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열사(景烈祠)
광주 북구 망월동 922
경열사는 14세기를 의롭게 산 의로운 선비, 고려 말 충신 경렬공 정지 장군(景烈公 鄭地, 1347~1391)을 모신 사당이다. 원래는 광주광역시 한복판의 동명동에 편방사를 세워 향사해 왔으나 1868년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의해 없어졌다가 5•18 민중항쟁이 일어났던 1980년 선생의 묘소가 있는 이곳에 사당, 경양문, 충의문을 만들었다. 경렬공 정지 장군은 우리나라 해군의 창시라고 일컬어질 만큼 중요한 분이지만 이 지역 사람들은 잘 모른다. 그러나 그의 일대기를 살펴보면 그가 얼마나 자랑스러운 인물인지를 알 수 있다.
정지 장군이 살았던 14세기에도 일본은 우리나라를 끊임없이 노략질하고 언제든지 침공할 기회만 엿보고 있었다. 항상 국내 정치가 어지러웠고 외교를 소홀히 했던 고려 정부는 일본에게 공격의 빌미를 주곤 했다. 그러나 우리를 얕잡아 보고 달려든 일본은 국가 위기 때마다 나타나 나라를 구하는 호남 사람들의 위용에 눌려 물러나곤 했다. 그 중에서도 정지장군은 더욱 일본의 간담을 서늘하게 해 준 인물이다.
나주 문평 출신인 정지 장군은 열아홉 살에 사마시에 합격한 후, 다음해에 문과에 급제해 나랏일을 볼 수 있는 자격을 획득하였다. 정지 장군은 공민왕을 가까이에서 모시면서 왜군을 평정할 계획을 세워 올렸다. 우리나라 최초의 수군 창설을 계획한 건의문이었던 것이다. 공민왕은 정지 장군의 수군 창설 계획을 보고 크게 기뻐하며, 전라도 안무사로 임명해 수군 창설과 조련에 힘쓰도록 했다. 정지 장군은 전라도 안무사로 재임 중 왜구를 어떻게 막을 것인지를 연구해 그 계책 수십조를 왕에게 올렸는데, 왕은 흔쾌히 그 건의문을 받아들였다고 한다. 정지 장군에 의해 차츰차츰 우리나라 해안 지방의 왜구 침입이 잠잠해지고 있는데, 공민왕이 시중들던 최만생에게 시해당하고 만다. 크게 낙심한 정지장군은 전라도 치안에만 온 힘을 쏟았다. 이후에 순천 도병마사가 되어 순천 낙안 등지에 침입한 왜적과 싸워 큰 전과를 올렸다. 또 영광 광주 동복 등지에 나타난 왜적을 쫓아 곡성군 옥과에서 큰 전과를 올렸다.
평생을 나라를 위해 싸웠던 정지 장군은 말년에 정쟁에 싫증을 느끼고 광주로 내려와 후학을 양성하다가 4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경열사 뒤편, 밀양 박씨 부인과 함께 잠들어 있는 정지장군의 예장묘소는 광주광역시 기념물 제2호이다. 정지 장군의 삶은 진정 애국하는 길이 무엇인가를 보여줬다. 왜적 병란 극성기에 태어나 국내정치의 혼란 중에도 의연하게 출사 하여 역사적 소임을 다한 우국지사였다. 탁월한 정치인이었지만 정치보다 백성을 보호하는 전쟁 전략가로 정지 장군이 왜구의 두목 왜산지를 무찌를 때 입었던 것이라 전해지는 갑옷은 현재 광주시립민속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 이 갑옷은 여러 장으로 된 철편으로 고리로 연결하여 상반신을 화살과 창검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다. 다른 데에서는 그 예를 찾을 수 없는 것으로 미루어 정지 장군이 특별히 고안해서 만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정지 장군도 고려의 멸망과 조선 건국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된다. 이성계를 따라 위화도 회군에 종군하였으나 이성계가 창왕을 몰아내고 공양왕을 추대하면서 김저의 옥사에 연루되어 귀양을 가게 된다. 정지장군은 다시 윤이. 이초옥의 옥사에 휘말려 청주로 귀양을 갔다가 홍수가 나서 풀려났다.
평생을 나라를 위해 싸웠던 정지 장군은 말년에 정쟁에 싫증을 느끼고 광주로 내려와 후학을 양성하다가 4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경열사 뒤편, 밀양 박 씨 부인과 함께 잠들어 있는 정지장군의 예장묘소는 광주광역시 기념물 제2호이다. 정지 장군의 삶은 진정 애국하는 길이 무엇인가를 보여줬다. 왜적 병란 극성기에 태어나 국내정치의 혼란 중에도 의연하게 출사 하여 역사적 소임을 다한 우국지사였다. 탁월한 정치인이었지만 정치보다 백성을 보호하는 전쟁 전략가로서 책무를 더 중요하게 느낀 양심 있는 선비였다.
광주광역시 청옥동으로 들어가 경열사 사당의 계단을 한 계단 두 계단 밟고 올라가 사당 앞에 서보면 그의 영정이 무등산을 의젓하게 바라보고 있다. 매일 무등산을 향해 뭔가를 염원하는 듯 주위의 소나무 숲이 울창하다. 경열사는 그렇게 오른쪽에는 5•18국립묘지를, 왼쪽에는 가사문화권을 사이에 두고 역사의 가교 역할을 하려는 듯 의젓하게 서 있다.
'광주의 문화재 (북구)' 카테고리의 다른 글
광주 북동 천주교회(光州 北洞 天主敎會, 기념물 제25호) (0) | 2023.06.02 |
---|---|
광양 중흥산성 쌍사자 석등(光陽 中興山城 雙獅子 石燈, 국보 제103호) (0) | 2023.06.02 |
광산 노씨 분묘 출토 명기류(光山 盧氏 墳墓 出土 明器類, 민속자료 제6호) (0) | 2023.06.02 |
고운묘 출토유물(高雲墓 出土遺物, 중요민속자료 제239호) (0) | 2023.06.02 |
강진 김해 김씨가 상여(康津 金海 金氏家 喪輿, 민속자료 제4호) (0) | 2023.06.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