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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의 문화재 (동구)

허백련과 춘설헌(許百鍊과 春雪軒, 기념물 제5호)

by 햇살과 뜨락 2023. 6. 12.

허백련과 춘설헌(許百鍊과 春雪軒, 기념물 제5호)

광주 동구 증심사길 150-21(운림동)

  춘설헌은 한국화의 대가 의재 허백련이 해방 직후인 1946년부터 1977년까지 30년간 살면서 작품활동을 하던 곳이다.

허백련은 조선 후기 한국 남종화를 완성했던 허련의 후손으로, 허련의 아들 허형에게서 그림의 기본을 익히고, 일본과 서울에서 그림공부를 하면서 경험을 쌓았다. 1938년 전라도 광주에 정착하여 활동하면서 연진회를 발족하여, 전통서화와 후진 양성에 노력하였고, 삼애학원을 설립하여 농촌지도자를 육성하였다.

  또 일본인이 버리고 떠난 무등산의 차밭을 인수해 춘설다원을 경영하면서, 전통차의 재배와 보급에 힘썼다. 춘설헌은 1950년에 종래의 낡은 집을 헐고 벽돌로 새로 지은 건물로 마루에는 춘설헌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마루 왼쪽으로는 작품활동을 하던 2개의 방이 있는데, 하나는 온돌방이고 하나는 일본식 다다미방이다.  

  허백련의 춘설헌이전 건물인 석아정·오방정의 유래를 입증하는 유물로 판면에 쓰여진 석아는 언론인 최원순의 호이고, 건물주인 그가 자신의 호를 따서 집 이름을 석아정이라 하였다. 석아로부터 집을 물려받은 오방 최흥종(목사)이 집 이름을 오방정으로 개칭하고, 석아정 현판 뒷면에 '오방정'을 돋을 새김하게 하였다. 1986년 9월 26일 광주광역시 기념물 제5호로 지정된 광주광역시 동구 운림동 산 151번지에 자리잡은『허백련 춘설헌』은 1920년대 초반부터 최원순의 석아정으로, 1930년대 후반에는 최흥종의 오방정으로, 오방정이 다시 1946년 이후에 춘설헌으로 변천되었다.

 

의재 허백련(毅齋 許百練)

  의재 허백련(毅齋 許百鍊) 은 1891년에 전남 진도에서 태어나 1977년 자신이 운영하던 농업고등기술학교가 문을 닫을 때 지병인 심장병으로 87세에 사망하였다. 8세때 진도에 유배중이던 무정 정만조(茂停 鄭萬朝)의 서당에서 글공부를 시작했으며, 추사 김정희의 제자 소치 허련이 만든 진도의 운림산방에서 소치의 아들 미산 허형문하에 들어가 11살때 부터 그림공부를 시작하였다.

  의재란 호는 의재가 15세 되던 해 스승인 정만조가 지어줬다고 하며, 의재에게 소치는 20촌 정도 되는 한 집안 방계손으로 할아버지 뻘이라고 한다. 1912년 일본쿄토로 법률을 공부하기위해 유학을 떠나 1913년 도쿄로 옮겼고 그곳에서 인촌 김성수, 송진우 등과 친분관계를 맺었으며, 1915년 메이지대학 청강생으로 공부하던 법률공부를 그만두고 일본 남종화이 대가인 고무로 스이운(소실취운小室翠雲)의 문하생이 되어 다시 그림공부를 시작하였으며, 그곳에서 인삼장사를 하여 큰돈을 벌었다고 한다.

  1918년 귀국하여 서울로 근거지를 옮겼고 인촌 김성수의 도움으로 서울생활을 시작하였다. 1922년 제1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한 산수화가 2등을 차지하며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으며, 그해 동아일보 후원으로 개인전을 열기도 했으며 1927년 조선미술전람회 6회까지 계속출품하였다. 1927년 광주에 돌아와 정착하여 1936년 조선미술원을 설립하였고, 1938년 연진회를 발족시켜 독자적인 화필생활과 문하생 지도를 겸하였다.

1946년 무등산의 차밭을 사들여 삼애다원을 설립하여 춘설다를 생산할 정도로 다문화 확산에 기여했으며, 1946년 삼애학원이라는 광주국민고등학교를 설립한 후 이듬해 광주농업고등기술학교로 교명을 변경하여 교장에 앉기도 하였다. 그 후 국전 2회부터 13회까지 심사위원을 지냈으며 1958년 대한민국예술원 종신회원으로 선임되었다. 시·서·화를 겸전한 남종화의 대가로 1973년 동아일보사가 주최한 회고전을 가졌으며, 1975년 서울 미도파화랑에서 마지막 개인전을 열었다. 1977년 2월 15일 향년 87세로 사망하였다.

  대한민국예술원상을 받았으며 정부로부터 국민훈장 무궁화장이 수여되었다. 대표작으로 《계산청하(溪山靑夏)》(1924), 《설경(雪景)》(1965), 《추경산수(秋景山水)》 (1971) 등이 있다. (자료출처 : 네이버백과, 미술대사전, 두산백과, 한국민족대백과, 의재미술관)

   의재 허백련이 무등산 자락 춘설헌에 기거하면서 수 많은 명작을 만들었는데, 오늘은 그의 무등산 자락에서의 행적을 쫓아보고 그의 유적들을 만나 보기로 한다. 들를 곳은 이 안내도의 1,2,3번이 있는 의재미술관, 4번 문향정, 5번 춘설헌, 6번 의재묘소, 7번 (구)차공장, 9번 관풍대 등 이다. 8번은 의재미술관앞 다리.

  20세기중반의 주택. 광주광역시 기념물 제5호. 춘설헌은 이 고장이 낳은 한국화의 대가 의재(毅齊) 허백련(許百鍊)이 해방 직후인 1946년부터 그가 타계한 1977년까지 기거하면서 작품 활동을 하는 한편 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 ≪25시≫의 작가 게오르규(Gheorghiu, C. V.) 등 국내외의 명사들과 교유하던 곳이다. 원래 이 자리에는 일제 때 동아일보 편집국장이던 최원순(崔元淳; 현덕신)이 신병을 요양하던 집이 있었으나 1950년 낡은 집을 허물고 다시 지었다. 의도인(毅道人)1951년부터 사용-의(毅)굳세다 강하다 제(齊)가지런하게 갖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