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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의 문화재 (동구)

화담사(花潭祠, 기념물 제18호)

by 햇살과 뜨락 2023. 6. 10.

화담사(花潭祠, 기념물 제18호)

광주 서구 화운로156번길 17-8(화정동)

  정희(鄭熙, 생몰년 미상)는 두문동 72현 중 한 사람으로 지신사(知申事) 곽추(郭樞)가 주관한 과거에서 급제하여 1389년(공양왕 1) 장령이 되었다. 1391년 사헌집의가 되었으며, 이 때 이염(李恬)이 술에 취하여 왕에게 무례한 행동을 한 데 대하여 국문하였다. 1392년정몽주(鄭夢周)가 살해될 때 조준(趙浚) 등을 탄핵하다가 유배당하였다.

  정희(鄭熙)선생을 중앙에 모시고 좌우에 그의 아들 정초, 손자 정수충과 정오도, 민제장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사당이다. 처음에는 조선중기의 문신으로 사경과 예법에 뛰어나고 청렴결백한 정수충(鄭守忠, 1401∼1460)의 영정을 모신 영당이었으나, 정조 8년(1784) 그의 위패를 함께 모시면서 사당의 격을 갖추었다.

  정조 20년(1796)에는 ‘이인좌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운 민제장을, 순조 6년(1806)에는 정몽주의 제자로 충절을 지킨 그의 할아버지인 정희와 세종 때 학문과 예술, 과학, 기술 등에 업적을 남기고 청렴했던 그의 아버지인 정초의 위패를 함께 모셨다. 그 뒤 고종 5년(1868)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제사를 지내지 않다가 1905년 다시 제사를 지내기 시작했다.

  1906년 송시열의 제자로 충효가 뛰어났던 정오도의 위패를 추가하고 정희의 위패를 중앙에 두어 지금의 틀을 갖추었다. 제사를 올리는 공간인 화담사는 앞면 3칸·옆면 1칸 규모의 건물로, 지붕은 맞배지붕이며 앞 쪽에는 넓은 마루가 있다.

  건물 앞쪽으로는 내삼문인 양양문이 있고, 계단을 내려가면 중간에 학문을 연구하는 공간인 동재와 서재가 있어 전형적인 전학후묘의 양식을 갖추고 있다.

  처음에는 환관(宦官)들을 교육하였고, 뒤에는 세종의 명으로 영응대군 염(永膺大君琰)을 가르쳤다. 승의부위사정(丞義副尉司正)·경창부승(慶昌府丞) 등을 거쳐 1449년(세종 31) 수부사직으로 경창부승을 겸하였다. 1450년 식년문과에 정과로 급제하였다. 이듬해 승문원부교리가 되어 수양대군을 따라 집현전에 나아가서 『역대병요(歷代兵要)』를 찬하였고, 그 뒤 훈련원주부·서학교수(西學敎授)·성균관사예 등을 거쳤다.

  1453년(단종 1) 행사용(行司勇)으로서 수양대군이 단종의 보좌세력인 황보 인(皇甫仁)·김종서(金宗瑞) 등 원로대신을 살해, 제거하는 데 가담하여 6품직에서 4품직으로 승진되고, 1455년(세조 1) 세조의 즉위를 도운 공으로 좌익공신(佐翼功臣) 3등에 책록되었다.

  이듬해 성균관사성이 되고, 1457년 집현전직제학으로 승진, 하원군(河原君)에 봉하여졌다. 1457년 첨지중추원사가 되고 숭정대부(崇政大夫)에 승진하였고,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이해 의경세자(懿敬世子)가 죽자 세조의 명으로 주상자(主喪者)가 되었다. 청렴 검소하였으며, 효성이 지극하였다. 시호는 문절(文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