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돌 5길 (독수정길)
무돌 5길 (독수정길)
다섯 번째 길인 ‘독수정길’은 독수정이 있는 산음동에서 시작한다. 독수정과 주변의 원림을 살펴보고 마을 뒤 함충재를 허위허위 넘으면 남면 정곡리에 다다른다. 평촌이라 부르는 이 마을에서 증암천을 따라 887번 지방도를 향해 내려가면 정곡리 입구임을 알려주는 표지석과 왕버들, 그리고 제법 운치 있게 가꾸어진 한옥 한 채를 만나게 된다. 그 한옥의 담장을 따라 오른쪽으로 꺾어지면 경상리에서 내려오는 물길과 만나는데, 그 물길을 거슬러 올라가면 목적지인 경상리 정자가 나온다. 그러나 오늘은 평촌에서 절골길을 거슬러 올라 서봉사터를 살피고 서봉사터 조금 못 미쳐 마련된 임도를 넘어 사봉실을 지나 경상리로 가기로 한다.
산음동의 독수정원림(獨守亭園林)은 고려말 병부상서 등의 벼슬을 지냈던 서은 전신민(瑞隱 全新民)이 두 나라를 섬기지 않겠다며 은거한 곳이다. 그는 고려의 멸망을 안타까워하며 이곳에 북향으로 초정을 짓고 이백(李白)의 시 ‘이제시하인 독수서산아(夷齊是何人 獨守西山餓)’에서 따와 독수라 이름 하였다. 백이숙제처럼 절개를 지키겠다는 의지를 보인 것이다. 지금의 정자는 조선말인 1891년 후손들에 의해 재건된 것으로 본래는 떼지붕이었으나 1915년에는 중건하면서 앞면 3칸, 옆면 3칸에 한 칸짜리 방을 마련하고 골기와 팔작지붕을 올려놓았다. 하지만 지방기념물 제19호로 지정된 것은 정자가 아닌 주변의 원림이다. 이 지역에 있는 소쇄원, 명옥헌원림과 함께 조선 선비의 정원문화와 자연주의 정신을 보여주는 곳이다. 조성된 나무들을 살펴본 바에 의하면 이 원림에는 고려시대에 성행했던 산수 원림의 기법이 드러난다고 한다.
몇 가구 되지 않는 아담한 산음동을 가로질러 함충재(함충치, 含蟲峙)로 접어든다.
꾀꼴봉 동남쪽에 위치한 이 고개는 꾀꼬리가 벌레를 물고 있는 형국이라 하여 함충이란 이름을 갖게 되었다 한다. 한편 고갯마루가 넓고 크며 함지박 형이어서 그런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마을 바로 뒤 흑염소 방목지를 지나자 출입금지 푯말이 보인다. 산자락에 약초를 재배하고 있는 탓이다. 무돌길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각별한 주의를 기울여 피해가 없도록 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오르막길은 차량이 다닐 수 있을 정도로 넓은 편이지만 정상에서부터는 갑자기 좁아지는 오솔길이다. 주로 소나무가 많은 잡목 숲길로 내리막길의 마지막은 대나무의 고장 담양답게 대나무 숲이 울창하다.
내리막길 끝자락 대나무 숲에서 금줄을 두르고 주위에 황토 자욱이 역력한 선돌을 만난다. 함충재에서 넘어오는 또 다른 마을 입구인 탓일 것이다. 평촌에서는 지금도 정월 대보름이면 당산제를 지낸다고 한다. 할아버지 당산은 마을 입구에서 내촌으로 조금 들어와 마른 계곡을 넘어 대나무 숲에 있다. 오래 묵은 당산나무는 없어지고 심은 지 얼마 되지 않는 어린 느티나무가 단을 앞에 두고 금줄을 감고 있다. 마을회관 앞에 있는 두 그루의 느티나무는 본래 당산이 아니었으나 지금은 할머니당산 역할을 한다고 하는데, 바로 곁에 새로 지은 유산각이라는 이름의 정자가 있다.
정곡리 평촌마을은 평촌과 내촌으로 나뉘어 있다. 그래서 평내촌이라 부르기도 한다. 내촌에는 제법 그럴듯한 전원주택들이 여러 채 지어져 있다. 정곡리는 안 골짜기, 또는 속골이라는 의미를 가진다고 담양군 홈페이지에 나와 있는데, 솥 ‘鼎’ 자를 사용하는 것이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마을회관 앞의 마을 유래비를 살피니 예전에는 가마재, 또는 솥골이라 불렸다고 적혀 있다. 마을 안에 가마솥 형국의 명당이 있어 붙여진 이름이라는 것이다. 절골길에 올라 마을을 둘러보았으나 보는 눈이 없어서 그런지 가마솥 명당터를 찾을 수 없다.
서봉사(瑞峯寺)터에 들르기 위해서는 증암천 물길을 따라 평촌의 마을길, 즉 절골길을 타고 서봉산이라고 하는 바위산을 향해 한참 올라가야 한다
. 마을회관에서 천변을 따라가다 물맛 좋다는 샘을 만나 시원하게 목을 축인다. 마을을 지나 송어양식장에 이르고 여기서 조금 더 오르면 감나무 농원이 길을 막는다. 서봉사터는 이 감나무 농원 안에 과거를 기억할 수 없을 정도의 모습으로 사라져 가고 있다. 주변의 산봉우리에 오후의 가을햇살이 눈부시다. 서봉사는 고려 때 세워졌다가 조선후기에 사라진 제법 규모 있는 절집이었다고 한다. 전남대 교정으로 옮겨진 삼층석탑과 석종형부도, 증심사로 이사 간 석조보살입상, 원효사에서 보관하다 불에 타버린 원효대사 영정 등 여러 유물들이 남겨져 있어 그 규모를 짐작케 한다. 비록 지금은 석등부재와 괘불지주 부재, 자연석 아래 조성된 석굴 등만 농원 한편에 남아 있을 뿐이지만…….
서봉사터를 일별하고 내려오는 길, 송어양식장 지나 오른쪽 산자락으로 비포장 임도가 나있다. 차량 통행이 가능한 이 고갯길은 주로 대나무 숲이 길 양쪽을 덮고 있다. 사봉실로 통하는 길이다. 상당히 높은 곳에 자리 잡은 사봉실(士峰室)은 대여섯 가구의 조그만 산골마을로 조선 명종 때부터 형성되기 시작한 마을로 정곡리에서 맨 처음 조성되었다 한다. 마을을 막 벗어난 시멘트 포장농로에 서서 정곡리의 자연마을들인 평촌, 내촌, 시문기 등과 경상리까지를 휘둘러 내려다본다. 왕당산과 백남정재 쪽에서 내려오는 물길과 정곡리 절골계곡의 물길이 합쳐지는 제법 너른 들판도 눈 안에 가득 가을이다.
경상리로 내려와 정자 곁의 마을 유래비를 살핀다. 늦가을 햇살이 설핏 기울고 옷깃 새로 파고드는 바람은 소름을 돋게 한다. 경상리는 조선 인조 때부터 형성되기 시작한 마을로 환암촌(環岩村), 경상동(京相洞) 등으로 불리다 경상리가 되었다 한다. 마을이 기대어 자리 잡은 북쪽에는 재상이 나온다는 왕당산이 높고, 동쪽으로는 유둔재, 서쪽으로는 무등산이 포근하게 감싸 안고 있다. 백남정재에서 내려오는 물길인 어사천은 구불구불 마을 앞을 흐른다. 첫 마을인 한암촌은 한국전쟁 때 타버리고 지금은 경상골을 비롯하여 봉암촌, 모산촌, 물레방앗골, 절터마을 등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