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한국의 서원

논산 돈암서원 (論山 遁岩書院, 사적)

by 햇살과 뜨락 2023. 5. 13.

논산 돈암서원 (論山 遁岩書院, 사적)

논산시 연산면 임리 74외 5필지

 

  돈암서원은 논산시내에서 연산면으로 향하는 1번 국도를 따라 부적면을 지나 연산면소재지 못 미쳐, 오른쪽으로 300m 정도 들어간 곳에 있다. 이 서원은 감싸고 있는 뒷산이 나직하고 널직한 평지에 자리 잡고 있는 탓인지 느낌이 색다르다. 건물 배치도 일반적인 서원과는 다르다.

산앙루(山仰樓)를 지나 나직한 담장을 두른 소박한 대문이 나타나는데 여기에 돈암서원이란 현판이 걸려있다. 뒷면에 입덕문(入德門)이라는 현판이 있어 대문 이름을 알게해 준다. 대문을 들어서면 널찍한 마당이 나타나는데, 이 마당 정면에 강당인 양성당이 동재와 서재를 거느리고 뒤편에 사당을 모시고 있다. 전형적인 전학후묘의 배치인 것이다. 하지만 보통 서원과는 다른 배치를 보여준다. 강당이 하나 더 있을 뿐 아니라 주변에 건물들이 많다. 아마 강당이 하나 더 있는 까닭은 양성당이 규모가 작아 보완하기 위한 것일 것이다. 또 다른 강당인 응도당은 주심포 맛배지붕의 건물로 무게감고 함께 나름의 멋을 갖추고 있어 눈길을 끈다. 평지인데도 건물 배치가 일직선이 아닌 것도 이채롭다.

돈암서원은 호서지역의 대표적 서원으로 사계 김장생(沙溪 金長生, 1548-1631)선생의 덕을 기리기 위해 인조 12년(1634)에 건립하였으며, 효종 10년(1659)에 사액이 결정되었다가 현종 1년(1660)에 돈암이라는 이름을 임금으로부터 받았는데, 이는 효종이 갑자기 승하한 탓일 것이다. 고종 8년(1871) 흥선대원군의 서원훼철 때에도 살아남은 47개 서원 중 하나인 이 서원은 김장생을 비롯하여 노론의 영수격인 김집, 송준길, 송시열을 추가로 배향한 곳으로 기호학파의 중심 서원 역할을 한 곳이다.

원래 이 지역은 김장생의 아버지 김계휘(金繼輝, 1526-1582)가 낙향, 경회당(慶會堂)을 세워 학문연구에 힘썼고, 이후 김장생이 양성당(養性堂)을 세워 후진양성을 하였던 곳이다. 그런 까닭으로 양성당은 서원의 강당 역할을 하고 있으며 경회당과 정회당(靜會堂)이라는 편액을 단 건물이 서원 한 켠에 자리 잡고 있다. 이 서원은 현 위치에서 1.5㎞ 정도 떨어진 임리 1구 숲말에 있었으나, 지대가 낮아 홍수 때 안전하지 못하므로 1880년 자리를 옮겼다. 숲말의 서원터 근처의 길모퉁이에는 돈암이라 새겨진 바위 만 남겨져 있다.

돈암서원은 배산임수 형국으로, 평지에 전학후묘식으로 배치하였으나 앞면에 위치한 강당이 중심축에 놓이지 않고 약간 서쪽으로 비켜 직각 배치되어 있다. 돈암서원의 구조는 크게 네 개의 공간으로 구분되어 있다. 외삼문인 입덕문을 들어서면 강학 공간의 넓은 마당을 두고 강당인 양성당이 배치되어 있고, 양성재 서쪽에 장판각과 정의당이 배치되어 있다. 강당인 돈암서원 응도당은 입덕문을 들어서서 직각으로 동향하여 배치되어 있다.

양성당 뒤로 내삼문을 두었고 사당을 배치한 묘당 공간이 있다. 돈암서원의 사당인 유경사는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앞면 열은 퇴칸이고 뒷면 2열은 내부 공간을 꾸며 김장생, 김집, 송준길, 송시열의 위패를 봉안하였다. 돈암서원 응도당은 별도의 공간으로 정면 5칸, 측면 2칸에 홑처마 팔작지붕이다. 각 칸 하나씩을 방으로 꾸몄고, 가운데 3칸 앞면에는 퇴칸을 만들어 마루를 깔았고, 뒷면에는 쪽마루를 달았다. 양 측면의 1칸통은 각각 큰 온돌방이다.

정의당은 정면 4칸, 측면 2칸으로 뒷면 열 가운데 2칸은 마루방을 두었다. 1고주 5량가 구조에 홑처마 팔작지붕이다. 장대석 외벌대로 기단을 만들었고, 바닥에는 전을 깔았다. 장판각은 정면 3칸, 측면 2칸에, 내부에는 모두 마루를 놓았다. 무고주 5량가 구조이고, 홑처마 팔작지붕이다. 사마재는 양성당 동쪽 측면에 ‘ㄱ’자 형태로 있고, 사마재를 에워싸는 담이 둘러져 있다. 1고주 5량가 구조에 홑처마 팔작지붕이다.

수직사는 동쪽 담을 둘러친 별도의 공간에 배치되어 있다. 정면 5칸, 측면 2칸으로 남쪽 1칸은 부엌, 가운데 2칸은 온돌방을 두었고, 북쪽 측면에는 퇴칸을 두었다. 온돌방 앞면에는 퇴칸을 두고 마루를 깔았으며, 마루는 우물마루로 짰다.

광산김씨는 연산 지역에서 세거하면서 많은 인재를 배출한 호서 명문 사족가문이다. 이런 이유로 돈암서원은 서인-노론계를 대표하는 서원으로 1871년 서원 훼철령 때에도 훼철되지 않고 보존되어 오늘에까지 이르고 있으며, 특히 김장생이 타계한 후 제자와 문인들이 만든 돈암서원책판(遯巖書院冊版)이 등 여러 자료가 남아 있다. 이렇듯 돈암서원은 호서 지역은 물론 기호 지역 전체에서 존숭받는 서원으로, 김장생을 제향한 서원 중에서 가장 비중 있고 영향력 있는 서원으로 인정받고 있다. 현재까지 잘 보호, 관리되고 있으며 지역사를 연구하는 향토 자료로서도 보존적 가치가 높다. 나아가 호서 지역 사림의 동향을 연구하는 데 좋은 자료가 되며, 당시 실질적인 세력권자인 김장생의 영향력을 알 수 있다.

돈암서원 원정비는 돈암서원을 세우게 된 배경과 서원의 구조를 남기기 위해 건립한 비석이다. 사계 김장생과 신독재 김집의 학문과 성품을 칭송하는 글도 새겨 놓았다.

 

김장생(金長生, 1548-1631)

예학(禮學)의 태두로 평가되는 김장생은 광산 김씨로 호는 사계(沙溪)이다. 대사헌을 역임한 김계휘(金繼輝)의 아들이며 김집(金集)의 아버지이다. 구봉(龜峰) 송익필(宋翼弼)에게 배웠고 장성하여서는 율곡(栗谷) 이이(李珥)에게 사사했다. 벼슬길을 멀리하다가 1578년에야 창릉참봉에 천거되었다. 1581년 종계변무(宗系辨誣)의 일로 명나라 사행(使行)을 가는 아버지를 수행한 뒤, 돈녕부참봉이 되었다. 이어 순릉참봉·평시서봉사(平市署奉事)·동몽교관·통례원인의를 거쳐 1591년 정산현감이 되었다. 임진왜란 때 호조정랑·군자감첨정(軍資監僉正)으로서 군량 조달에 공을 세웠다. 그뒤 남양부사·안성군수를 거쳐 1600년 유성룡(柳成龍)의 천거로 종친부전부(宗親府典簿)가 되었다. 1602년에 청백리에 뽑히고 이듬해 익산군수로 나갔으나, 북인(北人)이 득세하게 되자 1605년 벼슬을 버리고 연산으로 낙향했다. 광해군이 즉위한 뒤 잠시 회양·철원부사를 지냈다. 그러나 1613년(광해군 5) 영창대군(永昌大君)의 외할아버지이자 인목대비(仁穆大妃)의 아버지인 김제남(金悌男) 등이 역모를 꾀했다 하여 사사되거나 옥에 갇힌 계축옥사(癸丑獄事) 때 동생이 이에 관련됨으로써 연좌되어 심문을 받았다. 무혐의로 풀려나온 뒤 곧 관직을 사퇴하고 다시 연산에 은거하면서 학문에 몰두했다.

인조반정으로 서인이 집권하자 장령에 오르고, 이어 성균사업(成均司業)·집의·상의원정(尙衣院正)을 지내면서 원자(元子)를 가르치는 등의 일을 맡아보았다. 이 가운데 성균사업은 그를 위하여 새롭게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뒤 좌의정 윤방(尹昉)·이조판서 이정구(李廷龜) 등의 천거로 공조참의를 지냈으며, 이어 부호군을 거쳐 1625년 동지중추부사에 올랐다. 다음해 다시 벼슬에서 물러나 행호군(行護軍)의 산직(散職)으로 낙향하여 황산서원(黃山書院)을 세워 이이·성혼을 제향했으며, 같은 해 용양위부사직(龍驤衛副司直)으로 옮겼다.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양호호소사(兩湖號召使)로 의병을 모아 공주로 온 세자를 호위하는 한편 군량미 조달에 힘썼다. 청나라와의 강화에 반대했으나 화의가 이루어지자 모은 군사를 해산하고, 강화도의 행궁(行宮)으로 가서 왕을 배알했다. 그해 형조판서가 되었으나 1개월 만에 물러난 뒤 용양위부호군으로 낙향했다. 그뒤 1630년에 가의대부(嘉義大夫)가 되었으나, 조정에 나가지 않고 향리에 줄곧 머물면서 학문과 후진양성에 힘썼다. 연산에서 83세의 나이로 죽어, 진잠(鎭岑)에 장사지냈다.

그가 활동하던 시기는 당쟁으로 동서(東西)와 남북(南北)이 분당·대립하고, 한편으로는 이괄(李适)의 난과 임진왜란·병자호란으로 국가체제가 위기에 빠져 토지제도·수취제도 등 여러 방면에서 누적된 폐단을 개혁해서 민생을 회복해야 할 때였다. 국가재조는 여러 측면에서 진행되었으며, 특히 사상계에서는 기존의 주자학적 정통주의가 훨씬 강력하게 대두되는 방향으로 이루어졌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그는 국가의 위기체제를 극복할 수 있는 이념적 체계로서 예(禮)에 주목했다. 예 실천의 방법으로서 개인의 수신(修身)을 강조하고, 이를 위하여 계구신독(戒懼愼獨)을 중요시했다. 즉 일상생활에서 항상 계구신독을 염두에 두고 심성의 온전함을 지키며 그 마음이 발(發)함에 모두 예에 맞게 행하여 하늘을 우러러 조금이라도 부끄러움이 없어야 한다고 했다. 이로써 예 실천의 주체인 인간 내면의 심(心)을 개발하고, 천리(天理)의 법칙을 깨닫도록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예의 강조는 〈가례 家禮〉를 통한 유교적인 가족질서 확립 노력으로 이어진다. 그는 〈근사록〉을 오랫 동안 연구하고 고금선유(古今先儒)의 여러 가지 설을 참조하여 이를 바탕으로 당시의 토속과 인정에 맞추어 〈가례〉를 고치고 보급하는 데 힘썼다. 예와 효의 관계를 "예가 아닌 것은 효를 다했다고 할 수 없다"라고 설명하면서 효를 백행(百行)의 근본으로 여겼다. 또한 관혼상제(冠婚喪祭)를 중시하여 "관혼상제는 가정에서의 일용(日用)의 체(體)이며 길흉(吉凶)의 수(需)에 통한다. 하나라도 폐(廢)하여 강습하지 않은 바 없다"고 하여 어느 곳 어느 때라도 시행해야 하는 것으로 보았다. 예학의 결론은 통(統)을 바르게 하는 것, 곧 정통(正統)에 있었다. 가정·사회·국가에서 그 나름의 기강과 질서가 서야 하는 것이며 그 근간이 되는 것이 통(統)이며 통을 뒷받침해주는 것이 예였다. 이러한 예학론을 중심으로 하는 정통주의 사상은 노론 집권세력의 정치이념으로서 기능했다.

 

예학의 이론적 배경

그가 예론에서 이론적 배경으로 삼았던 것은 율곡의 이기설(理氣說)이었다. 이황(李滉)의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에 반대하면서 율곡의 이기관(理氣觀)을 포괄적으로 계승하여, 이(理)와 기(氣)는 본래 스스로 섞여 있다고 하는 이기혼융설(理氣混融說)을 주장했다. 그는 이기의 관계를 불상잡(不相雜)·불상리(不相離)로 파악하고, 기(氣)의 유위유형(有爲有形)한 부제성(不齊性)과 이(理)의 무위무형(無爲無形)한 제일성(齊一性)의 관계에서 율곡의 이통기국설(理通氣局設)과 이일분수설(理一分殊說)을 이해했다. 또한 율곡의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을 견지하고 이에 근거하여 사단칠정(四端七情)과 인심도심(人心道心)을 일원적으로 해석하여, 사단과 칠정이 이정(二情)이 아니며 인심과 도심이 이심(二心)이 아니라고 보았다. 따라서 심(心)이 발(發)한 때와 발하기 전의 존양성찰(存養省察)이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되고, 칠정이 사단으로, 인심이 도심으로 보존되고 발양되기 위해서 존심양성(存心養性)을 절실히 요구하게 된다. 여기서 계구신독에 대한 강조가 나오는 것이다.

한편 격물치지설(格物致知說)에서도 퇴계의 이자도설(理自到說)을 부정하고 율곡의 설을 충실히 계승했다. 격물(格物)이란 물리(物理)가 극처(極處)에 이르는 것이며 물리는 내 마음에 이미 갖추어져 있는 것이므로 물리가 내 마음에 도래한다고 보는 것은 잘못이라고 주장했다. 즉 사물의 이(理)는 인간의 지(知)와 관계없이 언제나 완전하게 존재하는 것이고, 인간의 지를 통하여 인식되느냐 되지 않느냐에 무관하게 존재하는 것이므로, 문제는 다만 나의 지(知) 여하에 따라 인식의 여부가 결정된다는 것이다. 그는 물아일리(物我一理), 주객합일(主客合一)인 내 마음의 인식 능력으로 물리를 체득하는 이론을 추구했다. 따라서 격물이라는 것도 사물의 이(理)를 객관적으로 인식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활연관통(豁然貫通)의 체득에서 성취되는 것이라고 보았다. 이어서 그는 격물과 치지는 비록 구별하여 표현되지만, 물리가 일리(一理)이며 격물과 치지가 모두 활연관통의 양면이기 때문에 그 실질은 하나라고 생각했다.

김장생은 이이에게서 주자학을 전수받아 그 학통을 계승했다. 특히 그의 성사상(誠思想)을 이어받아 학문의 요체로 삼았으며, 이기심학관(理氣心學觀)을 계승하여 일원적(一元的) 이기심학관을 견지했다. 격물치지설에서도 율곡의 설에 따르고 있었다. 그러나 "율곡은 박문(博文)의 공이 많지만 약례(約禮)에서는 오히려 지극하지 못하다"고 했듯이 예학에 더욱 깊은 관심과 노력을 기울였다.

 

예학의 계승

송익필에게서 배운 예론을 깊이 연구하여 당시 나라의 전례(典禮)나 모든 행상에 의문이 있으면 그에게 자문할 정도로 예학에 정통했다. 또한 학문을 아들 집에게 이어받게 한 조선 예학의 태두로 예학파의 주류를 형성하게 했다. 그의 문인으로는 아들 집과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이유태(李惟泰)·강석기(姜碩期)·이시직(李時稷)·최명길(崔鳴吉)·이덕수(李德洙)·최명룡(崔命龍) 등이 있다. 이들을 중심으로 기호학파(畿湖學派)가 크게 성하여 영남학파(嶺南學派)와 쌍벽을 이루었다. 연산 돈암서원(豚巖書院)을 비롯하여 안성 도기서원(道基書院) 등에 제향되었으며, 뒤에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저서로는 〈상례비요 喪禮備要〉·〈가례집람 家禮輯覽〉·〈전례문답 典禮問答〉·〈의례문답 疑禮問答〉 등 예에 관한 것과, 〈근사록석의 近思錄釋疑〉·〈경서변의 經書辨疑〉와 시문집을 모은 〈사계선생전서 沙溪先生全書〉가 남아 있다. 1688년(숙종 14) 문묘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문원(文元)이다.

 

노강서원(魯岡書院, 시도유형문화재 제30호)

논산시 광석면 오강리 227

윤황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고 지방민의 유학교육을 위하여 세운 서원이다. 조선 숙종 1년(1675)에 처음 세워진 후, 숙종 8년(1682)에 임금으로부터 ‘노강’이라는 현판과 토지·노비 등을 하사받았다. 후에 윤문거를 비롯하여 윤선거·윤증을 함께 모셨다. 앞쪽에 강당이 있고 뒤쪽에 사당이 위치한다. 강당은 앞면 5칸·옆면 3칸의 비교적 규모가 큰 건물로서, 대청과 온돌방으로 되어있다. 서원의 행사·유림의 화합·학문의 토론 장소로 사용되던 곳이다. 윤황을 중심으로 여러 선현의 위패가 모셔져 있는 사당은 앞면 3칸·옆면 3칸 규모의 건물로서, 매년 봄과 가을 2차례 제사를 지내고 있다. 고종 8년(1871) 흥선대원군이 서원을 철폐할 때에도 없어지지 않고 남아있던 47개 서원 중의 하나이다.

 

윤황선생 고택(尹煌先生古宅, 민속자료 제8호)

논산시 노성면 장마루로 716번길 132

윤황선생고택은 그의 6대손인 윤정진이 조선영조때(1730년대) 이축한 후 윤황선생 종가로 대대로 사용되어 오고 있다. 전체적인 건축물의 배치구조는 ㄱ자 건물형태의 안채와 안채측면에 아랫채가 있어서 안채와 아랫채가 ㄷ자형태를 이루고 있고, 별채로 사당과 사랑채가 있다. 안채의 지붕은 팔작과 맛배를 겸한 형태이며, 집의 구조는 중앙3칸은 대청을 겸한 통간 우물 마루를 두고 전면 중앙의 우측 퇴간에는 누마루를, 누마루후면에 방을 두었다. 대청의 측면에는 2칸의 긴방과 부엌이 연결되었다.

사당은 3칸의 정면 퇴간에 마루를 깔고, 중앙 2칸은 대청이며 좌우에는 방을 두고 있다. 대청의 마루문은 4짝씩이며 방문은 2짝으로 되어 있고, 문 위쪽에는 고창을 두고, 전면에 소로 수장을 하여 가옥의 품위를 높여주고 있다.

 

윤황(尹煌, 1571-1639)

1571(선조 4)∼1639(인조 17).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덕요(德耀), 호는 팔송(八松). 창세(昌世)의 아들이며, 전(烇)의 형이다. 1597년(선조 30) 알성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정자에 임명되었다. 1599년 주서로 입시한 뒤 군자감첨정·성균관전적을 거쳐, 1601년에 감찰이 되었으며 곧 정언으로 옮겼다. 홍문관은 중요한 부서이므로 은상(恩賞)으로 사사로이 임명할 수 없다는 것과, 척신의 직을 파할 것을 주장하였으며, 이후 병조·예조의 좌랑, 예조정랑을 거쳐, 북청판관으로 나갔다.

1608년(광해군 즉위년) 북청판관으로 성가한 자제를 거느리고 관아에 머물고 있다는 사헌부의 탄핵을 받기도 하였으며, 광해군의 정치가 문란하여지자 시골에 은거하였다. 1626년(인조 4) 사간·보덕 등을 역임하였으며, 이듬해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주화(主和)를 반대, 이귀(李貴)·최명길(崔鳴吉) 등 주화론자의 유배를 청하고, 항장(降將)은 참할 것을 주장하였는데, 주화는 항복이라고 하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 삭탈관직되어 유배의 명을 받았으나 삼사의 구원으로 화를 면하였다. 그 이듬해 다시 사간이 되었고 길주목사·안변부사·사성·승지·대사성 등을 역임하였으며, 1635년 대사간에 이르렀다. 이때 전란으로 어려워진 백성의 구급책에 대하여 의견을 제시하였으며, 이후 이조참의를 지냈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정묘호란 때와 같이 척화를 주장하였으며, 이로 인하여 집의 채유후(蔡裕後), 부제학 전식(全湜)의 탄핵을 받았는데 특히 전식은 그가 부의(浮議)로 오국(誤國)한 죄를 청하자, 인조 또한 “부박(浮薄)한 풍습은 통렬히 징치하지 않을 수 없어 이에 죄를 정한다.” 하여, 영동군에 유배되었다가 병으로 풀려나와 죽었다. 사람됨이 강의(剛毅)하고 기절(氣節)이 있었다는 평을 들었다. 영광의 용계사우(龍溪祠宇), 영동의 초강서원(草江書院), 노성의 노강서원(魯岡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팔송봉사 八松封事》가 있다.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논산명재고택 (論山 明齋 古宅, 중요민속문화재 제190호)

충남 논산시 노성면 노성산성길 50 (교촌리)

조선 숙종 때의 학자인 윤증(1629∼1714)이 지었다고 전하는 집이다. 후대에 수리가 있었던 듯 하며 그 세부기법은 19세기 중엽의 건축양식을 보이고 있다. 노성산성이 있는 이산(尼山)이라고도 불리는 노성산 자락에 노성향교와 나란히 남향으로 배치되어 있다.

높은 기단 위에 앞면 4칸·옆면 2칸 규모의 사랑채가 있고, 왼쪽 1칸 뒤로 '一' 자형의 중문간채가 자리잡고 있다. 중문간채는 안채가 바로 보이지 않도록 1칸 돌아 들어가게 중문을 내었다. 중문을 들어서면 'ㄷ'자 모양의 안채가 있어서, 중문간채와 함께 튼 'ㅁ'자 모양을 이루고 있다.

집 앞에는 넓은 바깥마당이 있고 그 앞에 인공연못을 파고 가운데에 원형의 섬을 만들어 정원을 꾸몄다. 또한 안채 뒷쪽에는 완만한 경사지를 이용하여 독특한 뒤뜰을 가꾸어, 우리나라 살림집의 아름다운 공간구조를 보이고 있다. 모든 건축부재의 마감이 치밀하면서 구조가 간결하고 보존상태도 양호한 조선의 양반주택으로 중요하다.

지정 당시 명칭은 '윤증선생고택(尹拯先生故宅)'이었으나, 조선 숙종 때의 이름난 유학자 명재 윤증(1629-1711)이 지었다고 전하는 가옥인 점을 반영하여 그의 호를 따라 ‘논산 명재 고택’으로 지정명칭을 변경(2007.1.29.)하였다. 논산 명재 고택은 이산(尼山)이라고도 불리는 노성산에서 남쪽으로 흘러내리는 산 줄기의 남사면을 배경으로 남향으로 자리 잡았으며, 집 전체의 평면 구성 형태는 ‘ㄷ’자의 안채와 ‘一’의 사랑채가 조합을 이룬 ‘ㅁ’자형 집으로, 사당은 가옥의 뒤편 동쪽의 경사지에 복원하여 별도의 공간으로 배치하였다. 사랑의 앞면에는 넓은 마당을 두었으며, 마당의 왼쪽으로 우물과 연못이 조성되어 있다.

 

윤증(尹拯, 1629-1714)

노론과 소론의 분립과정에서 소론의 영수로 추대되어 활동하면서 송시열(宋時烈)과 대립했다.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자인(子仁), 호는 명재(明齋)·유봉(酉峰)이다. 할아버지는 황(煌)이고, 아버지는 선거(宣擧)이며, 어머니는 공주이씨(公州李氏) 장백(長白)의 딸이다. 성혼(成渾)의 외손이다. 아버지와 유계(兪棨)에게 배우고 뒤에는 장인인 권시(權諰)와 김집(金集)에게 배웠다. 29세 때에는 김집의 권유로 당시 회천에 살고 있던 송시열(宋時烈)에게 〈주자대전 朱子大全〉을 배웠다. 송시열의 문하에서 특히 예론(禮論)에 정통한 학자로 이름났다. 1663년(현종 4) 천거되어 내시교관·공조랑·지평 등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양했다. 숙종대에도 호조참의·대사헌·우참찬·좌찬성·우의정·판돈녕부사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했다.

 

노론과 소론의 분열

1680년(숙종 6) 김수항(金壽恒)·민정중(閔鼎重) 등이 경연에 나오도록 청하고, 박세채(朴世采)·조지겸(趙持謙) 등이 거듭 출사를 권했으나 사양했다. 그는 송시열·김석주(金錫胄)·김만기(金萬基)·민정중의 세도가 바뀌어야 하고, 서인과 남인의 원한이 풀어져야만 출사할 수 있다고 했다. 이 일로 최신(崔愼)이 송시열의 죄없음을 변명한다는 핑계로 윤증의 사서(私書)를 공개하면서 그가 스승을 배반했다고 했으며, 또 김수항·민정중 등도 윤증이 사사로운 감정으로 송시열을 헐뜯었다고 했다. 한편 윤증이 아버지가 죽었을 때 윤휴(尹鑴)의 조문을 받았는데 이 사실을 안 송시열은 불쾌하게 여겼으며, 또 숙종초에 송시열 일파가 남인에게 화를 입었을 때 윤증이 남인과의 인연관계로 화를 면한 일로 해서 더욱 송시열의 의심을 받았다.

또한 아버지의 묘갈명(墓碣名)을 송시열에게 부탁했는데 송시열이 내용 중에 야유하는 뜻을 적자 이의 시정을 요구했으나 들어주지 않았다. 이 일로 사제 간의 의리가 끊어졌으며, 두 사람 사이에 일어난 반목(反目)을 '회니(懷泥)의 반목' 또는 '회니의 사건'이라고 하는데 송시열은 회덕(懷德)에, 윤증은 이산(泥山)에 산 연유로 그렇게 불렸다. 이러한 개인적 감정과 함께 남인에 대한 처벌문제로 서인이 강·온 양파로 분리될 때 그를 지지하는 사류(士類)들에 의해 소론의 영수로 추대되었다.

그는 송시열을 "대인의 의와 소인의 이익을 함께 행하고, 왕도와 패도를 같이 쓴다"(義利雙行王覇竝用)고 비난했으며, 사국(史局)에 편지를 보내어 아버지의 일을 변명하고, 다시 이이(李珥)가 젊어서 불문에 들었던 일을 끌어서 이이는 입산의 잘못이 있으나 자기 아버지는 처음부터 죽어야 될 의리가 없다고 했다. 이에 대해 유생들이 들고 일어나 선현을 모독했다고 그를 성토함으로써 조정에서 시비가 크게 일어났다. 송시열이 변명의 상소를 올려 죄가 전부 자신에게 있다고 했으나, 왕은 듣지 않고 윤증을 전과 같이 대우하지 말라는 명을 내렸다. 사림과 간관(諫官) 사이에 비난과 변명의 상소가 계속되었다. 노론·소론 간의 당쟁은 계속되었고, 그가 죽은 뒤 1715년 유계가 지은 〈가례원류 家禮源流〉의 발문에 정호(鄭澔)가 그를 비난한 것을 계기로 당쟁이 격화, 소론 일파가 거세되고 아버지와 함께 관작이 추탈되었다(→ 색인 : 가례원류시말). 1722년(경종 2) 소론 유생 김수구(金壽龜)·황욱(黃昱) 등의 상소에 의하여 복관되었다.

윤증의 배사(背師)문제는 의리·명분의 껍데기를 쓰고 노론·소론 간의 격렬한 논쟁의 주제가 되었지만, 그 이면에는 양자의 사상적 견해, 정치적 노선의 차이가 놓여 있었다. 양자 모두 주자도통주의(朱子道統主義)에 입각한 철저한 유교적 도덕정치를 내세우고 있었다. 그러나 송시열은 훈척인 김익훈(金益勳) 등과 결탁하게 됨으로써 명분을 잃게 되고, 나아가 그 사회경제적 지향도 굴절되게 마련이었다. 말하자면 송시열을 비롯한 노론측은 현실과의 일정한 타협을 통해 권력을 장악하는 데 최우선의 의미를 두었던 것이고, 윤증을 내세운 소론측은 현실과의 타협을 거부하며 명분을 고수하려 했던 것이다. 저서로 〈명재유고〉·〈명재의례문답 明齋疑禮問答〉·〈명재유서〉 등이 있다. 홍주 용계서원(龍溪書院), 노성 노강서원(魯岡書院), 영광 용암서원(龍巖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성(文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