국사가 창건하고 신선이 내린 바위라 하여 선암사라고도 한다.

  경내에는 보물 삼층석탑과 대웅전 등 다수의 중요 문화재가 있어 역사적 가치가 큰 만큼 2009년 12월 21일 사적 제507호로 지정하였다. 현재는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절집으로 유명하다. 백제성왕 5년(527) 현재의 비로암지에 초창주 아도화상께서 선암사를 창건하였고, 산명을 청량산 사찰명을 해천사라 하였다. 이창주 도선국사께서 현 가람 위치에 절을 중창하고 1철불 2보탑 3부도를 세웠으며, 지금도 1철불, 2보탑, 3부도가 전해지고 있다. 삼창주 의천대각국사께서 대각암에 주석하시면서 선암사를 중창하였다. 대각국사 중창건도기에 의하면 당시의 중창은 법당 13, 전각 12, 요사 26, 산암 19개소 등의 방대한 규모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이후 고려시대의 기록은 김극기(1171년~1197년)의 시에 의해 '적막하고 고요한 수행의 사찰'로 전해진다.


  조선 전기 선암사의 기록은 중종 35년(1540)년 일주문을 중수했다는 기록이 유일하다. 선암사도 다른 절과 마찬가지로 정유재란 당시 큰 피해를 입었는데 모든 전각이 불타고 철불, 보탑, 부도, 문수전, 조계문, 청측만이 남았다고 전해진다. 1660년에 경준, 경잠, 문정, 세 분의 대사에 의하여 대웅전을 세우는 등 8년간 괄목할 중수를 이뤘다. 그러나 전쟁 이전의 상태를 복구하는 것은 무리였다.
  선암사의 중창불사를 마무리하신 분은 호암약휴스님이었다. 호암스님은 승선교를 비롯하여 원통전 불조전 등을 만들었다. 중창 이후 법당 8, 전사 12, 중료 16, 산암 13, 부속암자로 선적암, 도선암 등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러나 영조 35년(1759) 봄에 선암사는 또 다시 화재를 만나 큰 피해를 입게 되었는데, 상월 새봉스님과 서악스님이 다음해인 1760년 재건 불사를 시작하였다. 이는 아도화상 이래 도선-의천-경잠-경준-문정-호암의 뒤를 이은 오창이라 할 수 있다.
  상월 새봉스님은 중창불사뿐 아니라 1734~1735년 두 차례에 거쳐 화엄대법회를 개최하였는데, 이 때 참가한 1287명의 명단이 선암사 해주록에 전해진다. 그리고 상월스님은 화재를 예방하기 위하여 1761년 산 이름을 청량산, 사찰명을 해천사로 개칭하였다.
  정조 13(1789)년에 임금이 후사가 없자 눌암스님이 선암사 원통전에서, 해붕스님이 대각암에서 100일 기도를 하여 1790년 순조임금이 태어났다. 이후 왕위에 오른 순조임금은 인천대복전 편액과 은향로, 쌍용문가사, 금병풍, 가마 등을 선암사에 하사했다.
  순조 22년(1798)에는 승중문음으로 유명한 해붕전령이 칠전을 중창하였다. 순조 23년(1823) 3월 30일 대웅전을 비롯한 여러 동의 건물이 불에 타자 다음해부터 해봉, 눌암, 익종스님 등이 제6 중창불사를 하여 현재의 가람의 규모를 갖추었다. 그리고 산명과 사명을 다시 복칭하기에 이르렀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호남을 대표하는 함명태선-경붕익운-경운원기-금봉기림 등의 4대 명강백을 배출하였습니다. 1919년 본발사법에 의하여 전국 사찰을 30본산으로 지정했을 때 선암사는 전남의 4본산 중 하나로 지정되어 순천, 여수, 광주 지역의 사찰을 관장하였다. 현재 선암사는 태고종 유일의 총림인 태고총림으로서 강원과 선원에서 수많은 스님들이 수행정진하는 종합 수도 도량의 역할을 이어가고 있다.

 

 

선암사의 가람배치

 

  조계산의 동편에 자리한 선암사는 전체적으로 지세에 따라 남동향하고 있다. 중심축 선상에 일주문, 범종루, 만세루, 대웅전을 배치한 선암사는 대웅전영역 외에도 여러 개의 영역으로 이루어져 있다. 대웅전 좌우에는 심검당과 설선당을 중심으로 하는 요사들이 배치되어 있고, 대웅전 후면에는 원통전과, 조사전, 불조전, 팔상전으로 형성된 공간이 있다

  원통전 위쪽으로는 동서로 나란히 상선원과 정업원이 별도의 영역을 이루며 구성되어 있는데, 상선원에는 달마전, 미타전, 응진당, 진영각 등의 7개 전각을 배치하였고, 정업원에는 무우전과 각황전을 배치하였다. 대웅전 서편에는 무량수전과 창파당 영역이, 설선당 앞쪽으로는 성보박물관이 자리하고 있다. 선암사는 중심축을 따라 후면으로 갈수록 건물의 기단이 높아지도록 계획하였으나, 그 단차이가 그다지 크지는 않다.

  오랜 역사를 지닌 선암사는 화재와 중창으로 여러 번 변화를 겪었지만 비교적 옛 배치를 따르고 있는데, 현재 남은 건물들의 배치는 1824년에 이루어진 제6창 때와 비교적 흡사한 모습이라고 한다.조계산의 동편에 자리한 선암사는 전체적으로 지세에 따라 남동향하고 있다. 중심축 선상에 일주문, 범종루, 만세루, 대웅전을 배치한 선암사는 대웅전영역 외에도 여러 개의 영역으로 이루어져 있다. 대웅전 좌우에는 심검당과 설선당을 중심으로 하는 요사들이 배치되어 있고, 대웅전 후면에는 원통전과, 조사전, 불조전, 팔상전으로 형성된 공간이 있다. 원통전 위쪽으로는 동서로 나란히 상선원과 정업원이 별도의 영역을 이루며 구성되어 있는데, 상선원에는 달마전, 미타전, 응진당, 진영각 등의 7개 전각을 배치하였고, 정업원에는 무우전과 각황전을 배치하였다. 대웅전 서편에는 무량수전과 창파당 영역이, 설선당 앞쪽으로는 성보박물관이 자리하고 있다. 선암사는 중심축을 따라 후면으로 갈수록 건물의 기단이 높아지도록 계획하였으나, 그 단차이가 그다지 크지는 않다.

  오랜 역사를 지닌 선암사는 화재와 중창으로 여러 번 변화를 겪었지만 비교적 옛 배치를 따르고 있는데, 현재 남은 건물들의 배치는 1824년에 이루어진 제6창 때와 비교적 흡사한 모습이라고 한다.

 

  

선암사의 주요 문화재

선암사 동종 (仙巖寺 銅鍾)

  높이가 120㎝에 이르는 비교적 대형 작품에 속하는 이 종은 종신에 새겨진 명문에 의하면 1700년(강희 39) 조계산 선암사 대종으로 800근의 중량을 들여 개주(改鑄)한 것이라 기록되어 있지만 이 때 새로이 주조된 것으로 이해된다. 특히 김상립(金尙立)의 아들 김수원(金守元), 도편수(都片手) 김성원(金成元), 부편수(副片手) 김효건(金孝建), 김성원의 아우 김섬태(金暹泰) 등 18세기에 활동했던 김상립과 그의 아들 등의 이름이 나열되어 있어 당시 김상립을 중심으로 한 사장계(私匠系)의 활동 상황을 엿볼 수 있는 첫 번째 작품으로 의미가 깊다.
  이 종은 종의 형태가 조선후기의 전형을 이루고 있음은 물론, 활기찬 쌍룡뉴와 연곽대, 보살상과 왕실 안녕을 기원하는 문구가 담겨 있는 전패 등 각 부의 문양이 섬세하면서도 전체적으로 조형성을 잘 갖춘 작품이다.

 

선암사 동종 (仙巖寺 銅鍾)

  이 종은 원래 보성군 대원사 부도암 중종(中鍾)으로 주조된 조선시대의 대표적 주종장인 김용암(金龍岩)이 1657년에 주성한 종이다. 전반적으로 종신(鍾身)의 비례가 적당하고 안정감이 있으며 문양도 섬세하다. 종 고리는 두 마리 용이 각기 한 발을 들어 보주를 받쳐 든 생동감 넘치는 쌍용뉴(雙龍鈕)를 채용하였으며, 범자가 장식된 천판의 복련문대, 상·하대의 범자문대(梵字紋帶)와 연화문대(蓮花紋帶), 정연한 연곽(蓮廓)과 연화당초문대, 제석·범천상과 왕실안녕 발원의 위패 등에 이르기까지의 각 세부 표현에 있어서도 솜씨가 매우 뛰어나다. 담양 용흥사종과 함께 김용암 동종의 두드러진 특징이 잘 드러나 있는 17세기의 수작이다.

 

순천 선암사 동ㆍ서 삼층석탑

  선암사는 신라의 아도화상이 개창하여 비로암이라고 하였다고 하나 헌강왕 때에 도선(道詵)이 창건하여 선암사라고 하였다는 설이 더 믿을 만하다. 절 서쪽에 높이가 10여 장(丈)이나 되고 면이 평평한 큰 돌이 있는데, 사람들은 옛 선인이 바둑을 두던 곳이라고 하여, 이 때문에 ‘선암(仙岩)’이라는 절이름이 생겼다고도 한다. 절 안의 승선교를 지나 마당에 들어서면 대웅전 앞에 좌우로 3층석탑 2기가 서있다. 2단으로 이루어진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형태이다. 규모와 수법이 서로 같아서 같은 사람의 솜씨로 동시에 세워진 것임을 알 수 있다.
  기단의 각 면에는 모서리와 가운데에 하나씩의 기둥 모양을 새기고, 각 기단의 윗면에는 3층의 굴곡을 이룬 괴임돌을 두어 윗돌을 받치고 있다. 탑신은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하나의 돌로 되어 있고, 몸돌 모서리에는 기둥 모양이 새겨져 있다. 지붕돌은 처마밑이 수평이고 밑받침은 각 층이 4단이다. 지붕돌 정상에는 2단의 굴곡을 이룬 괴임이 있는데, 지붕돌에 이와 같은 수법을 한 것은 희귀한 일이다. 탑의 머리장식으로는 노반(露盤:머리장식받침)이 남아 있고 그 위에 작은 석재들이 놓여 있다.
  이 두 탑은 완전히 동일한 수법으로 만들어졌으며, 각 부에 다소의 손상을 입기는 했으나 규율성이 느껴진다. 위와 아래의 비율도 건실하고 우아하며 신라시대 석탑의 전형 양식을 잘 계승하고 있다. 다만 기단의 가운데기둥 조각이 하나로 줄고 지붕돌 밑면의 받침수도 각 층 4단으로 줄어 신라 중기 이후인 9세기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선암사는 신라의 아도화상이 개창하여 비로암이라고 하였다고 하나 헌강왕 때에 도선(道詵)이 창건하여 선암사라고 하였다는 설이 더 믿을 만하다. 절 서쪽에 높이가 10여 장(丈)이나 되고 면이 평평한 큰 돌이 있는데, 사람들은 옛 선인이 바둑을 두던 곳이라고 하여, 이 때문에 ‘선암(仙岩)’이라는 절이름이 생겼다고도 한다.
  절 안의 승선교를 지나 마당에 들어서면 대웅전 앞에 좌우로 3층석탑 2기가 서있다. 2단으로 이루어진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형태이다. 규모와 수법이 서로 같아서 같은 사람의 솜씨로 동시에 세워진 것임을 알 수 있다.
  기단의 각 면에는 모서리와 가운데에 하나씩의 기둥 모양을 새기고, 각 기단의 윗면에는 3층의 굴곡을 이룬 괴임돌을 두어 윗돌을 받치고 있다. 탑신은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하나의 돌로 되어 있고, 몸돌 모서리에는 기둥 모양이 새겨져 있다. 지붕돌은 처마밑이 수평이고 밑받침은 각 층이 4단이다. 지붕돌 정상에는 2단의 굴곡을 이룬 괴임이 있는데, 지붕돌에 이와 같은 수법을 한 것은 희귀한 일이다. 탑의 머리장식으로는 노반(露盤:머리장식받침)이 남아 있고 그 위에 작은 석재들이 놓여 있다.
  이 두 탑은 완전히 동일한 수법으로 만들어졌으며, 각 부에 다소의 손상을 입기는 했으나 규율성이 느껴진다. 위와 아래의 비율도 건실하고 우아하며 신라시대 석탑의 전형 양식을 잘 계승하고 있다. 다만 기단의 가운데기둥 조각이 하나로 줄고 지붕돌 밑면의 받침수도 각 층 4단으로 줄어 신라 중기 이후인 9세기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선암사 대웅전 (仙巖寺 大雄殿)

  조계산 선암사는 백제 성왕 7년(529)에 아도화상이 비로암이라 하였던 것을 통일신라 헌강왕 5년(875) 도선국사가 선암사라 고쳐 불렀다. 이후 고려시대 대각국사 의천이 더욱 크게 하여 대가람을 이루었다고 한다.
  대웅전은 조선시대 정유재란(1597)으로 불에 타 없어져 현종 1년(1660)에 새로 지었다. 그 후 영조 42년(1766)에 다시 불탄 것을 순조 24년(1824)에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석가모니불을 모신 대웅전은 선암사의 중심 법당으로, 그 앞에 만세루와 주축을 이루고 있으며 앞마당에는 순천 선암사 동ㆍ서 삼층석탑(보물 제395호) 2기가 나란히 서 있다.
  앞면 3칸·옆면 3칸 규모의 대웅전은 자연석 기단 위에 민흘림 기둥을 세워 지어졌는데 기둥머리에는 용머리 장식을 하였다.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화려한 겹처마 팔작지붕집으로 지붕 처마를 받치면서 장식을 겸하는 공포가 기둥 위 뿐만 아니라 기둥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식이다. 공포를 앞뒤면에는 각 3조, 양 옆면에는 각 2조씩을 배치하여 장엄하면서도 화려함을 나타내었다. 특히 건물 안쪽 공포 구조에서는 화려한 연꽃 봉오리 장식으로 마감하여 조선 후기의 화려하고 장식적인 수법을 나타내고 있다.
  선암사 대웅전은 다포계의 일반적인 수법을 따랐으나 화려한 건축양식과 장식성에서 조선 후기 중건 당시의 면모를 잘 간직하고 있어 학술적·역사적으로 중요한 가치가 있다.조계산 선암사는 백제 성왕 7년(529)에 아도화상이 비로암이라 하였던 것을 통일신라 헌강왕 5년(875) 도선국사가 선암사라 고쳐 불렀다. 이후 고려시대 대각국사 의천이 더욱 크게 하여  대가람을 이루었다고 한다.
  대웅전은 조선시대 정유재란(1597)으로 불에 타 없어져 현종 1년(1660)에 새로 지었다. 그 후 영조 42년(1766)에 다시 불탄 것을 순조 24년(1824)에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석가모니불을 모신 대웅전은 선암사의 중심 법당으로, 그 앞에 만세루와 주축을 이루고 있으며 앞마당에는 순천 선암사 동ㆍ서 삼층석탑(보물 제395호) 2기가 나란히 서 있다.
  앞면 3칸·옆면 3칸 규모의 대웅전은 자연석 기단 위에 민흘림 기둥을 세워 지어졌는데 기둥머리에는 용머리 장식을 하였다.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화려한 겹처마 팔작지붕집으로 지붕 처마를 받치면서 장식을 겸하는 공포가 기둥 위 뿐만 아니라 기둥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식이다. 공포를 앞뒤면에는 각 3조, 양 옆면에는 각 2조씩을 배치하여 장엄하면서도 화려함을 나타내었다. 특히 건물 안쪽 공포 구조에서는 화려한 연꽃 봉오리 장식으로 마감하여 조선 후기의 화려하고 장식적인 수법을 나타내고 있다.
  선암사 대웅전은 다포계의 일반적인 수법을 따랐으나 화려한 건축양식과 장식성에서 조선 후기 중건 당시의 면모를 잘 간직하고 있어 학술적·역사적으로 중요한 가치가 있다.

 

 

선암사 승선교

  선암사의 부도(浮屠)를 지나 경내에 이르면 시냇물을 건너야 되는데 그 건널목에 놓인 다리가 승선교이다. 시냇물의 너비가 넓은 편이라서 다리의 규모도 큰 편인데, 커다란 무지개 모양으로 아름답게 놓여있다.
  기단부(基壇部)는 자연 암반이 깔려 있어 홍수에도 다리가 급류에 휩쓸릴 염려가 없는 견고한 자연 기초를 이루고 있다. 다리의 아래부분부터는 길게 다듬은 돌을 연결하여 무지개 모양의 홍예(虹霓)를 쌓았으며, 그 짜임새가 정교하여 밑에서 올려다보면 부드럽게 조각된 둥근 천장을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홍예를 중심으로 양쪽 시냇가와의 사이는 자연석을 쌓아 석벽을 이루고 그 윗부분에도 돌을 쌓았는데, 모두 주변의 냇돌을 이용하였다. 다리 한복판에는 용머리를 조각한 돌이 밑으로 삐죽 나와 있어 장식적 효과를 주고 있는데, 예로부터 이것을 뽑아내면 다리가 무너진다고 전해오고 있다.
  임진왜란 이후 불에 타서 무너진 선암사를 중건할 때 이 다리를 놓은 것으로,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진다. 조선 숙종 24년(1698) 호암대사가 관음보살의 모습을 보기 바라며 백일기도를 하였지만 그 기도가 헛되자 낙심하여 벼랑에서 몸을 던지려 하는데, 이 때 한 여인이 나타나 대사를 구하고 사라졌다. 대사는 자기를 구해주고 사라진 여인이 관음보살임을 깨닫고 원통전을 세워 관음보살을 모시는 한편, 절 입구에 아름다운 무지개다리를 세웠다고 한다.
  무지개 모양으로 건설한 양식은 곧 보성 벌교 홍교(보물 제304호)와 같은데, 2개가 모두 지역적으로 가까운 곳에 있으므로 양식상 공통점이 있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다만 돌을 쓴 방식이나 마무리수법이 오래된 양식이며, 그 구조 또한 보다 웅장한 느낌을 주는 것으로 미루어 영조 때에 만들어진 벌교홍교보다 먼저 만들어진 것으로 짐작된다.

 

선암사 북 승탑 (仙巖寺 北 僧塔)

  승탑은 승려의 무덤을 상징하여 그 유골이나 사리를 모셔두는 곳이다. 이 승탑은 선암사 중심에서 북쪽으로 약 400m 지나 한적한 산중턱의 선조암이라는 암자에 세워져 있다. 3개의 받침돌로 이루어진 기단(基壇) 위로 탑신(塔身)을 올려 놓았으며, 각 부분이 8각으로 이루어져 있다.
  기단은 아래받침돌에 사자상과 구름무늬를 조각했고, 가운데받침돌에는 안상(眼象)을 얕게 새겼으며, 윗받침돌에는 8장의 연꽃잎을 큼직하게 새겨 놓았다. 탑신의 몸돌은 모서리에 기둥 모양의 조각이 있고, 앞뒷면에 자물쇠가 달린 문짝 모양을 새겨두었으며, 앞면 양 옆으로 인왕상(仁王像)을 배치했다. 투박해 보이는 지붕돌은 여덟 곳의 귀퉁이마다 큼직한 꽃장식이 솟아 있다.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으로 보륜과 보주(寶珠:연꽃봉오리모양의 장식)가 남아 있다.
  이 승탑은 사자상, 구름모양, 연꽃, 인왕상 등을 새긴 조각 양식과 수법으로 보아 고려 전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선암사 동 승탑(仙巖寺 東  僧塔)

  승탑은 승려의 무덤을 상징하여 그 유골이나 사리를 모셔두는 곳이다. 선암사 무우전 뒷편의 능선을 따라 동북쪽으로 약 200m 올라가면 이 승탑이 보이는데, 사찰 안에 있는 3기의 고려시대 승탑 중 하나로, 규모가 크고 각 부분이 8각으로 이루어진 모습이다.
  기단부(基壇部)는 8각의 바닥돌 위에 안상(眼象)을 새긴 괴임대를 마련하여 구름무늬를 조각한 아래받침돌을 올려 놓았다. 가운데받침돌과 윗받침돌은 하나의 돌로 이루어져 있으며 물결무늬와 연꽃무늬로 장식되어 있다. 탑신(塔身)의 몸돌은 윗부분이 좁아진 사다리꼴 모양으로, 앞면에는 봉황이 새겨진 문의 양 옆을 지키는 인왕상(仁王像)을 새겨 두었고, 뒷면에는 문고리가 달린 문짝을 조각해 두었다. 지붕돌은 얇고 넓으며, 여덟 곳의 귀퉁이마다 꽃장식이 달려있다. 꼭대기에는 갖가지 모양의 머리장식이 차례로 놓여 있다.
  통일신라시대의 8각 승탑 양식을 착실하게 따르고 있는 작품으로, 각 부분의 만든 솜씨로보아 고려 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측된다.

 

 

선암사의 주요 산내 암자

  선암사 산내 암자는 현재 4곳으로, 대각암, 비로암, 운수암, 대승암이다. 조선 후기에는 13곳 이상의 암자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1707년(숙종 33) 채팽윤(蔡彭胤)이 찬술하고 이진휴(李震休)가 글씨를 쓴 「조계산선암사중수비」에 의하면, 당시 선암사에 상주하는 승려가 250인, 법당 8위, 전사 12위, 요사채 16위이며, 산내 암자로 13처가 있고, 부속 암자로 용안산(龍眼山) 선적암(善積庵)과 운동산(雲動山) 도선암(道詵庵)이 있다고 하였다. 즉 18세기 초에는 13곳의 산내 암자가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실제로 여러 기록에서 선조암(善助庵), 향로암(香爐庵), 청련암(靑蓮庵), 무성암(無性庵), 수도암(修道庵), 백련암(白蓮庵) 등의 암자명이 확인된다. 특히 선암사성보박물관에는 선조암의 불화가 소장되어 있으며, 1691년(숙종 17) 향로암에서는 만각(晩覺)이 ‘사분율칠취대목초(四分律七聚大目抄)’와 ‘불설우바새오계상경(佛說優婆塞五戒相經)’을 1책으로 묶어 『사분률약목(四分律略目)』이라는 책을 간행하기도 했다.

 

대각암

  대각암은 대각국사 의천(義天)이 머물렀고 또 대각국사 의천의 승탑[순천 선암사 대각암 승탑, 보물 제1117호]이 있어 붙여진 이름으로 보인다. 1644년(인조 22)에 탄원(坦元)이 중창(重創)하고, 1735년(영조 11)에 벽천(碧川)이 3창, 1939년 춘광과 성암 등이 4창하였다. 법당이 있는 건물은 맞배지붕과 팔작지붕을 이은 ‘ㄱ’자 형태이며 승방이 함께 있다. 그 맞은편 아래쪽에 대선루(待仙樓)가 있는데, 1719년(숙종 45)에 처음 짓고 1860년(철종 11)에 중수했다.

 

비로암

  비로암은 대각암에서 북서쪽으로 약 1㎞가량 급한 경사를 올라가서 팔부능선에 있다. 비로암은 선암사의 모태로서 아도화상(阿道和尙)이 창건하여 ‘해천사(海川寺)’라고 불렀다고 한다. 정유재란 때 소실되었는데, 1652년(효종 3) 탄원(坦元)이 중수하였고 침굉(枕肱) 현변(懸辯;1616~1684)이 주석하였다. 그리고 19세기 대강백이었던 경운(擎雲) 원기(元奇:1852~1936)가 비로암에서 『화엄경』을 사경하여 6년 만에 완성하였는데, 이때 한 글자를 사경할 때마다 일배(一拜)했다고 전한다.

 

운수암

  운수암은 ‘북암’이라 불리는데 운수납자(雲水衲子)들이 수행하는 곳이라 하여 ‘운수암’이라고 이름 붙였다고 한다. 조선 후기에는 해붕, 월파, 다오, 벽파, 청호 등 강백들이 거처하며 대승암[남암]에 겨룰 만한 강원을 운영했으나 일제강점기와 조계종과의 분규를 거치며 거주하는 승려가 거의 없게 되었다. 그런데 만성화상이 최일 월광 보살과 최일 심화 보살의 도움을 받아 1979년 초겨울부터 불사를 시작하여 1980년 겨울까지 1년에 걸쳐 암자를 복구했으며, 1997년에 그 중창비를 세웠다.

 

대승암

  대승암은 ‘남암’이라 불리는데 순천 선암사를 대표하는 강원이 있던 곳이다. 대승암 강원이 본격적으로 발전한 것은 상월(霜月) 새봉(璽封:1687~1767)이 1754년(영조 30) 화엄대회를 개최한 이후로 보인다. 특히 침명(枕溟) 한성(翰醒:1801~1876)이 1829년(순조 29)부터 선암사 대승암 강원(講院)에서 약 30년 동안 후학들을 가르침으로써 더욱 번창하였다. 침명 한성의 전강(傳講)제자는 함명(函溟) 태선(太先)이었고, 함명 태선은 1866년(고종 3) 가을에 경붕(景鵬) 익운(益運)에게 강학을 전하였다. 또 경붕 익운은 경운(擎雲) 원기(元奇)에게 강학을 전하고, 경운 원기는 금봉(錦峰) 병연(秉演)에게 전하여 대승암의 강맥이 근세까지 이어짐으로써 호남 지역을 대표하는 4대 강맥으로 평가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