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훤당 김굉필은 퇴계 이황으로부터 ‘도학(道學)의 으뜸 스승’이라는 뜻의 근세도학지종(近世道學之宗)으로 칭송받은 조선 전기의 유학자이다. 광해군 2년(1610년) 문묘(文廟)에 제향 되었고 동국 5현(東國 五賢) 중에서도 으뜸으로 꼽히는 분이다. 본관은 서흥(瑞興)이며 고려 후기에 사족으로 성장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예조참의를 지낸 증조부가 현풍 곽 씨와 결혼해 처가인 현풍으로 내려오면서부터 현풍과 인연을 맺었다. 할아버지가 개국공신인 조반의 사위가 되어 서울 정동에 살게 되었는데, 선생은 여기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충좌위사용(忠佐衛司勇)이란 무관을 지냈던 김유(金紐)였다.
어렸을 때부터 호방하고 거리낌 없는 성격으로 저잣거리에서 잘못된 것을 보면 그 자리에서 메치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19살에 순천 박 씨와 결혼해 합천군 야로(冶爐) 현에 있는 처갓집 개울 건너편에 서재를 짓고 한훤당이라는 당호를 붙이고 지내다 뒤에 현풍으로 돌아와서는 지금의 도동서원 뒷산인 대니산(戴尼山) 아래에서 살았다. 1474년 김일손(金馹孫), 정여창(鄭汝昌) 등과 함께 지리적으로 가까운 함양에 군수로 재직 중이던 김종직(金宗直)을 만나게 되어 그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소학(小學)」을 중시한 그는 평생 소학을 손에서 놓지 않았으며, 누군가가 세상사에 대해 물으면 ‘소학동자가 무엇을 알겠는가?’라고 답할 정도로 소학에 심취해 소학동자라는 별칭을 얻기도 했다. 성종 때인 1480년 사마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입학했는데, 이때 유학은 제가치국평천하(齊家治國平天下)의 도이며 불교는 일신(一身)의 청정적멸(淸淨寂滅)만을 위하는 것이라고 하여, 척불(斥佛)과 유교진흥에 관한 긴 상소를 올렸을 정도로 강직한 성품을 지녔다.
1486년 당시 이조참판으로 있던 김종직에게 시를 지어 올려 그가 잘못된 국사에 대해 강직한 건의를 하지 않는 것을 거론하였다. 스승을 비판한 것이다. 추강 남효온(秋江 南孝溫, 1454-1492)의 「사우록(師友錄)」에 의하면 ‘도(道)란 겨울에 갖옷을 입고 여름에는 얼음을 마시는 것입니다. 날이 개면 나다니고 장마 지면 멈추는 것을 어찌 완전히 잘할 수야 있겠습니까? 난초도 세속을 따르면 마침내 변하고 말 것이니, 소는 밭을 갈고 말은 사람이 타는 것이라 한들 누가 믿겠습니까(誰信牛耕馬可乘)?’ 이에 점필재 선생은 그 운(韻)을 따라 화답하기를 ‘분수 밖에 벼슬이 높은 지위에 이르렀건만, 임금을 바르게 하고 세속을 구제하는 일이야 내가 어떻게 해낼 수 있으랴. 후배들이 못났다고 조롱하는 것 받아들일 수 있으나 권세에 구구하게 편승하고 싶지는 않다네(勢利區區不足乘).’라고 하였다. 이일로 스승과 제자 사이는 소원해져 버렸다. 1494년 경상도관찰사 이극균(李克均)이 은일지사(隱逸之士)로 천거하여 남부참봉이 된 뒤, 전생서참봉·군자감주부·사헌부감찰 등을 거쳐 형조좌랑에 이르렀다. 1498년 훈구파가 사림파를 제거하기 위해 무오사화를 일으켰을 때, 김종직의 문도로서 붕당을 만들었다고 하여 장형(杖刑)을 받고 평안도 희천에 유배되었다. 그때 선생의 나이는 45세였다. 여기서 운명적으로 정암 조광조(靜庵 趙光祖, 1482-1519)를 만났는데, 당시 조광조는 열네 살로 찰방인 아버지를 따라 평안북도 어천(魚川)에 가 있어 사제의 인연을 맺게 된 계기가 되었다. 47세 되던 해 한훤당은 전라도 순천으로 이배(移配)되어 호남유학의 형성단계에서 한 축을 이루었다. 그의 호남출신 제자로는 최산두(崔山斗), 유계린(柳季麟) 등이 있다. 유계린은 「표해록(漂海錄)」을 쓴 최부의 사위이고 기묘사림 유성춘과 「미암일기(眉巖日記)」를 쓴 유희춘의 아버지이다. 최산두는 기묘사화로 화순 동복으로 유배 가서 김인후, 유희춘을 가르쳤다.
선생이 순천에 머무른지 5년여, 1504년 일어난 갑자사화로 목숨을 잃는다. 그러나 1506년 일어난 중종반정으로 곧바로 신원이 회복되었으며, 1507년 도승지에 추증되고 1517년 홍문관부제학 김정(金淨) 등의 상소로 다시 우의정에 추증되었다. 문묘배향은 중종 때부터 거론되었으며 50여 년이 지난 광해군 때가 되어서야 이루어졌으며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선생의 저술은 무오사화 때 이미 후환이 두려워 모두 불태워버렸고 친지 간에 오간 글의 경우도 소장하기를 꺼렸기 때문에 집안에 내려오는 「경현록(景賢錄)」이 전부이다. 그나마 10여 수의 시와 네댓 편의 문(文)에 불과하여 그의 도학을 문헌으로 알아볼 길이 없다. 그러나 사후 문묘종사 등 사림의 논의가 있을 때마다 그의 도학에 대해서는 거의 이론이 없는 칭송으로 가득하여 이를 모두 모아 편집한 「국역 경현집(1970, 한훤당기념사업회)」이 900쪽에 달한다.
선생을 배향한 서원은 대구 도동서원과 순천의 옥천서원, 나주 경현서원, 화순 해망서원, 상주 도남서원이 있다. 전남 쪽에 입향서원이 많은 것은 아마도 유배지에서 많은 지방 유생들에게 성리학을 전수한 까닭일 것이다.
김굉필의 학통과 조선전기 호남사림의 학맥
조선 전기 호남지역 사류들의 학맥은 그 연원에서 대체로 다섯 그룹의 사문(師門)이 형성된 것으로 생각된다. 주로 16세기 초부터 그 중반에 걸쳐 이루어진 김굉필・최부(崔溥)・송흠(宋欽)・박상(朴祥)・이항(李恒)과 연결된 학문수수 관계가 그것이다.
먼저 김굉필의 학연이 전라도에 미친 것은 5년간에 걸친 유배생활과 관계있다. 그의 호남 출신 제자들로는 최충성・이적・윤신과 최산두・유계린・맹권・장자강 등이 알려져 있다. 전자 3명은 뚜렷한 행적이 남아 있지 않아 자세한 것은 알 수 없지만 무오사화 직전 김굉필이 서울에 거주할 때 그 문하에 출입하던 문인들이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그가 사사된 직후 지리산에서 도보로 내려와 모두 함께 문상하였다는 사실로 보아, 순천에서도 접촉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후자 4명은 순천에서 사제관계를 맺은 것이 확실하다. 그 가운데 특히 최산두와 유계린은 16세기 호남지역의 사림 형성에서, 그리고 김굉필의 학통을 다음 세대까지 잇는 데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던 인물들이다.
최산두(1483~1536)는 기묘사화 때 동복에서 15년간 유배생활을 보낸 기묘명현으로서 유배지에서 장성의 김인후에게 학문을 가르쳤다. 하서집의 연보에 따르면 김인후의 나이 10세 때 전라도 관찰사로 있던 김안국에게 글을 배워 그의 문인이 되었다고 하나, 양자의 객관적인 정황으로 볼 때 당시 두 사람 사이에 실질적인 학연이 맺어졌을 것으로 생각되지 않는다. 오히려 김인후가 18세 되던 해부터 시작된 최산두와의 사제지연이 보다 실질적인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현재 김안국의 문인으로 강조되고 있는 김인후의 학통은 재검토되어야 할 것이다. 이것으로 보면 김굉필의 학통이 최산두를 거쳐 김인후에게 이어진 다음, 김인후로 하여금 정철・기효간・변성온・양자징 등 많은 제자들을 배출케 하였다.
유계린(1478~1528)은 진사 공준의 아들로 순천에서 생장하여 맹권과 함께 김굉필에게 글을 배웠다. 그는, 김굉필의 동갑 계원이면서 학문의 도를 같이했던 최부의 사위가 된 후부터 주로 처향인 해남에 거주하였다. 그러나 처부가 무오사화를 당하여 함경도 단천에 유배된 뒤, 그의 처부와 가장 가까웠던 벗이 순천에 이배되어오자 다시 순천에 돌아와 김굉필을 모시면서 그 제자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김굉필과 최부는 김종직 문하의 동문으로서 무오년에 화를 입었고 훗날 갑자사화 때 유배지에서 같이 사사되었다는 점에서, 유계린은 김굉필을 스승 겸 빙부처럼 여겼을 것이다. 따라서 그는 학연과 인맥에서 두 사람의 영향을 함께 받았으며, 그것을 다시 그의 두 아들 성춘・희춘에게 이어주었다.
유성춘은 기묘명현으로서 기묘사화 직후 28세의 나이로 일찍 세상을 타계하였다. 그러나 유희춘은 을사명현으로서 선조 때까지 학명을 떨치면서 최상중・양주・조대중・나덕준 등에게 학맥을 이어주었다. 유배지에서 이루어진 김굉필의 교육활동과 그 사상적 영향에 대하여는 뒤에서 좀더 구체적인 논의가 있겠지만, 그의 학연이 최산두・유계린 등을 거쳐 김인후・유희춘 등에게 이어짐으로써 이후 호남지역의 사림 흥기에 중요한 계기가 이루어졌다.
최부(1454~1504)는 나주 출신으로 한때 해남에 거주하면서 윤효정・임우리・유계린 등에게 학문을 가르쳤다. 윤효정은 해남 윤씨의 중시조격 인물로서 일찍이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그는 기묘명현 윤구의 부친으로 최부에게 익힌 학문을 구・항・행・복 아들 4형제에게 물려주었는데, 윤항을 제외한 3형제가 모두 문과에 급제함으로써 문명을 떨쳤다. 특히 윤구는 중종 때 언관직에 있다가 기묘사화로 화를 입고 향리에 유배되었으나 문장과 절행이 뛰어나 최산두・유성춘과 더불어 ‘호남삼걸’로 칭송되었다. 그의 강직한 기상은 14세 때 벌써 향시의 과장에서 물의(物議)를 자담(自擔)하여 관찰사 앞에서 당당하게 그 시재를 발휘한 것에서 엿볼 수 있다. 그는 당시 「의제발상론(義帝發喪論)」이란 글을 지어 세조의 왕위찬탈이 부당함을 논박함으로써 선비들 사이에 전송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해남의 윤씨 가문이 남평의 광산 이씨 문중과 통혼함으로써 양가가 결합된 것도 이무렵의 일이다. 이중호가 윤구의 사위가 되었는데, 그는 나주 출신의 오겸과 함께 김굉필의 학통을 계승한 유우의 문인이었다. 따라서 그는 학맥에서나 인맥에서 정통 사림파에 속한 대표적인 학자로서 그 역시 많은 제자들을 배출하였다. 그런데 이중호의 아들 가운데 선조 때 동인계 사림의 영수가 된 이발이 나왔으니 이 가문이 바로 기축옥사에서 가장 참혹한 화를 입은 집안이 되었다.
또 최부의 두 사위 가운데 하나가 나주 나씨 집안의 나질이었는데, 그의 아들 나사침을 위시한 일문이 역시 기축옥사 때 큰 화를 입었다. 나사침은 이중호에게 학문을 익혔기 때문에 학맥에서도 광산 이씨 집안과 연결되어 있었다. 뿐만 아니라 위의 세 가문과 함께 정여립사건 때 같이 화를 당한 영광의 전주 이씨 집안도 해남 윤문과 두터운 연을 맺고 있었다. 이응종・황종・홍종 3형제가 바로 윤구의 외조카인 동시에 그의 문인들이었기 때문이다.
임우리(1476~?)는 을사명현 임억령의 숙부로서 18세 때에 사마시에 합격, 일찍부터 문장과 기절(氣節)로 이름을 떨쳤으나 관직을 멀리하여 평생을 산림의 처사로 지냈다. 임억령이 박상의 문하에 들어가기 전에 그의 숙부에게 초학을 배웠으니, 가학으로 임우리를 거쳐 임억령에게 이어진 학맥의 한 줄기가 최부와 연관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송흠(1459~1547)은 최부의 5년 연하로서 두 사람의 집이 불과 10여 리 밖에 있었던 가까운 후배였을 뿐 아니라 관직에 처음 나갔을 때 최부에게 관인의 기본자세를 익혔을 만큼 돈독한 관계였다. 그는 김굉필이나 최부처럼 사화에 직접 연루되어 화를 입지는 않았다. 그러나 성종 때 문과에 급제한 다음 관로에 올랐지만 연산군의 폭정에 반발하여 관직을 버린 뒤 중종반정이 있기까지 다시는 관문에 출입한 일이 없었다. 그러므로 그 행의(行誼)는 김굉필이나 최부와 큰 차이가 없었다. 또한 그 역시 향리인 영광에서 후진교육에 진력함으로써 뛰어난 문인 학자들을 배출하였다. 송흠의 교육활동이 대단했던 사실은 조선유현연원도(朝鮮儒賢淵源圖)의 19기원 선생 가운데 호남 출신으로서는 유일하게 그가 한 연원을 차지하고 있었던 점에서도 입증된다. 양팽손・송순・나세찬 등이 모두 그의 문인이었고, 양팽손의 아들 양응정 문하에서 정철・백광훈・백광안・최경창・최경회・이장영・최경운・정명세 등이 배출되었다.
박상(1474~1530)은 송흠과 함께 당대의 관료들 가운데 최고의 청백리로 알려진 인물인 동시에 기묘사화를 전후한 시기에 호남지역의 대표적인 사림파 선비였다. 일찍 부친을 잃은 그는 형 정으로부터 가학을 익혀 아우 우와 더불어 3형제가 세칭 ‘동국삼박(東國三朴)’으로 칭송되면서 문명을 떨쳤다. 그는 중종 초 대간직에 있을 때 과감한 언론활동을 전개하여 중앙에서도 사림파의 선봉에 섰던 인물이었다. 박상에게 직접 글을 배운 제자들은 송순・임억령・정만종・채중길 등이 있을 뿐이지만, 그는 중종 때 호남사림의 종장으로서 그 중추적인 역할을 다하였다. 아울러 아우 박우가 진사시에 장원으로 뽑혀 명성을 얻은 뒤 강원도 관찰사에까지 올랐으며, 특히 조카 순은 이조판서를 거쳐 정승에 오른 후 영의정으로만 14년을 재직하였을 만큼 화려한 문세를 떨쳤다. 따라서 박상이 조선 전기 명종・선조 때 호남사류들의 중앙 진출에 미친 영향도 작지 않았을 것이 분명하다.
이항(1499~1576)은 만학으로 성리학에 일가견을 이룬 전라도 태인의 거유(巨儒)였다. 그는 김굉필・정붕의 학통을 이은 박영의 문인으로서 기묘사화 때 참혹한 화를 입은 김식에게도 글을 배웠다. 이항이 평생 두터운 도의지교를 맺고 있었던 선비들은 주로 기묘・을사사화 때 화를 당한 사림파 인사들이었으며, 그의 기절 또한 매우 강직하였다. 어릴 적 한성에 살고 있을 때 사화를 경험한 그는 모친과 함께 화를 피하여 태인에 은거하면서 많은 후진들을 길러냈다. 김천일・김제민・변사정・기효간・백광홍・김복억・김후진 등이 모두 그 문하에서 나왔으니, 특히 이름난 의병장 다수가 배출된 사실과 함께 그들 대부분이 서인 당색을 띠었다는 점이 주목된다.
16세기 사화기에 있어서 호남사림의 학맥을 대체로 이와 같이 보면, 크게는 김굉필 연원의 학통이 주류를 이루었다고 할 수 있다. 김굉필과 최부 그리고 이항계의 학맥은 김굉필을 주축으로 형성된 하나의 줄기였고, 송흠과 박상의 경우에는 각기 가학으로 독자적인 사문을 형성하였으나 사림파의 인물들로서 그들이 지향한 처세관은 차이가 없었다. 즉 그들이 추구한 학문적 성격과 행동성향은 김굉필의 그것과 다름이 없었다고 생각된다. 다시 말하면 뒤에서 언급하겠지만 사림파의 사상적 기조가 된 김굉필의 도학사상과 송흠・박상이 추구한 학문적 목표에 차이가 없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그렇게 볼 때 조선 전기 호남사림의 학맥은 김굉필계의 학통이 큰 줄기를 이룬 가운데 그의 사상적 영향이 가장 컸던 것으로 생각된다. 특히 무오사화를 계기로 전라도의 유배지에서 이루어진 그의 직접적인 교육활동은 사화기 호남지역의 사림계에 매우 큰 영향을 미쳤다. 소학의 실천적 윤리관을 근간으로 한 그의 도학사상이 최산두・기준・유성춘 등의 기묘사림에게 이어진 다음, 명종대의 김인후・유희춘 등을 거쳐 기대승・이발 등에게 계승됨으로써, 선조대에 이르기까지 호남사림의 사상적 기저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16세기 사림정신의 원류가 되었던 김굉필의 도학사상은 무엇보다도 의리정신과 실천궁행을 중시하였다. 사화기의 호남사림은 이와 같은 도학사상을 바탕으로 현실참여에 적극성을 띤 한편 실천적 경세의지를 강조하였다. 따라서 반대세력의 반발과 함께 그만큼의 정화(政禍)를 불러오게 마련이었다. 기묘사화를 전후하여 시작된 피화로부터 을사사화와 안서순사건을 거쳐 기축옥사에 이르기까지 거듭 이어진 수난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전라도 재지사림의 갈등과 분열에서 비롯된 기축옥사로 말미암아 도학사상의 흐름이 변질되면서, 마침내 조선 전기 사림계 전체의 분열・대립 양상을 초래한 것으로 생각된다.
특히 당시 호남사림계의 핵심인물들이었던 정철과 이발의 반목・불화에서 싹튼 도내 동서 사림의 대립관계야말로 기축옥사의 발생 요인으로 작용하였다는 점도 아울러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기축옥사를 전후하여 나타난 호남사림의 분열현상은 그들의 학문성향과 처신의 방법상 차이에서 비롯된 결과였다. 이와 같은 재지사림의 분열・대립의 현상은 훗날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의병운동에서도 의병집단의 결합성향에 차이를 나타낸 배경으로 작용하였다. 동인계 사림이 주로 관군측에 참여했던 데 반하여, 서인계 사림은 김천일・고경명 등이 주도하는 민병측에 가담하여 활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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