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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석등

우리나라의 석등(3)

by 햇살과 뜨락 2023. 5. 22.

  일반적으로 절집에서 등불을 피우기 위한 돌로 만든 등기(燈器)를 석등이라 한다. 등은 불(火)을 조명하는 기구로서 우리 인간이 항상 갈망하고 있는 것이므로 인류의 삶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인류는 등기구를 사용함으로써 비로소 문명을 찾게 된 것이다. 등잔과 같은 등기구가 제작되었던 시기는 토기를 사용한 신석기시대부터일 것이다. 등기구는 토제등기(土製燈器)로부터 시작하여 이후, 금속과 돌 등으로 변하였는데, 불교 경전에 의하면 동제(銅製), 철제(鐵製), 와제(瓦製), 목제(木製)의 등기구가 있었음을 알 수 있고 이들의 연료로는 유류(油類)를 사용하였다는 것이다.

  문헌상으로는 이렇듯 여러 종류의 등기가 있으나 석등에 관한 명칭은 분명치 않다. 다만 한국에 현존하는 유물과 몇 가지의 기록에서 석등명(石燈名)을 찾을 수 있다. 즉 신라 진성여왕 5년(891)에 건립된 개선사지석등의 명기(銘記)에서 󰡐건립석등(建立石燈)󰡑이라는 명문을 볼 수 있고, 고려 선종 10년(1093)에 건조한 나주서문석등의 명기에서 󰡐등감일좌석조(燈龕一座石造)󰡑라고 한 명문을 볼 수 있으며, 충청북도 법주사사적(法住寺事蹟)에서는 󰡐연등각석사자광명대일좌동철광명대일좌(燃燈閣石獅子光明臺一座銅鐵光明臺一座)󰡑라 하여 연등각은 목조, 석사자광명대는 석조, 동철광명대는 금속제 등기를 말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렇듯 기록만으로도 남국신라 이래 석등이 건조되었음이 확실한데 석등은 주로 사찰과 능묘, 그리고 그 유적지에서나 찾아볼 수 있으며, 궁궐이나 민가 또는 그 유적지 등에서는 발견된 바가 없다. 그리고 발견 조사된 유물과 유적의 조성연대를 살펴볼 때 능묘에 건조한 작품들보다 사찰의 석등들이 양식적으로 비교적 앞서는 시기에 해당한다. 이것은 곧 불교 전래 이전의 능묘에서는 석등을 구비하지 않았었음을 뜻하는 것이다. 사실상 불교에서 등기는 예불을 올리는 의식에서 뺄 수 없는 기본적인 도구일 뿐 아니라, 사찰에서 실시하는 모든 행사 가운데서 가장 중요시하는 도구의 하나이므로 일찍부터 제작되었었다. 석등은 삼국시대부터 건립되었으며 백제시대의 유물이 현재까지 전하고 있다. 예컨대 충청남도 부여의 가탑리 옛 절터에서 석등의 부재가 발견되었고, 전라북도 익산의 미륵사터에서 석등의 연화대석, 화사석(火舍石, 불을 창치하는 곳), 옥개석(지붕돌) 등의 부재가 발견되었다.

  석등의 기본형은 하대석, 중대석(간석 혹은 간주, 竿石 혹은 竿柱), 상대석을 기대(基臺)로 삼고 그 위에 등불을 직접 넣는 화사석과 옥개석을 얹었으며 정상부를 보주(寶珠) 등으로 장식하는 형식이다. 그러나 이러한 형태는 시대와 지방에 따라 변화를 보이고 있어 시대적 또는 지방적인 특색을 지니고 있다. 석등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등불을 장치하는 화사석인데, 백제시대 석등의 화사석은 평면이 8각이고 4면에 화창구(火窓口)를 낸 형태를 기본으로 하고 있다. 이러한 백제시대 석등의 기본적인 8각형은 남북국시대에 주류를 이루었는데, 대표적인 예로는 부석사석등이 있다.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 앞의 팔각석등과 법주사의 쌍사자석등

 

  이 석등은 8각의 전형양식을 잘 보이고 있다. 정4각형의 지대석 위에 8각의 연화대석을 얹고 그 위에 가늘고 긴 8각의 간주(竿柱)를 세웠으며 다시 8각의 화사석을 받치기 위한 8각의 앙련석(仰蓮石)을 얹고 화사석 위에는 8각의 옥개석을, 옥개석 정상부에는 보주를 얹은 형식이다. 이 석등의 각 부재의 알맞은 비례는 매우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특히 화사석 4면에 조각된 보살입상과 연화대석의 새김은 한층 아름다움을 더해주고 있다. 이러한 장식은 남국신라 때의 석등에서도 나타나는데, 법주사사천왕석등에는 보살 대신 사천왕상이 조각되어 있다. 통일신라시대에는 특수한 형식으로 고복형(鼓腹形)이라 불리는 간주석의 형태가 있다. 이것은 간주석 가운데가 「북」 모양을 이루고 있는 것이 특이하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화엄사석등

구례 화엄사 고복형 석등과 임실 용암사터 고복형석등

 

임실용암리석등, 실상사석등 등이 있다. 그런데 이 석등들에서 주목되는 것은 화창구가 화사석의 8면에 모두 뚫려있는 것으로, 이것은 고복형석등에서 볼 수 있는 특색이다. 통일신라시대에 형태가 특이한 석등이 건조되었는데, 간주 대신 사자 두 마리를 이용한 양식, 즉 쌍사자석등이라 불리는 석등이다.

이러한 양식은 신라시대에 유행하였고,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그 전통이 이어졌다. 신라의 대표적인 쌍사자석등으로는 법주사쌍사자석등, 중흥산성쌍사자석등, 영암사지쌍사자석등을 들 수 있는데, 두마리의 사자가 마주 서서 앞발을 들어 위로 연화대석을 받치고 있다. 고려 때의 것으로는 고달사지쌍사자석등을 들 수 있고  두 마리의 사자가 쭈그리고 앉아있다. 조선시대의 것으로는 회암사지쌍사자석등이 있는데, 여기에는 두 마리의 사자가 있으나 청룡사지사자석등에서는 사자가 한 마리뿐이다. 이것은 시대가 내려옴에 따라 약화(略化)된 형태이다.

  고려시대에 이르게 되면 초기에는 대체적으로 신라시대의 8각형의 전형양식을 계승하지만 전체의 형태는 둔중해지고 있다. 한편 고려시대에는 신라시대의 8각 평면의 전형양식을 벗어나 정4각형의 평면을 이룬 새로운 양식이 나타나게 된다. 예컨대 관촉사석등과 현화사석등은 이러한 양식에 속한다. 이 석등은 간주는 평면이 원형이고 그 위에 정4각형의 연화대석을 얹었으며 화사석은 네 귀퉁이에 석주(石柱)만을 세우고 정4각형의 옥개석을 덮었다. 이러한 형식은 고려시대 석등에서 많이 볼 수 있으며, 조선시대에도 전해져서 회암사터쌍사자석등과 청룡사터사자석등의 상대석․화사석․옥개석은 모두 정4각형의 평면이다.  

   한편 고려시대에는 장명등(長明燈: 능묘 앞에 설치하는 석등)이 등장하는데, 개성의 공민왕의 현릉앞석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이와 같이 장명등을 설치하는 일은 조선시대의 능묘 설계에 계승되었고 형태도 4각형이 지속되었다. 이밖에 금강산의 정양사석등이나 법천사지광국사탑석등과 같이 6각형의 양식도 나타나는데, 이것은 석탑의 양식에 있어서도 4각형을 기본으로 삼았던 신라시대의 양식이 고려시대에 이르러 다각형(多角形)이 나타나는 것과 같은 현상이다.

  조선시대의 석등은 모두 4각형 평면이 기본 형식이고 간주는 한국 석등 형태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길고 가는 형태 대신에 짧고 두툼한 형태로 변하였다. 이러한 변화과정은 이미 고려말의 신륵사석등에서 나타나고 있다. 이 석등의 간주 형태는 전체적으로 위축, 퇴화되고 화사석은 장대해졌다. 전면에는 장식성이 농후해졌는데, 이러한 형태는 조선시대의 장명등으로 옮아가는 과도기적인 현상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조선시대는 사찰의 석등보다 능묘의 장명등이 크게 성행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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