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화산(泰華山) 마곡사(麻谷寺)
충청남도 공주시 사곡면 운암리의 동쪽 산허리에 자리 잡은 마곡사는 대한불교 조계종의 제6교구 본사이다. ‘春마곡, 秋갑사’란 말에서 알 수 있듯이 봄볕에 생기가 돌면서 절집을 움트게 한다. 태화산은 새로 움튼 나무들의 싹들과 화려함을 감추지 못한 봄꽃들이 어울려 아름다움을 다툰다. 마곡사 사적입안의 기록에 따르면 ‘마곡사는 640년 백제 무왕 41년 신라의 고승 자장율사가 창건한 것’으로 전해오고 있으며 고려 명종 때인 1172년 보조국사가 중수하고 범일대사가 재건하였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도 세조가 이 절에 들러 ‘영산전(靈山殿)’현판을 사액(賜額) 한 일이 있었다.
신라의 고승 자장 율사가 창건할 당시만 하더라도 30여 칸에 이르는 큰 절집이었으나 지금의 마곡사는 대웅보전(보물)을 비롯한 대광보전, 영산전(보물), 사천왕문, 해탈문 등의 전각들이 아담하게 가람을 이루고 있다. 이 밖에 도량의 성보로 오층석탑(보물)과 범종, 괘불 1폭, 목패, 세조가 타던 연, 청동향로가 있으며 감지금니묘볍연화경 제6권(보물), 감지은니묘법연화경 제1권(보물)이 보존되어 있다.
태화선원(泰華禪院)
마곡사에는 태화선원(泰華禪院)이 있다. 마곡사 들어서서 해탈문과 천왕문 사이에 왼쪽으로 담장을 둘러친 곳이 있고 그 곳에 오래된 전각이 있는데 이를 영산전(靈山展)이라 한다. 그 앞으로는 흥성루(興聖樓)라는 누각이 있고 그 옆으로 아담하게 ㄷ자 형의 전통건물이 있는데, 이곳이 바로 태화선원이다. 태화선원은 그리 오랜 전통은 갖지 못했지만 해마다 하안거와 동안거에는 몇몇의 수좌 스님들이 찾아와 정진을 하는 곳이다. 특히 선원 위로 군왕대가 있고 이곳을 세조임금이 ‘만세불망지지(萬世不忘之地)’라 부를 만큼 기가 융성한 곳이라서 장부일대사(丈夫一大事)를 해결하려는 선객들의 해안이 번쩍이는 곳이다.
선원(禪院)은 좌선 수행을 하는곳으로 좌선방(坐禪房)이라고도 불리며 이곳에서 정진하는 스님을 수좌로 부른다. 한국의 불교에서는 강원과 함께 전통적인 승려 교육기관으로서의 의미를 지니고 있지만 원칙적으로는 일정한 교육기간이 정해져 있지 않고, 강원 수료자가 들어가 자율적으로 수행하는 높은 단계의 평생 수행의 장이라 할 수 있다.
선원은 수행이 자율적인 대신 그 규율은 엄격하여 파계나 나태한 행위는 일절 금지되며 대중이 규약 한 규칙을 엄하게 지키는데, 이를 대중청규(大衆淸規)라 한다. 선원의 전통적인 수행방법은 스스로 진리를 탐구하는 것이며, 초하루와 보름에 삭발식과 함께 조실 또는 선지식(善知識)의 설법을 듣는다. 참구 하는 도중 의심이 생기면 조실 또는 선원장에게 찾아가 질문하여 의심을 푼다.
한국 선불교의 전통은 화두(話頭)를 가지고 이를 해결하는데 전심전력을 기울이는데 이를 간화선(看話禪)이라고 한다. 화두란 한자 그대로는 ‘말머리’라고 할 수 있지만 실제로는 일반 범부의 사량으로는 도저히 답을 낼 수 없는 의심 덩어리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화두를 든 수행자는 스스로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는 은산철벽(銀山鐵壁)에 자신을 가두고 그곳을 빠져나오기 위한 다함없는 정진을 하는 것을 말하며 이렇게 정진하는 곳이 곧 선원이다.
우리나라의 선원은 정기적으로 일정한 기간 동안 단체로 수행하는 안거(安居) 수행을 하는데 여름철 즉 음력 4월 15일에서 7월 15일까지를 하안거라 하고 겨울철 음력 10월 15일에서 다음 해 1월 15일까지를 동안거라 한다.
마곡사의 주요유적과 유물
대웅보전
2층으로 된 대웅보전은 통층으로 되어 싸리나무 고주가 네 개 있는데, 여기에 흥미로운 설화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사람이 죽어 저승의 염라대왕 앞에 가면 그대는 마곡사 싸리나무 기둥을 몇 번이나 돌았느냐?’고 묻는다 한다. 그 이유는 많이 돌수록 극락길이 가깝기 때문이다. 아예 돌지 않았다고 하면 지옥에 떨어지는 것이다. 또 이생에서 아들이 없는 사람에게 마곡사의 싸리나무 기둥을 안고 돌면 아들을 낳는다고 한다.
대웅전 혹은 대웅보전은 법화경에 석가모니 부처님을 큰 영웅이라 한 데서 유래한 것으로 석가모니 부처님이 주석하는 집이라는 뜻이다. 마곡사 대웅보전은 석가모니 부처님을 중심으로 양 옆에 약사여래부처님과 아미타부처님이 모셔져 있다. 이때의 부처님들은 공간적으로 과거, 현재, 미래의 삼세(三世)를 대표하므로 삼세불이라고 부른다.
대광보전
'내가 가진 업보가 그 얼마나 큰데 감히 부처님께 그런 소원을 빌다니! 얼마나 더 공덕을 쌓아야 그동안 지은 억겁의 죄업을 다 씻을 수 있을 것인가, 슬프도다. 슬프도다.’ 지난 100일 동안의 기도 끝에 깨달은 것은 첫째도 참회요, 둘째도 참회였다. 그러한 나날이 계속될수록 그는 걷게 되는 것을 염원하기보다는 길가에 무심히 핀 들꽃이 소중하고 그것이 살아있음을, 내가 살아있음을 느끼며 그 무엇에 건 감사하게 되었다. 들꽃과 함께 호흡하고 나를 느끼는 것 자체만으로도 그는 부처님께 감사했다. 일체의 삼라만상에 부처님의 자비를 회향하겠노라고 다짐하는 날이 늘어갔다. 그렇게 100일이 채워졌던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삿자리가 완성되었다. 그는 부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성치 않은 다리를 끌고 부처님께 기어가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지극한 마음으로 절을 올리고 법당을 나왔다. 그런데 이것이 어찌 된 일인가? 그가 걸어 나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자신도 전혀 의식하지 못한 채 그는 어느새 걷고 있었다. 그는 그 파란 하늘과 푸른 숲, 무심히 흐르는 마곡천을 바라보며 부처 님의 자비를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그는 다시 한 번 또 다짐했다. 이 같은 부처님의 자비를 하늘과 바람과 나무와 숲, 그리고 모든 살아있는 이들에게 회향하겠노라고, 그리하여 나누는 삶, 자비다.
대광보전은 마곡사의 중심 법당으로 1788년에 중창되었으며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대광보전 내부에는 비로자나 부처님이 건물 서쪽에서 동쪽을 바라보도록 특이하게 봉안되어 있다. 비로자나 부처님은 진리 자체를 상징하는 부처님으로, 진리의 몸이 온누리에 두루 비치는 광명의 빛을 내어 모든 이들을 지혜의 길로 이끌어 준다.
대광보전의 후불탱화는 영산회상도로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영축산에서 설법하는 장면을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다. 1788년 조성된 이 영산회상도는 석가모니 부처님을 중심으로 6대보살, 10대 제자, 용왕과 용녀, 사천왕으로 구성되어 있다.
비로자나 부처님 뒷벽에는 18세기 후반 조선회화의 특징을 그대로 살린 백의수월관음도가 봉안되어 있다.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환희심을 불러일으키는 관음보살님으로 이름 나있다.
영산전 : 영험한 기운이 응집되어 있는 영산전
“예가 어진 정승과 용맹스러운 장수를 만들어 낸다는 태화산 군왕대의 혈 자리라.”
마곡사의 영산전은 예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마곡사에서 가장 영험이 큰 전각으로, 특히 어진 정승과 용맹스러운 장수를 만들어 낸다는 군왕대의 모든 기운이 모여 있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나라의 큰일을 할 인재 배출을 원하는 많은 불자들이 부처님께 기도를 올리고 소원을 성취하고 있다. 영산전은 현재 남아있는 마곡사 건물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1650년에 중수돼 현재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영산전에는 고려시대에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목불 일곱 구가 남아있다. 사적입안의 기록에 따르면 영산전에는 세조의 친필인 방서도 전해 내려오고 있다고 한다. 영산전은 본래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인도의 영축산에서 법화경을 설하시던 당시의 광경인 영산회상을 재현해 모신 곳으로, 석가모니 부처님과 10대 제자, 16 나한 혹은 500 나한을 모시기도 한다. 그러나 유독 마곡사의 영산전에는 한가운데에 과거 칠 불을, 그 주위에 1000분의 부처님을 모셨다.
과거 칠 불이란 석가모니 부처님 이전에 이 세상에 출현하였다고 하는 일곱 분의 부처님을 일컫는다.
명부전
죽음을 말하니 무섭다. 생자필멸(生者必滅)이라, 자연의 이치는 생(生)을 간직한 모든 이에게 평등하다. 죽음 역시 그렇다. 당신은 업보와 윤회에 대해 얼마나 확신하고 있는지 믿는다고 말하고 있지만 업보와 윤회에 대해 확신하지는 못하고 있다. 죽음에 대해 한 번 더 생각해 보면서 그동안의 업장을 참회하고 소멸하는 기도 처가 명부전이다. 지장보살은 지옥에서 고통받는 모든 중생들까지 다 구제할 것을 서원하신 보살이다.
그러하기에 지장보살님께 기도하면 과거와 현재의 모든 업보와 죄를 소멸할 수 있습니다. 지장보살님을 모시고 있는 명부전은 특히 군왕대의 좋은 기운이 모인 곳으로, 참회 정진에 특히 좋은 정진 터입니다. 마곡사의 명부전은 1939년 건립되어 오늘에 이르는 전각입니다. 건물에는 지장보살님을 중앙 불단에 모시고 있으며 좌우에 ‘ㄷ’ 자형의 불단을 만들어 저승의 심판관인 시왕님을 모셨다.
해탈문
해탈문은 마곡사의 정문이다. 태화산 남쪽 기슭에 자리 잡고 있다. 이 문을 지나면 속세를 벗어나 부처님의 세계 즉 법계(法界)에 들어가게 되며 ‘해탈을 하겠다’는 원력을 갖게 된다고 한다.
두 번째 문인 마곡사 천왕문이 박공지붕집인 데 비해 해탈문은 추녀 밑에 처마의 하중을 받고 장식도 겸해 나무 쪽을 짜 맞춘 도구를 여러 개 배치한 겹처마 팔작지붕집이다. 건물은 정면 3칸에 측면 2칸으로, 기둥과 기둥 사이에는 모두 판장 벽으로 막았다. 공포(拱包)는 3 제공 형식으로, 제공 조두형(鳥頭形) 돋을새김을 하고 있으며 제공에는 연꽃을 조각하였다. 정면의 중앙 칸을 개방하여 통로로 사용하고 있으며 양편에는 금강역사상과 보현 및 문수동자상을 봉안하고 있다.
천왕문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되어 있는 1출목 익공식 공포를 짜 올리고 전후면 공포 사이에는 화반(花盤)을 하나씩 설치한 겹처마 맞배지붕으로 된 박공지붕집이다. 사방의 불법을 수호하는 호법신장인 사천왕상 (四天王像)을 조성해 안치했다. 건립 연대는 알 수 없으며 내부에 걸린 편액(篇額)에는 “1910년 6월에 중수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오 층 석탑
대광보전 앞에 위치한 오층석탑은 일명 다보탑 또는 금탑이라고도 부른다. 탑의 2층 네 면에는 소박한 솜씨로 ‘사방불’이 양각되어 있으며 상륜부에는 청동제인 풍마 등이 조성되어 있다. 라마식 보탑과 유사한 점으로 보아 원나라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사방불이란 동서남북의 방위개념으로 모든 방향을 포괄하는 상징이기도 하므로 사방불은 모든 공간에 부처님이 영원히 거주한다는 불신상주의 전형적인 모델이라 할 수 있다.
현재불에서 과거불과 미래불이라는 삼세불로의 확대는 시간을 횡으로 가르고 다시 공간적으로 투영되어 사방(四方), 팔방(八方), 시방(十方)에 현재불이 등장함으로써 현재의 다 방불, 천불, 삼 천불 사상으로 발전하게 된 것입니다. 이런 사상적 경향은 모든 중생이 본래 불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이 세상의 모든 존재가 이미 깨달은 상태에 있다는 내재불 사상으로 발전했습니다. 오 층 석탑에는 나라의 기근을 3일간 막을 수 있다는 전설도 전해 내 려오고 있습니다.
마곡사 현판
마곡사 현판은 근대 서화가인 해강(海剛) 김규진(金圭鎭. 1868~1933)의 글씨이다. 모든 서법에 자유로왔으며 특히 대필서(代筆書)가 당대에 독보적이었다고 한다. 현판 양쪽을 초화와 화훼로 꾸미고 초서로 썼다. 김규진의 본관은 남평, 자는 용삼(容三), 호는 해강이며, 그 외 백운거사 취옹 만이천봉주인 등 10여 개가 있다. 평남 중화 출생. 8세부터 장인 이소남에게 글씨를 배우고 18세 때 청(淸) 나라에 유학하여 서화의 명적을 연구하였다.
전서(專書), 예서(隸書), 해서(骸書), 행서(行書), 초서(草書)에 모두 묘경(妙境)을 이루었고, 산수화, 화조화를 잘 그렸으며 특히 난 죽은 절묘하였다. 그는 사군자도 즐겨 그렸고 글씨는 대자를 특히 잘 썼다. 영친왕이 은에게 서법을 가르쳤다. 한국 최초로 사진술을 도입하고 어전사진사가 되었다. 한편, 안중식(安仲植), 조석진(趙錫眞)과 함께 서화협회를 창설하여 후진을 양성하는 한편, 경향 각지에서 화전을 개최하여 서화 예술의 계몽에도 진력하였다.
대광보전 현판
시문서화 사절로 꼽히던 표암 강세황(姜世晃, 1712~1791)의 글씨이다. 약간 흘림체로 힘이 있고 유려하다.
본관은 진주(晋州)이며 어려서부터 재능이 뛰어나, 8세 때 시를 짓고, 13~14세 때는 글씨에 뛰어난 솜씨를 보여, 소년기에 쓴 글씨조차도 병풍을 만드는 사람이 있을 정도였다. 아버지의 사랑과 교육을 받았으며, 매형이었던 임정의 영향도 크게 받았다. 처남 유경종 외에도 허필, 이수봉 등과 절친하게 지냈으며, 이익, 강희언 등과도 교유하였다.
당대의 유명한 화가였던 김홍도·신위 등도 그의 제자이다. 벼슬에 뜻이 없어 젊은 시절에는 주로 작품활동에만 전념하였다. 32세 때 가난 때문에 안산(安山)으로 이주한 뒤에도 오랫동안 학문과 서화에만 전념하였다. 처음 벼슬을 한 것은 61세로, 영조의 배려에 힘입어 관계에 진출하게 되었다. 이후 64세 때 기고과(耆耉科), 66세 때 문신정시에 장원급제하였으며, 영릉참봉·사포별제(司圃別提)·병조참의·한성부판윤 등을 역임하였다. 72세 때 북경사행(北京使行), 76세 때 금강산 유람을 하고, 기행문과 실경사생 등을 남겼다. 시·서·화의 삼절로 불렀으며, 식견과 안목이 뛰어난 사대부 화가였다. 그 자신은 그림제작과 화평(畵評) 활동을 주로 하였는데, 이를 통해 당시 화단에서 ‘예원의 총수’로 한국적인 남종문인화풍을 정착시키는 데 공헌하였다.
이밖에도 진경산수화를 발전시켰고, 풍속화·인물화를 유행시켰으며, 새로운 서양화법을 수용하는 데도 기여하였다. 평생 동안 추구한 그의 서화의 세계는 궁극적으로 습기(習氣)도 속기(俗氣)도 없는 경지에 이르는 것이었다. 산수·화훼가 그림의 주소재였으며, 만년에는 묵죽으로 이름을 날렸다. 작품으로는 《첨재화보(添齋畵譜)》, 《벽오청서도》, 《표현연화첩》, 《송도기행첩》, 《삼청도》, 《난죽도》, 《피금정도》, 《임왕서첩(臨王書帖)》 등이 있으며, 54세 때 쓴 《표 옹 자지(豹翁自誌)》에 있는 자화상을 비롯하여 7~8폭의 초상화를 남겼다.
심검당 현판
심검당 현판은 정조 연간에 청백한 관리로 이름난 송하 조윤형(曺允亨, 1725~1799)의 글씨이다. 청빈한 그의 인품을 보여주듯 굵직하면서도 날카로운 느낌으로 '심검'이라는 의미와 상통하는 글씨체이다.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치행(穉行), 호는 송하 옹(松下翁). 할아버지는 판결사 조하기(曺夏奇)이며, 아버지는 개성부유수 조명교(曺命敎)이다.
문음(門蔭)과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1766년(영조 42) 처음 벼슬길에 나간 뒤 1781년(정조 5) 선공감주부가 되었으며, 1784년 예조정랑을 역임하였다. 이어서 선공감부정(繕工監副正)을 거쳐 보덕(輔德)이 되어 책례도감상례(冊禮都監相禮)를 겸하였다.
영산전 현판
영산전 현판은 세조가 1465년에서 1487년 사이에 마곡사에 들러 쓴 현판이라고 '마곡사 사적입안'에 기록되어 있으며 실제 현판에는 '세조어필 '이라고 쓰여 있다. 재위 1455년(세조 1)∼1468년(세조 14). 본관은 전주(全州). 이름은 이유(李瑈). 자는 수지(粹之). 세종의 둘째 아들이고 문종의 아우이며, 어머니는 소헌왕후 심 씨(昭憲王后沈氏)이다. 왕비는 정희왕후 윤 씨(貞熹王后尹氏)이다.
마곡사와 백범 김구
마곡사에는 백범 김구 선생이 머물다 간 백범당이라는 건물이 있고 그 옆으로는 김구 선생이 해방 후 1946년 여러 동지들과 이곳을 찾아와 기념식수를 한 향나무가 아직도 파랗게 자라고 있다.
백범선생은 마곡사를 떠난 지 근 50년 만에 돌아와 대광보전 기둥에 걸려있는 주련 却來觀世間 猶如夢中事(각래관세 간 유여몽중사 : 돌아와 세상을 보니 모든 일이 꿈만 같구나)라는 원각경에 나오는 문구를 보고 감개무량하여 이 향나무를 심었다 한다
동학교도에서 승려, 독립군, 상해 임시정부 초대 주석에 이르기까지 투쟁과 투옥 그리고 리고 망명으로 점철된 삶이었지만 언제나 해방된 조국, 하나 된 조국의 뚜렷한 목표가 변하지 않았다. 그래서 후대의 사람들은 선생의 고절한 생을 흠모하는 것이다.
선생은 명성황후가 시해된 1896년 일본군 중좌를 살해하고 살인범으로 낙인찍혀 인천교도소에서 사형수로 복역 중 그곳을 탈옥하여 1898년 마곡사에서 은신하다가 하은 땅이라 불리는 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여 법명을 원종(圓宗)이라 하였다.
백범일지에는 그의 출가에 대한 기록이 다음과 같이 기록되고 있다.
“사제(師弟) 호덕삼(扈德三)이 머리털을 깎는 칼(削刀을 가지고 왔다. 냇가로 나가 삭발진언을 쏭알쏭알 하더니 내 상투가 모래 위로 뚝 떨어졌다. 이미 결심을 하였지만 머리털과 같이 눈물이 뚝 떨어졌다. 출가 당시의 착잡했던 심경이 잘 묘사되어 있다. 지금도 마곡사에는 김구 선생이 삭발했던 바위가 있고 지금은 마곡사와 공주 시청이 이곳 삭발바위와 마곡천을 잇는 다리를 놓아 백범교라 부르고 그곳에서 마곡천 절경을 굽어보는 마곡사 또 다른 명소가 되었다. 또한 마곡사 생태농장에서 군왕대로 이어지는 <백범 솔바람 명상 길>을 두어 마곡사를 방문하는 사람들이 1시간가량 산보하기 좋다.
백범 선생이 지냈던 백범당에는 백범선생의 진영(眞影)과 1946년 마곡사를 방문했을 때 마을 사람들과 함께 찍은 사진이 걸려 있는데 백범 선생 뒤로는 왼쪽에는 완장을 찬 좌익이 서있고 오른쪽에는 넥타이를 맨 우익이 서있다. 이렇듯 백범선생은 사상보다는 하나 된 조국을 더 원하였다. 사진 옆에는 백범선생이 평생 좌우명으로 삼았던 친필 휘호가 있는데 그것은 서산대사의 선시로 다음과 같다.
눈 덮인 들판을 밟고 갈 적에
어지러이 걸어선 아니 되겠지
오늘 내가 걸었던 길을
뒷사람이 그대로 따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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